사람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① 자연인 ②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③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영리’ 소책자에서 많이 보신 그림이시죠!
<자연인>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아름답게 보실까요? 물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갈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성령을 따라 행하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저는 세 가지 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정직한 자기 성찰과 고백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죄는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나’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어로 죄는 S I N 즉 sin이라고 합니다. → SIN 그런데 이 죄(sin)라는 단어 가운데에는 I 즉 ‘나’라고 하는 글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지 않고, 대신 나 자신을 우주의 중심과 가치 판단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SIN의 첫 글자 S는 south 즉 남쪽을 이르는 말이며, 끝 글자 N은 north 즉 북쪽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남과 북의 한 가운데 I, 즉 ‘내’가 있으니!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가장 큰 방해요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영어로는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면! 이렇게 풀어 쓸 수 있습니다. ⇨ Christ + i(I) a(am) n(nothing) 다시 말해서,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그리스도 외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거나 축소합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라는 식의 변명과 자기합리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자신의 변화를 막는 가장 나쁜 습관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를 하기보다는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여러분에게 간단하지만 꾸준한 습관을 가지실 것을 권면합니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단 5분 만이라도, 오늘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어떤 순간에 화가 일어났는지 ▸어디서부터 욕심이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성령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결코 자기학대가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행동입니다. 고백을 통해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공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 “성령님! 내가 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제 내가 주인 된 삶을 내려놓고 성령님을 초청합니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자신의 죄와 허물을 직시하고,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되기를 추구하면! 그때로부터,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우리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을 의지하는 ‘의식적인 습관’이 필요합니다.
성도가 죄와의 싸움, 육체의 욕심과 싸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을 통해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갈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네!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 원리를! 이어지는 17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갈 5:17a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이 말을 풀어서 말하면! ⇨ 육체의 소욕은 ‘성령과 전쟁을 치르고’, 반대로 성령은 ‘육체의 소욕과 전쟁을 치르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즉, 성령님과 교제하며 동행할 때, 성령께서 친히 내 ‘육체의 욕심’에 대해 전쟁을 치러주신다(거스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약속이고,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은! 자기의 이를 악물거나, 자기의 굳센 의지의 능력을 동원하거나, 단호한 결단으로, 그 유혹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따르면! 죄의 유혹이 올 때, 우리는 즉시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육체의 소욕에서 자유하는 길은, 그저 ‘안 돼!’라고 말하며,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내 속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소욕과 싸워주세요. 제가 너무 힘듭니다.”라고 기도하면 즉시 성령님께서 싸워주십니다. 놀라운 것은! 나는 육체의 소욕과 싸워 이기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능히 이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런 은혜를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초청 없이 우리의 삶 안으로 불쑥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청과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와 같고 연약함이 많습니다. 늘 유혹에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 내 삶에 들어와 내주하시고, 나를 대신하여 죄의 유혹과 싸워주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즉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날 대신하여 싸워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누리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책임과 실천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완성되긴 어렵습니다. 신앙공동체 속에서 더 잘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속회나 선교회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때로는 솔직한 권면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그룹 안에서 영적 생활을 나누고, 기도의 동역자를 맺어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 그리고 서로의 변화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여러가지 유혹이 있고, 때로는 육체의 법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직장에서의 경쟁, 가정에서의 불화, 경제적 스트레스, 자녀 양육의 부담…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실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한 개인만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은! 개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위해 일하시기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곳에 함께 계시고, 마가의 다박방에서처럼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더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회나 선교회 공동체를 단순한 조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한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영적 형제자매 공동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영적으로 지켜 주고 세워주는 중보자들! 세움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힘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속회와 선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이 소그룹 공동체를! 여러분의 믿음의 지키고 성장 성숙시키는 장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일러 죄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진정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결단하고 정리해야 할 일들, 또한 회복되어야 할 내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2. 때로 시로 넘어지고 낙심하고 실망하는 삶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보고, 진정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결심합시다. 이성과 합리, 상식과 윤리, 체면과 인정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 것인지?
3. 속회(선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그리고 변화에 대해 나눌 것을 계획하십시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사는 게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의식주만 해결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육체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창 2:7을 보면 인간 창조의 기사가 나옵니다. 창 2:7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먼저 →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 그 코에 생기(=하나님의 숨결, 성령)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 사람이 생령(生靈, living soul)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단지 육체와 혼으로 지어진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혼’과 ‘영’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물과 구별되는 영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 원리로 볼 때 두 가지 원칙을 잘 지킬 때 비로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흙에서 왔기 때문에, 의식주가 모두 흙을 가까이하는 게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원칙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친화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영혼이 건강하고, 심령에 평안과 기쁨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써 영혼의 참 평안과 기쁨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불행한 것입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안락하고 배불러도 공허합니다. 바로 영적인 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진정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 친화적인 삶’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의 말씀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 8:3b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육신이 배부르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영혼이 배불러야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육신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2. 근본으로 돌아가라! (ad fontes!)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며,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신학자이기도 한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ad fontes’라는 대명제를 제시했습니다. 여기 ad fontes란? 라틴어로 → ‘원천(근원)으로!’라는 뜻입니다. ad는 영어로 방향 지시사 ‘to’이고 / fontes는 ‘fountains’ 혹은 ‘sources’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으로 돌아가라. (Back to basics.)’ ‘근본으로 돌아가라. (Back to fundamentals.)’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명제는! 역사를 뒤흔드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르네상스 곧 ‘문예부흥’의 신호탄이 되었고, 또한 기독교 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진정한 개혁은 무엇이고 또한, 성도의 새로운 삶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네! ‘말씀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이 될 때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는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향한 선포이기도 했지만,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강력한 요청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네!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험당할 때, 고장 나면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든 주의사항과 안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딤후 3:15∼17입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이 년초에! 우리는 다시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라!” “말씀으로 내 인생을 새롭게 하리라!” “내 신앙의 첫사랑을 회복하리라!”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근본과 기초로 세우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를 이 시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강조하고자 하는 말씀의 중심 골격은 → ① 성경 읽기 ② 성경 묵상 ③ 성경 암송 ④ 성경 필사 이 네 가지입니다. 사실 이 네 가지는 각각 독립된 훈련이지만, 함께 실천될 때 서로를 보완하며,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세워 줍니다.
첫째, 성경 읽기 — 말씀과의 첫 만남을 여는 문입니다.
성경 읽기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귀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루의 일과 중, 말씀을 위한 시간을 의도적으로 마련할 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재정렬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약속, 명령과 위로를 접하게 됩니다. 이 읽기는 ‘우리의 지성에 말씀을 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읽기만으로 끝나면 말씀이 ‘머리의 지식’에 머물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인 묵상이 필요합니다.
성경 읽기를 위한 구체적인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하십시오. 아침 기도 직후 20분, 점심 식사 후 10분, 또는 잠자기 전 15분이라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규칙성입니다. 우리교회 2026년 달력에도 그날 읽어야 할 성경이 기록되어 있어, 그것을 따라가면 1년에 ‘성경을 통독’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 신앙생활의 교과서인 성경을, 한 번도 안 읽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도 금년엔 반드시 완독하리라! 결심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말씀 묵상 — 읽음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입니다.
묵상은 “이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훈련입니다. 묵상은! 읽은 본문을 가슴에 품고 내 삶의 사례와 연결해 보는 것입니다. 묵상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살게 하는지? 어떤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본문을 읽고 넘어가는 사람과, 한 구절을 가슴에 새긴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묵상의 방법을 소개합니다. 먼저, 한 절 혹은 한 본문을 선택하십시오.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고, 마음에 울리는 단어와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리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세 가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해보십시오. → ① 이 말씀이 나의 생각과 감정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②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③ 이 말씀 앞에서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꾸준히 자신에게 하다 보면! 말씀이 우리에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행동의 동력’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셋째, 말씀 암송 — 위기에서의 무장입니다.
삶의 위기와 유혹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의 첫 반응은 우리 안에 저장된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암송된 말씀은! 즉각적인 신앙의 반응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 때에 암송하신 신명기의 말씀으로 대응하여 승리하셨습니다. 다윗과 다니엘도 말씀을 기억하며 위기를 견뎌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일상의 암송 훈련을 통해서 위기의 순간에 필요 적절한 말씀이 떠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 암송을 위해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매주 주보에 ‘요절’을 주일 낮 예배 맨 아랫 칸에 소개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속회마다 그 주의 요절을 함께 외우시길 바랍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암송을 반복하면, 기억에 꼭 남게 될 것입니다. 암송은 단지 기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암송한 말씀이 우리의 양식과 힘이 되어, 시험과 위기 때 반사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훈련입니다.
넷째, 말씀 필사 — 손으로 새기는 영성훈련입니다.
필사는! 우리가 손과 눈과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고, 말씀이 더 깊게 새겨집니다. 그러니까 필사는 읽기와 묵상, 암송을 통합하여 말씀을 ‘몸화’하는 과정입니다. 학습 이론에서도 ‘쓰기’는 기억과 이해에 강력한 영향을 줍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사 실습을 제안합니다. ‘400구절 & 노트’와 지난 첫 주일에 나눠드린 ‘믿음의 가정 세우기’ 필사 노트에 매일 한 페이지씩이라도 노트에 써 보십시오. 그리고 그 옆에 그날의 적용 한 줄을 적으십시오. 한 달이 지나면 자신이 필사한 노트를 통해 영적 여정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속회에서는! 한 주간 필사한 것을 가져와 서로 나누고, 기도 제목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세우는 영적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시오.
이 네 가지 훈련을! 통합적으로 실행할 때, 우리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읽기는 신앙의 폭을 넓혀주고, 묵상은 신앙의 깊이를 깊게 하며, 암송은 위기에서의 방패가 되고, 필사는 말씀의 내면화를 완성해 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일관성입니다. 하루 5분이라도 매일 지속하는 것이, 한 달에 한 번 길게 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이제 첫째, 개인 실천 계획을 세우시기도 하고 둘째, 가정적인 실천 계획도 세우시고, 셋째, 속회적인 실천계획도 세우시길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생령(生靈, living soul)인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되새기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것에 대해 나눠봅시다.
2. 다음 네 가지 ① 성경 읽기 ② 성경 묵상 ③ 성경 암송 ④ 성경 필사 중 본인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무엇인지? 말해보고, 그 벽을 넘을 수 있는 실천적 지혜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근본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나의 삶의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의 결론은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중심을 이룬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소아시아지방의 정치 경제 수도였습니다. 에베소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엔 척박한 땅이었지만, 바울은 2차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3차전도 여행 때는 3년가량 이곳에 머물면서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선교적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세워졌고, 소아시아 지역에 일곱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은 제3의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최선을 다한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칭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가려서 색출해 낼 수 있을 만한 영적 지혜’를 칭찬합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에베소교회는 그로 인해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제 책망하십니다.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 ‘그러나’라는 말은, 앞의 모든 칭찬을 뒤집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책망의 음성을! 나 자신과 가정과 우리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단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첫사랑 회복’을 위해 3가지 ‘R’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영어로는 Remember, Repent, Repeat하라는 것입니다. 네! ‘기억하라, 회개하라, 반복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1. 기억하라. (Remember)
첫사랑의 회복을 위한 첫째 단계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계 2;5a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여기 ‘생각한다’는 단어 (므네모뉴오)는 ⇨ ‘생각하는 신앙자세를 가지라’는 명령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의 시간과 vs 현재 나의 모습과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의 재산을 유산으로 미리 받아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로 배를 채우던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 이렇게 생각합니다. 눅 15:18b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눅 15:19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면서 ‘차라리 품군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굶주림과 방황속에서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어디서부터 내가 잃어버린 자가 되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 때, 회복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의 첫사랑을 기억하며, 나를 꿈마을엘림교회에 보내주시고, 여기서 좋은 성도들과 속도원과 선교회원들을 만나게 하신 것도 감사하지만, 그저 신앙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의 행복한 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좀 더 구체적으로 ▸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아직 믿지 않거나 연약한 식구들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회개하라. (Repent)
두 번째 우리를 향한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이 명령어는 ‘생각한 것’을 의지적인 결단을 갖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의지적인 결단을 가지고 일어섭니다. 눅 15:20a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여기 ‘일어나서 돌아가니라.’는 말은 ⇨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네! 첫사랑의 회복을 위해서는 ‘회개하여 돌이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이 어렸을 때, 엄마가 아끼는 램프를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떨어뜨려서 유리에 금이 갔습니다. 아예 박살 났다면! 어쩔 수 없이 고백했을 텐데, 금만 간 것 때문에 미혹을 받았습니다. 램프의 유리를 금이 간 쪽이 보이지 않도록 안쪽으로 돌려서 다시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이후에, 엄마가 그 램프의 근처에만 가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겁니다. 오랫동안 불안해하다가 드디어, 엄마가 램프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합니다. “고든! 네가 그랬니?” 그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고백하지 않고 숨기고 있던 기간은!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이 공포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가지고, 후일 목사님이 된 고든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하는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대답이 길지 않다. ‘네’라는 회개의 한마디면 족하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첫사랑의 회복은! ‘회개하는 심령’을 통하여 이뤄지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첫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특별히 강조된 단어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첫사랑이 ‘식어지고 없어진 곳’에는 주님이 머무르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습기가 없는 곳에서 사랑의 씨앗이 싹틀 수 없으며, 사랑이 없는 곳에 주님이 머무르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 속에 ‘사랑 없이도 열심’이 있을 수 있고, ‘사랑 없이도 봉사’할 수 있고, ‘사랑이 없이도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봉사나 열심이나 직분 속에서는! 결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은 가슴속에는!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고, 남의 잘못을 따지기 좋아하며, 용서할 줄 모르고,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겉모습만 봐서는 거룩한 성도의 모습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속에는 욕심과 질투로 가득한 어리석은 심령의 모습이 바로 오늘 자신의 모습이라면! 회개하는 결단을 통하여,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처음 행위를 가지라. (Repeat)
본문 말씀 5절은 ‘첫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생각하라. ▸회개하라는 말씀에 이어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은 ⇨ 능동태 명령어로 ‘지금으로부터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해 가져야 할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로 반복해야 할 실제적‧동사적 사랑인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남편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같이 있으면 지겹고, 없으면 아쉬운 사이”입니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데즈먼드 모리스’의 대표적인 책가운데 ‘피플 워칭’(People Watching)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가 동물과 사람부부를 관찰한 결과를 쓴 책인데, 결혼한 지 오래된 - 묵은 부부일수록, 서로 간에 말수가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자! 저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식사시간 때에만 잠깐 그 이름을 부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 그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시길 바랍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으시길 바랍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며 그 편지를 묵상해 보고, 베껴 적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가 되는 구절들은 암송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봉사와, 지식과, 땀 흘림의 수고와, 인내가 있었던, 에베소 교회라고 할지라도! 첫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은 그 촛대를 옮기리라고 무서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첫사랑의 회복을 이룰 수 있는 세 가지 ‘3R 법칙’을 주셨습니다.
① 생각하라. (Remember)- 구원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② 회개하라. (Repent)-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결단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③ 반복하라. (Repeat)- 첫사랑의 행위를 반복하면서 삶에 새기고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나는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시간 ‘생각하시고’ ‘회개하며 결단하여’ 1년 내내 ‘반복해서 시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과의 사랑은 놀랍도록 뜨거워지고 생생해질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활력과 생명력으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내가 처음 예수님을 사랑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지? 솔직하게 나눠 봅시다.
2. 최근에 ‘회개’가 필요하다고 느낀 구체적인 상황이 있었습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고, 앞으로 어떤 실천적 결단을 할 수 있는지 나눠 봅시다.
3.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반복적으로 시행해야 할 ‘영적 습관’은 무엇인지? 자신의 실천 계획을 나눠 주세요.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만드시면서 ‘갈증’ 곧 ‘목마름’이라는 경보장치를 달아 두셨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이 말라비틀어져서, 편안하고 부드러운 말이나, 감사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칠고 날카로운 신경질적인 말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만족이 없고, 뭔가에 목마름을 느끼면 느낄수록 마음은 공허해 집니다. 가진 것도 많고 이룬 것도 많은데, 정작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이런 ‘근원적 목마름’으로 고뇌하며 살았던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던 여리고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고, 경제적인 부가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런 도시의 세관장이었습니다. 그러니 지위도 높았고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뭔가 2% 부족했습니다. 지위나 돈이 채워줄 수 없는, 심령적인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을 꼭 만나기를 목말라 합시다.
2천 년 전 여리고라는 도시는 대단한 무역도시였습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여의도나 강남과 같은 금융과 무역의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삭개오는 세관장이었고,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눅 19:3 →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이 “보고자 하되”란 말은, 단순한 호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앞서 달려가,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어지는 4절입니다. 눅 19:4 →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성경은 아주 현장감 있게 삭개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① 달려가 ② 보기 위해 ③ 올라갔다. 이런 모습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체험하고 싶은 목마른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커다란 나무 위로, 키가 작고, 잘 먹어서 얼굴에 기름이 끼고, 운동량은 모자라 배가 나온 삭개오! 누구나 알만한 그 도시의 유명인사가 버둥대며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자기 체면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회적인 지위, 명성, 체면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삭개오는 창피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이나 손가락질을 괘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수고와 댓가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삭개오 같은 마음과 행동력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의 열정과 적극성이 없기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체험 없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체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Experience ‘체험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체험하고자 얼마나 배고파하며 목말라 하십니까? 당시 여리고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 정도를 구경하고 싶어 했으나, 삭개오는 직접 예수님 그분을 만나는 체험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삭개오 같은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굶주린 마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너무나 정겨운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5절입니다. 눅 19:5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묵어야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네!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면! 주님은 우리를 주목하여 보십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고 친히 만나주십니다. 또한,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주십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목마른 영혼에게 참 만족을 주시려고, 영혼의 생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 4:14입니다.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길 원하고, 은혜를 체험하길 원하고, 능력 체험하길 원하고, 성령충만 하길 원하고, 목말라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사모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만나주시고 채워주시는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합시다.
삭개오는 외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대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과 행복은 별개입니다.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속으로는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 밖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성공 후의 허탈, 번영 후의 허무, 명예 이후의 허전함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입니다.
네! 삭개오는 지금 외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만족이나, 사회적 신분이 주는 즐거움보다, 인간 본연의 행복에 목마른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의 시대지만 오히려 ‘내려놓음과 비움의 영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영혼의 행복을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는 자가, 배부르고 만족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금세기 설교가 토니 에반스(Tony Evans)가 지적하듯이 →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실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굶주린 심령으로 갈망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목마름이 필요합니다. 나와 하나님만이 아는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누리고자 하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날마다 이런 고백을 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에게, 이런 놀라운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요 7:37∼38입니다.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네!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셔서, 주님께서 주시는 갈함이 없는 만족, 마르지 않는 내면의 행복이, 생수의 강같이 흘러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 합시다.
그날 예수님의 주위를 둘러쌓던 군중들과 삭개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군중들은 예수님의 팬클럽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근본적인 변화’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변화를 목말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앞으로 달려갔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곧바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삭개오는, 그동안 생명처럼 아껴오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정리하겠다는 결심을 공표합니다. 근원적인 변화를 목말라했기에 내린 결단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에게 ‘돈’이 주님이고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심령에 진정으로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이 주인이 되셔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근원적인 변화를 목말라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 받고자 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즉시 놀라운 축복을 선언해 주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눅 19:9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은 Today, ‘오늘’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5절과 9절에서 두 번이나 ‘오늘’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체험을 목말라 하고,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하고,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곧 바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오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 받고 변화 되는 것을 자꾸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아직은 세상적으로 할 일이 많고 재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6:2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삭개오는 예수님 체험을 목말라 했고,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했고,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무화과나무에라도 올라가서, 그 은혜 입기를 열망했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갈망, 거룩한 갈망(divine desire)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그를 만나주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 가정에 들어와 주시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나눔과 묵상
1.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근원적인 삶의 변화를 갈망하고 실천했던 일들 중에, 내가 본받고 실천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혹 하나님이 나를 채우실 수 없을 정도로, 내 속이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오늘’ 나의 변화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참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의 전제하에, 내가 지금 목말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비우고 채워야 야 할 것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미가서는 예수님의 탄생 약 700년 전의 예언서입니다. 본문에서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지목합니다. 미가가 이곳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거론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다윗 왕의 출생지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언급하면서도 메시아를 단순히 다윗의 후손으로 한정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미 5:2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여기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를 일러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메시아는 역사적 실존 인물인 다윗보다 훨씬 더 상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혈통으로는 분명히 다윗의 후손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더 근원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태초로부터 계신 분이 바로 메시아!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바로 이 미가서 5:2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마 2:6 →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또한, 헤롯 왕 때에,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점성가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이렇게 수소문하며 다녔습니다. 마 2:1b∼2 →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여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라는 말에,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헤롯 왕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메시아’의 탄생 지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구약성경의 전문가들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역시 미 5:2절을 인용하여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이 들판에서 들은 천사의 합창을 이렇게 전합니다. 눅 2: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기서 언급된 평화는 바로 오늘 본문인 미 5:5절에 나오는 ‘평강’입니다. 누가복음 역시, 미가서의 예언을 ‘메시아 예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의 탄생 때에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가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에서 ‘백성들의 찬송’으로 다시 되풀이된다는 사실입니다. 눅 19:38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인용한 미가의 메시아 예언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시어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미가가 선포한 메시아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즉 메시아의 표상으로 ‘목자’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미 5:4 →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여러분! 목자는! 양의 안전을 보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지혜롭고 용감해야 합니다. 양의 생존에 필요한 풀과 물을 찾을 줄 알아야 하고, 양을 노리는 포식자를 피하거나 물리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가는 메시아를 ‘목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그는 ‘여호와의 능력’과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목자로 인해서 양들은 비로소 그 땅에 평안히 ‘거주’할 것이고, 양의 숫자가 늘어나고, 땅끝까지 채우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가 지켜주는 양처럼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날 것이며, 번성하고 창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미가의 이런 외침은 당시 유대 백성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5절에서 메시아의 본질적 속성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미 5:5a →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히브리어 성경을 그대로 발음하면 이렇습니다. “하야 쩨 샬롬.(חיה זה שלום)” → 이 말은 “그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평화의 왕이 여러분 심령과 가정에 그리고 남과 북, 나아가서 온 세계에 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 삶의 평화 대망
매년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에서 전국 교수들에게 설문하여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합니다. 올해는 → 변동불거(變動不居) =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한다’는 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선정이유로는 “한국 사회가 거센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으며,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시대적 메시지를 상징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안정과 평화’가 예측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지혜롭게 잘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것입니까? 과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선지자들이 ‘평화’를 메시아 대망이라는 차원에서 외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 첫째, ‘평화’는 우리가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늘 평화가 그리웠고, 평상시 인사가 ‘샬롬’이었던 이유도 ‘평화’가 삶 속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잘살게 되었고 부자가 되었어도, 세상이 평화롭지 않으면 삶이 망가집니다. 도둑질, 강도, 살인, 사기, 인신매매, 성폭력 등이 만연한 세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꾸려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매일 매일 상상도 할 수 없는 불의한 일들을 뉴스로 접하고 있습니다.
가장 평화로워야 할 가정도 평화롭지 못합니다. 대부분 돈 문제로 부모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에 다투고 갈등합니다. 정말이지 개인이나 가정이나 공동체나 국가나 우리 삶의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화의 왕’이 오시기를 기대한 이유가 공감됩니다.
→ 둘째, 우리의 힘만으로는 평화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론 안 되니, 메시아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이 말은! → 평강이 인격화된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 즉, ▸“그는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표준새번역 개정판)라는 뜻입니다.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공동번역 성서 개정판)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평화의 조성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개인, 가정, 사회, 나라, 세계가 되어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3. 남북한의 평화를 위해!
미가는 3절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유지되게 하고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즉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포로생활이 예고된 가운데 있습니다. 아니, ‘예고’라고 하기보다 ‘선고’라고 하는 것이 더 마땅할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 벌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할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하다가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 아니라, 존속되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비춰보면서 읽을 때, 우리는 분단이 끝나고 통일이 오게 해 달라고, 다시 한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분단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세요. 마지막 부분에 ‘땅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미 5:4c →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여기 ‘땅끝이 어디입니까?’ 지리적인 거리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가장 먼 곳이 땅끝이 되겠죠!
그러나 상징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땅끝은 바로 북한이라고 할 것입니다. 선교적인 관점에서도 거리와 상관없이, 전도하기 가장 어려운 곳을 ‘땅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시대의 대표적인 땅끝은 북한이고 또한 우리의 가정입니다.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우리는 주님의 통치가 북한까지, 그리고 우리 가정의 믿지 않는 식구들까지 미치도록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통치를 통해 군사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의 미가서 4장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평화의 노래인지 모릅니다.
미 4:3∼4 →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메시아가 이 세상을 다스릴 때, 이와 같이 아름다운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되어서, 우리 세대에 평화적인 통일을 보게 되는 은혜의 날이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미가가 예언한 메시아의 ‘목자적 이미지’(양을 보호하고 먹일 줄 아는)를 교회와 공동체에서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돌봄, 안전망 마련, 갈등 조정 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우리 일상에서 어떤 변화를 요구한다고 생각하십 니까? 직장·가정·이웃 관계에서 실천 가능한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3. 설교에서 언급한 ‘땅끝’과 오늘날의 선교적 과제(예: 북한과 우리 가정)에 대해서 각자의 형편에 따라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오늘의 본문 시 139편의 표제를 보면! 이 시는 ‘다윗이 지은 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보면, 그는 늘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거룩한 부담감’과 동시에 ‘담대함과 소망’을 함께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 음욕으로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입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꾸짖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안정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니 죄를 지적받은 것에 대해서, 숨기거나 왕권의 힘으로 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침상이 곰팡이가 슬도록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서, 도망자의 삶을 살아갈 때는 얼마나 기가 막히고 답답한 일이 많았습니까!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감시자’이기 보다는, ‘돕는 자’로서 자신을 살피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1.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
첫째, 주님은 나의 행동과 생각을 다 아십니다. 다 같이! “주님은 나의 행동과 생각을 다 아십니다.” 시 139:2 →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먼저, 앞부분의 ‘앉고 일어섬’이라는 말은! 삶의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앉는 것도 아시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고 살피어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불꽃 같은 눈길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 139:7 →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이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길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 139:8 →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내가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 때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든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서는 시 139:9 →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라고 해서, 하나님을 피해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 후반부’를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시 139:2b →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 같지만,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체적으로 내 생각을 입으로 말하거나 발설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 좀 무섭습니까?
둘째, 주님은 나의 말을 다 아십니다. 다 같이! “주님은 나의 말을 다 아십니다.” 시 121:4 →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하면서 삽니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의 표현’이라, 그 사람의 언어생활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쓸데없는 말을 하건, 선한 말을 하건! 주님께서 다 아신다는 겁니다. 혹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주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말의 의미를 아시고, 어떤 생각에서 나온 말인지까지 다 아십니다. 내 혀로 말하지 않은, 혀 밑에 감추어진 말까지도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을 얼마나 함부로 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죄를 짓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 6:5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선지자로 소명 받는 자리에서 첫 고백이 ‘입술의 문제’였다는 것은 우리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는, 이사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입술, 남에게 힘과 용기와 능력과 희망을 주는 입술, 남을 죽이는 입술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입술이 되어,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거룩한 두려움을 가집시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읽으시고, 마음의 동기와 비밀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은! ‘두려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닙니다. 경외(respectful awe)로서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 자신을 바로 보는 ‘겸손’으로 이끕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못하게 하며, 회개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 양심을 깨우고 회개를 촉구하는 수단이 됩니다. 이는 율법적 강박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정결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되면, 실제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이런 것들입니다. ▸죄에 대한 민감성 회복 ⇨ 작은 거짓말, 이기적 행위, 남을 무시하는 태도까지도 회개의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관계 회복 ⇨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화해와 용서가 시작됩니다. ▸사역과 공동체의 순수성 ⇨ 교회 안에서 권력과 편 가르기, 위선이 사라지고 섬김과 진실이 회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용서와 새 출발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구체적인 신앙생활 지침을 몇 가지 제안해 드립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5분 회개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 자신이 부족했던 점을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매주 속회 모임을 ‘고백의 모임’으로 혹은 ‘영적 점검 시간’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 신실함을 가진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의 신앙을 점검하고 기도해 준다면, 우리의 영적 삶은 안정성과 함께 큰 진보가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속회가 여의치 않은 분이라면!> ▸부부의 기도 시간 혹은 가족(정) 예배를 드리십시오. ⇨ 이는 개인의 신앙회복뿐 아니라, 가정의 신앙회복으로 그리고 교회생활의 회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3. 든든함과 위로, 소망을 누립시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사실이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반대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나를 오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할 때에도! 하나님만은 나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자라고 느끼는 그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의 갈등이나 직장에서의 좌절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때로 ‘아무도 나를 모른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작은 눈물과 숨겨진 한숨까지도 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은! 큰 위로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단지 아시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부터 “주의 눈이 나를 보셨고 나를 살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눈길은 ‘정죄의 눈길’이 아니라, ‘치유의 눈길’이었습니다.
상처받은 부부, 자녀를 걱정하는 부모, 은퇴와 미래를 염려하는 직장인들…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안심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계획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고단해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날들을 알고 계시고, 또한 선한 길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시 139:13,16 →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성도 여러분! “내 삶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계획하신 삶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실뿐 아니라, 동시에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거룩한 두려움’과 vs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할 때, 두려움은 사랑과 안전감으로 전환됩니다. 따라서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복과 소망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구체적인 신앙적인 지침 몇 가지를 제안해 드립니다.
▸ 매일 하나의 고백 ⇨ “하나님! 저를 아시고, 사랑하심을 감사합니다.” 아침에 1분이라도 이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 상처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 ⇨ 구체적으로 상처 난 관계나 자리에 대해 하나님께 털어놓으십시오. 하나님은 들으시고 치유하십니다. ▸ 삶의 역사 기록하기 ⇨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순간들을 기록해 보십시오.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 하나님 손길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 공동체의 권면과 기도 ⇨ 신뢰할 수 있는 속도원이나 선교회원들과 자신의 고민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교회는 서로의 든든한 방패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과 행동, 혀 밑에 감추어진 말까지 다 아신다는 사실이, 나에게 주는 ‘두려움’과 ‘위로’는 각각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거룩한 두려움’이 실제의 삶에서 어떤 변화(말의 습관, 관계 회복, 공동체 태도)를 만들었거나, 만들 수 있다고 보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3. 설교에서 제안한 실천<매일 고백, 속회나눔, 가족(정) 예배 등>중 소그룹이 함께 시도해보고, 서로 점검 할 수 있는 것을 정하고 한 달 뒤 나눠봅시다.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을 뿐 아니라, 학사 에스라와 함께 유다 백성의 신앙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에스라가 유다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 책을 읽기 시작할 할 때 백성은 울며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이방의 포로가 되고 삶이 곤핍해진 원인이 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튼튼히 세우고 성실하게 지킬 것을 다짐하면서, 그 언약을 기록으로 남기고, 느헤미야를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이 서명 날인하여 인봉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정확하고 용의주도한 지도자였습니다. 느 9:38 →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여기 ‘견고한 언약을 세웠다’는 말은 결단했다는 것이고, ‘인봉했다’라는 것은 서명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인 느헤미야 10장으로 넘어와서 서명한 명단이 나옵니다. 1절로 27절까지 총 84명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유다의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자 이들 84명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남은 백성들이 다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언제나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도장을 찍거나 서명하면 모든 책임과 약속이 보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의 도장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서약을 지키겠다고 굳게 약속하는 것이고 또한, 약속한 대로 안 지키면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 순결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겠다는 서약입니다.
느 10:30 →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그들이 첫째로 서약한 것은 자기의 아들과 딸들, 자녀들에게 이방인과의 결혼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신앙의 정통성과 구별됨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의 하나가 결혼입니다. 결혼으로 인해 사람의 운명이 바뀝니다. 성도들이 결혼의 제일 중요한 조건으로 삼아야 할 것은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그 가정의 믿음입니다. 앞선 말씀에서 이미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의 아들이나 딸들과 통혼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 2차로 귀환한 학사 에스라가 강력하게 갈라설 것을 권고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들이 다시는 이방인들과 통혼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자녀들을 이방 사람들과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은! 결혼할 당사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모의 서약입니다.
결혼은 부부 관계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도 크나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선택하셔서 하나님께 합당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족보를 연구하는 Albert E. Winship이란 사람이 18세기 미국에서 상반되는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의 후손들을 추적하여,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연구하여 책으로 냈습니다. 연구대상 중 한 사람인 맥스 쥬크(Max Jukes)는 술집을 운영하여 자수성가하여 당시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로 청교도 신앙을 가지진 신실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조사해보니, 그 후손들의 삶은 너무나 차이가 컸습니다.
실제로 시작점이 된 쥬크와 에드워드는! 당대에 두 사람 다 똑같이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쥬크는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서 술집을 운영하여 비즈니스에 성공한 사람이었고, 에드워드는 성공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조상 한 사람이 어떤 삶의 철학과 가치관과 신앙을 가지고 살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크게 갈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 없이 성공한 쥬크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후손들을 불행에 빠뜨린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결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들은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하나님을 아는 자, 언약의 의미를 아는 사람과 결혼시키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복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영적으로 순결한 가계를 이어가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것입니다.
둘째, 안식일(주일)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서약입니다.
31절 말씀입니다. 느 10:31 →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건이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빛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유다 백성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겠다는 것입니다.
과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주일에는 절대로 돈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너무 완고한 일이고 율법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성경을 글자 그대로 자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에는 돈을 10원도 써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주일에는 버스를 타서도 안 됩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서도 안 되고, 약을 사 먹어도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주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전화도 걸 수가 없고, 전기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분명한 율법주의입니다.
그렇지만,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성도 된 자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예배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또한, 성도 간의 교제하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다 중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안식일(주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사 58:13∼14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①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②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③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에게 세 가지 축복의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을 성수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나 개인적인 목회 경험으로 보나, 주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통해 선한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일을 주님의 날로 구별되게 잘 지켜 하나님의 복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겠다는 서약입니다.
32∼33절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스스로 규례를 정했습니다. 규례라는 말은 정기적으로, 반복적으로 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정기적인 헌금을 하나님께 드려 교회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을 위해, 또한 성전에서 다양한 제사를 드리는 데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도록 백성들이 자원하여 헌금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7절에는 첫 열매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약합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의 생활비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한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삶을 가능하도록 하는 재원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실천하면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신 14:29b →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는 수많은 간증을 통해서, 십일조를 드린 사람들이 받은 복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께 드리라고 하실 때는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반대로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말 3:8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설교자가 헌금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신사적인 것이 아니고,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설교자가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성도들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 입장의 곤란함을 비켜 가려는 비겁하고 책임감 없는 태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자에게 하시는 말씀과, 드린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너무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드리지 않은 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 3:9 →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반면에, 십일조를 드린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라고까지 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말 3:10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리고 11절과 12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말 3:11∼12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①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②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③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모든 물질생활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느헤미야 10장 1절부터 나오는 84명의 명단을 보셨습니까? 여러분도 우리 교회의 헌신자 84명의 명단에 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그들과 같은 결단과 서약이 필요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 백성들은 ‘저주로 맹세’할 만큼 강력한 서약을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았을 때, 회개하고 다시 언약을 세워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각자 나눠봅시다.
2. 믿음의 가문을 세우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힘써야 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무엇일지 각자 나눠봅시다.
3. 주일성수, 첫 열매, 십일조 모두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경험한 은혜나 축복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유다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불과 2달도 채 안 되는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을 다 재건했습니다. 이제 유다 백성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됨으로써, 외적들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방비벽은 구축되었지만, 더 위험한 것은! 내부의 적, 곧 백성들의 영적 태만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나?” “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나?”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성경 말씀을 읽고 강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데, 백성들은 일어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느 8:3 →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네! 새벽부터 정오까지 계속 낭독했다고 하니, 적어도 6시간 이상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선포될 때, 백성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 8:6 →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동시에 그 말씀에 비추어본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슬피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느 8:9 →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그러나 이 백성들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만은 아니었습니다. 깨달음과 감격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말씀 앞에 깨달음과 눈물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렇게 깨달음과 눈물까지로 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냥 감정적인 터치만 있었지,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우리가 말씀으로 내적인 영적 재건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먼저, 지도자들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느 8:13 →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 이들이 언제 나왔습니까? ‘그 이튿날’에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6시간 이상 들었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를 회개했고, 심령이 새로워지는 큰 부흥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자리에 있던 그들은 모두 다 기쁨과 감동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즉 우리로 치면 주일이 지난 월요일에 백성 중에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밝히 알기 위해서 학사 에스라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어제 주일날 받은 말씀으로 만족하지 않고, 월요일에도 말씀을 더 배워서 더 확실히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한 사람이 모범적인 ‘신앙’인 것을 언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한 사람의 진정한 믿음을 알아보려면! 주일 날 교회에서 말씀을 들은 후 ‘그 이튿날’! 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단지 주일날! 말씀을 듣고 은혜받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나는 성도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라는 듯이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진정한 성도,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 말씀을 통해 깨달음과 은혜를 받은 후, 그 이튿날인 월요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한 마음으로 읽으면서,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더 변화되고 새로워지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주일 날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그 이튿날인 ‘월요일부터 한 주간동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주일날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대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결단하는, ‘영적밥먹기’를 계속하고 계십니까? 또한, ‘성경을 암송’하고 ‘성경 필사’를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일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아 그래! 그런 거 하면 좋겠다!” 깨닫기만 하고 그냥 아무런 변화 없이 사십니까? 모든 성도님들이 다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2) 그러면 누가 그 이튿날에도 나온 것입니까? 느 8:13 →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여기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영적 재건을 이루려면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장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교회에서 지도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단지 목사나 장로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란?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하고, 혹은 삶의 본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권사, 집사, 속회지도자, 선교회장, 교회학교 교사… 모두가 지도자입니다.
아니 먼저 믿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실은 영적 지도자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적지도자인 것입니다.
2. 말씀대로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이 지도자들이 그 이튿날 나와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느 8:14 →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네! 저들의 관심사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그것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 최후의 권위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토론과 생각은 다 멈추고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지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 말씀을 듣고 또한 보니까, 하나님께서 유대력으로 7월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느 8:14 →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유다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느 8:16, 17a →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초막을 짓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진정한 영적 재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네! 말씀을 깨달은 후에, 그 말씀대로 살려고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듣고 감동 받고 깨닫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모든 백성이 다 함께 말씀에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몇 사람이나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했다고 했습니까? 17절입니다. 느 8:17a →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네! 모든 백성이 다 순종하였습니다. 몇 사람만 행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동안 제대로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느헤미야 8장에는 “크게 즐거워했다, 크게 기뻐했다”는 말이, 12절과 17절에 두 번 나옵니다. 12절의 즐거움은 ⇨ ‘말씀을 깨닫게 됨으로 갖게 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17절의 기쁨은 ⇨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갖게 된 기쁨’이었습니다. 17절의 기쁨은 12절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가 ‘말씀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뻐하는 경험’을 갖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매 주일마다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영광을 돌리고, 말씀 앞에서 내 죄와 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울어본 적’은 언제입니까?
그리고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실천한 것’은 언제입니까? 성도 여러분! 주일 날 만의 신자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이루십시다.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성도가 성도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변화되어 가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주일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목회자나 장로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영적 지도자’라고 했는데, 본인은 직장, 학교, 가정 등 삶의 자리 에서 영적인 지도자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함으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었다면 서로 나눠봅시다.
오늘의 주인공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페르시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그곳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늘 조상의 땅 유다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생과 몇 친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그곳 형편을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은 벌써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 거의 150년이나 되었는데, 성벽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고, 성으로 출입하는 문들도 불에 탄 채로 그냥 있고,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고생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슬퍼하면서 4개월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슬르월-니산월) 기도합니다. 왕의 측근이었기에 아닥사스 왕이 그의 얼굴이 초췌해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느 2:2 →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러자 느헤미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느 2:3 →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그러자 왕이 다시 말합니다. 느 2:4 →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때 이렇게 구합니다. 느 2:5 →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여 왕의 허락과 총독의 지위를 받은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사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한 느헤미야는 어떻게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사명에 집중력을 가졌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그냥 성취될 일도 아닙니다. 건축 자재, 사람의 동원, 보수해야 할 문, 재건에 드는 예산 등 책상 앞에 앉아있는 탁상공론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귀국 후 3일 동안 조용히 지낸 것도, 일을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대면해보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3일의 시간을 집중하여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일어났습니다. 현장에 나가보기 위해 모두가 잠자는 시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느 2:12b →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자기가 감당할 일을 위해 밤중에 일어나는 사람! 그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적당히 일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선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깨어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사명이라고 말하면서 집중하지 않는다면! 일도 제대로 이룰 수 없고, 그런 모습에는 어떤 감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책임을 맡은 것이 있다면 사명감으로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현장에 맞는 일이 되도록 점검하고 계획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 골짜기 문으로 나갑니다. 오늘 본문 2:13~16을 보면! 분문을 지나, 샘문을 지나, 왕의 연못이 있던 곳에 이르러보니, 느헤미야가 탄 짐승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짐승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살펴본 후에 되돌아 왔습니다.
느헤미야는! 공사를 하되, 짐승을 동원할 수 있는 현장, 사람이 걸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현장을 확인한 것입니다. 또한, 무너진 성벽을 따라가며 불에 타버린 문들을 확인하고 점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를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책임이 맡겨졌을 때 현장이 어떤 상태이며, 무엇이 시급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 점검하므로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재료와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현장 점검을 도외시하는 사람은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현장감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지도자, 좋은 일군은 준비와 점검을 위해 현장으로 가보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의 역할이 신뢰받을 수 있게 하려고, 현장 점검을 실행했습니다. 현장 경험이 자신을 지혜롭게, 권위 있게 하는 것입니다.
현장을 모르는 지도자는 언제나 실수를 계속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권위도 안 서고, 존경도 받지 못합니다. 언제나 현장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자원하는 협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잠재된 하나님을 향한 꿈과 열정이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느 2:17 →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 이는 민족적 자존심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도우신 일과, 왕이 일러준 말씀을 전합니다. 느 2:18a →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무슨 말입니까? 내가 페르시아에서 고국의 무너진 소식을 듣고, 회개하고 금식하며 뜻을 세웠을 때, 하나님이 역사 하심으로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가 성벽 재건을 허락받는 응답의 열매가 주어졌다는 간증을 한 것입니다. 이 간증은 저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느 2:18b →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네! “일어나 건축하자.” 하면서 힘을 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구구절절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일이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일이며, 느헤미야 한 사람만의 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백성들 안에 타오르고 있던 열망이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성벽 재건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의 일이며,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민족의 숙원 사업’이라는 것을 되새겨 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벨론에서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 폐허더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성을 회복하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잠들어 있는 우리의 손과 발을 깨워,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그 꿈을 다시 이루어 봅시다!” 희미해진 꿈,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는 외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느헤미야 3장엔! 사람들의 이름과, 예루살렘 성의 문과 지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약 40명의 개인 이름과, 그 외에 75명에 달하는 가족들과 지역대표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명단을 합하면 아마 3~4백 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의 직종을 분류해보면 15종류 이상의 다양한 전문 기능인들이 동원됩니다. 성직자, 정치인, 상인, 각종 기술자, 여성들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3:1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느 3:1b →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성별하였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 모두가 함께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부터 앞장서서 일하게 합니다. 동시에 모든 동료 제사장들이 함께 일하도록 했습니다.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여 함께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수고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함께 할수록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함이 힘입니다. 할렐루야!
넷째, 비웃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새 힘을 얻고 일어나 성벽을 재건할 마음을 먹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방해세력! 일을 그르치려는 마귀의 궤계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느 2:19 →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비웃음을 일축하고 당당하게 맞섭니다. 느 2:20 →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일이든! 그 사역에 대한 비웃음과 반대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벽 재건을 위해 일어나는 일만 남았다. 나머지 이 일을 잘되게 하실 분은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책임과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의 근거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자신의 귀국 이유도, 총독이 된 이유도, 왕의 허락을 받아낸 이유도, 유대 땅에서 해야 할 성벽 재건도, 다 하나님에 근거하여 진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믿음에 뿌리 박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손의 선하심 도움의 손길로 불과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단시간에 끝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 준비하는 사람! 협력을 이끌어 내는 사람, 하나님의 선한 손길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 인생을 승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두고 슬퍼하며 기도한 것처럼, 각자 삶에서 무너진 성벽, 회복이 필요한 부분(신앙, 관계, 건강, 재정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느헤미야가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증으로 나누어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냈듯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자녀, 부모, 교우, 친구 등)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로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3. 느헤미야는 비웃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근거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반대나 비판을 마주했을 때, 신앙적으로 어떻게 반응할지 나눠봅시다.
우리는 모두 부끄러움이 없는 인생을 살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부끄러움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2차 귀환의 지도자인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무너졌던 성전 재건이 완성되자! 하나님은 ‘학사 에스라’를 페르시아에서 유다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네!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자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율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한, 상황을 살펴보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앞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너무 부끄러운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 부끄러운 심정을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 9:6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네! 에스라는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에스라는 무엇을? 왜? 그처럼 부끄러워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백성들의 배은망덕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는데, 여기서 살아남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었지만, 다시 고향 유다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그들이니,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격과 감사로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감격과 감사는 잠시뿐이었고, 금세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심지어 제사장들을 위시해서 레위 사람들조차 그런 일에 동참했고,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그들이었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육체의 정욕만을 추구하며 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 우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합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보호하여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해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모르고 오히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세상에 빠져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을 주셨는데도 그 건강 때문에, 물질을 주셨는데도 그 물질 때문에, 더 범죄의 자리로 나아가는 일은 없습니까? 만일 세상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고 산다면!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은혜 의식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자유의 시간을 범죄의 기회로 삼은 백성들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기적적으로 풀어주시고 자유인으로 귀환케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자유의 시간을 범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 당했던 유다 나라와 백성들이었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다시 회복시켜 소생할 기회를 주었더니! 오늘의 모습은 과거 징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때와 동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기회를! 죄를 짓는 범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신앙의 기회를! 이방 여자들이나 취하는 타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회복의 기회를! 육신적인 즐거움에 도취하는 쾌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고, 이방 민족과 섞여 쾌락과 범죄를 일삼았고, 이방인과 선민의 울타리를 다 무너뜨려 버렸고, 선민의 거룩함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기회를 선용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또한 세속화, 형식화, 무력화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와 불신자의 분간이 없는, 섞여 있는 상태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시간을 방종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거룩의 시간으로 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이 백성들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할 때 회개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 버리면! 더는 긍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때는! 은혜를 타락으로 갚고, 긍휼을 배역으로 갚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스 9:9∼10 →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소생케 되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다시 죄악으로 빠져들어 간 삶을 살고 있으니, 어찌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탄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유다 백성들만의 이야기입니까? 실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자신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양심을 팔고 믿음에서 떠난 일은 없었습니까? ▸진리를 떠나 자기의 유익을 도모한 일은 없었습니까? ⇨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부끄러워하면서 회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됩시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스 9:5 →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 여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네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경배를 의미합니다. 서양 사람들의 인사 방법은 허리를 편 채로 악수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는 굽혀서 인사를 합니다. 조금만 높이는 인사는 고개만 굽힙니다. 좀 더 공손히 인사할 때는 고개만이 아니라 허리까지 굽힙니다. 아주 극존칭으로 인사할 때는 목과 허리와 무릎까지 굽혀 절을 합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세배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세배입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경배’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의미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겸손의 사람, 경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항복을 의미합니다. 이긴 자가 진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법은 없습니다. 진 사람이 무릎을 꿇게 됩니다. 자기를 낮추고 항복할 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패장의 목은 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 내 방법 내 의지로 살았던 나를,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극기를 의미합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은! 누구나 흔히 취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릎을 꿇고 있으면! 근육이 경직되고 피가 잘 통하지 않아 통증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절에도 무리가 옵니다.
그런데도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즉 극기한다는 말입니다. 요가나 도를 닦는 사람들도 눕거나 서성거리면서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무릎을 꿇거나 정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무릎만이 아니라, 마음의 무릎을 꿇어 모든 죄악의 유혹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간구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땅에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왕상 18:42 →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기도했다는 것은! 3년 6개월 동안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려 주시라는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간절함입니다. 이런 간절한 기도를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은! 절대 경배, 절대 항복, 철저한 극기, 절대 갈망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무릎 꿇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서 이 시대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개인과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지금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서로 나눠봅시다.
2. 우리가 받은 ‘자유’ 또는 ‘은혜’를 잘못 사용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이며, 이를 바르게 돌려세울 수 있는 실천적 대책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무릎을 꿇는 것의, 네 가지 의미를 경배·항복·극기·간구로 설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지금 우리의 삶 에서 가장 회복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제목: 성령으로 육체의 법을 제어하라. (갈 5:16∼24)
사람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① 자연인 ②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③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영리’ 소책자에서 많이 보신 그림이시죠!
<자연인>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아름답게 보실까요? 물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갈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성령을 따라 행하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저는 세 가지 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정직한 자기 성찰과 고백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죄는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나’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어로 죄는 S I N 즉 sin이라고 합니다. → SIN 그런데 이 죄(sin)라는 단어 가운데에는 I 즉 ‘나’라고 하는 글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지 않고, 대신 나 자신을 우주의 중심과 가치 판단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SIN의 첫 글자 S는 south 즉 남쪽을 이르는 말이며, 끝 글자 N은 north 즉 북쪽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남과 북의 한 가운데 I, 즉 ‘내’가 있으니!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가장 큰 방해요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영어로는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면! 이렇게 풀어 쓸 수 있습니다. ⇨ Christ + i(I) a(am) n(nothing) 다시 말해서,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그리스도 외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거나 축소합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라는 식의 변명과 자기합리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자신의 변화를 막는 가장 나쁜 습관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를 하기보다는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여러분에게 간단하지만 꾸준한 습관을 가지실 것을 권면합니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단 5분 만이라도, 오늘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어떤 순간에 화가 일어났는지 ▸어디서부터 욕심이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성령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결코 자기학대가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행동입니다. 고백을 통해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공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 “성령님! 내가 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제 내가 주인 된 삶을 내려놓고 성령님을 초청합니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자신의 죄와 허물을 직시하고,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되기를 추구하면! 그때로부터,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우리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을 의지하는 ‘의식적인 습관’이 필요합니다.
성도가 죄와의 싸움, 육체의 욕심과 싸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을 통해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갈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네!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 원리를! 이어지는 17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갈 5:17a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이 말을 풀어서 말하면! ⇨ 육체의 소욕은 ‘성령과 전쟁을 치르고’, 반대로 성령은 ‘육체의 소욕과 전쟁을 치르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즉, 성령님과 교제하며 동행할 때, 성령께서 친히 내 ‘육체의 욕심’에 대해 전쟁을 치러주신다(거스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약속이고,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은! 자기의 이를 악물거나, 자기의 굳센 의지의 능력을 동원하거나, 단호한 결단으로, 그 유혹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따르면! 죄의 유혹이 올 때, 우리는 즉시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육체의 소욕에서 자유하는 길은, 그저 ‘안 돼!’라고 말하며,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내 속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소욕과 싸워주세요. 제가 너무 힘듭니다.”라고 기도하면 즉시 성령님께서 싸워주십니다. 놀라운 것은! 나는 육체의 소욕과 싸워 이기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능히 이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런 은혜를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초청 없이 우리의 삶 안으로 불쑥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청과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와 같고 연약함이 많습니다. 늘 유혹에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 내 삶에 들어와 내주하시고, 나를 대신하여 죄의 유혹과 싸워주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즉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날 대신하여 싸워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누리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책임과 실천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완성되긴 어렵습니다. 신앙공동체 속에서 더 잘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속회나 선교회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때로는 솔직한 권면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그룹 안에서 영적 생활을 나누고, 기도의 동역자를 맺어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 그리고 서로의 변화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여러가지 유혹이 있고, 때로는 육체의 법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직장에서의 경쟁, 가정에서의 불화, 경제적 스트레스, 자녀 양육의 부담…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실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한 개인만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은! 개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위해 일하시기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곳에 함께 계시고, 마가의 다박방에서처럼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더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회나 선교회 공동체를 단순한 조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한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영적 형제자매 공동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영적으로 지켜 주고 세워주는 중보자들! 세움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힘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속회와 선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이 소그룹 공동체를! 여러분의 믿음의 지키고 성장 성숙시키는 장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일러 죄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진정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결단하고 정리해야 할 일들, 또한 회복되어야 할 내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2. 때로 시로 넘어지고 낙심하고 실망하는 삶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보고, 진정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결심합시다. 이성과 합리, 상식과 윤리, 체면과 인정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 것인지?
3. 속회(선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그리고 변화에 대해 나눌 것을 계획하십시오.
제목: 근본으로 돌아가자! (Ad Fontes) (신 8:1∼3)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사는 게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의식주만 해결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육체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창 2:7을 보면 인간 창조의 기사가 나옵니다. 창 2:7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먼저 →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 그 코에 생기(=하나님의 숨결, 성령)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 사람이 생령(生靈, living soul)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단지 육체와 혼으로 지어진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혼’과 ‘영’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물과 구별되는 영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 원리로 볼 때 두 가지 원칙을 잘 지킬 때 비로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흙에서 왔기 때문에, 의식주가 모두 흙을 가까이하는 게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원칙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친화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영혼이 건강하고, 심령에 평안과 기쁨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써 영혼의 참 평안과 기쁨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불행한 것입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안락하고 배불러도 공허합니다. 바로 영적인 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진정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 친화적인 삶’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의 말씀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 8:3b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육신이 배부르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영혼이 배불러야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육신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2. 근본으로 돌아가라! (ad fontes!)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며,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신학자이기도 한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ad fontes’라는 대명제를 제시했습니다. 여기 ad fontes란? 라틴어로 → ‘원천(근원)으로!’라는 뜻입니다. ad는 영어로 방향 지시사 ‘to’이고 / fontes는 ‘fountains’ 혹은 ‘sources’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으로 돌아가라. (Back to basics.)’ ‘근본으로 돌아가라. (Back to fundamentals.)’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명제는! 역사를 뒤흔드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르네상스 곧 ‘문예부흥’의 신호탄이 되었고, 또한 기독교 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진정한 개혁은 무엇이고 또한, 성도의 새로운 삶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네! ‘말씀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이 될 때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는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향한 선포이기도 했지만,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강력한 요청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네!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험당할 때, 고장 나면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든 주의사항과 안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딤후 3:15∼17입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이 년초에! 우리는 다시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라!” “말씀으로 내 인생을 새롭게 하리라!” “내 신앙의 첫사랑을 회복하리라!”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근본과 기초로 세우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를 이 시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강조하고자 하는 말씀의 중심 골격은 → ① 성경 읽기 ② 성경 묵상 ③ 성경 암송 ④ 성경 필사 이 네 가지입니다. 사실 이 네 가지는 각각 독립된 훈련이지만, 함께 실천될 때 서로를 보완하며,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세워 줍니다.
첫째, 성경 읽기 — 말씀과의 첫 만남을 여는 문입니다.
성경 읽기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귀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루의 일과 중, 말씀을 위한 시간을 의도적으로 마련할 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재정렬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약속, 명령과 위로를 접하게 됩니다. 이 읽기는 ‘우리의 지성에 말씀을 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읽기만으로 끝나면 말씀이 ‘머리의 지식’에 머물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인 묵상이 필요합니다.
성경 읽기를 위한 구체적인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하십시오. 아침 기도 직후 20분, 점심 식사 후 10분, 또는 잠자기 전 15분이라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규칙성입니다. 우리교회 2026년 달력에도 그날 읽어야 할 성경이 기록되어 있어, 그것을 따라가면 1년에 ‘성경을 통독’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 신앙생활의 교과서인 성경을, 한 번도 안 읽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도 금년엔 반드시 완독하리라! 결심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말씀 묵상 — 읽음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입니다.
묵상은 “이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훈련입니다. 묵상은! 읽은 본문을 가슴에 품고 내 삶의 사례와 연결해 보는 것입니다. 묵상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살게 하는지? 어떤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본문을 읽고 넘어가는 사람과, 한 구절을 가슴에 새긴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묵상의 방법을 소개합니다. 먼저, 한 절 혹은 한 본문을 선택하십시오.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고, 마음에 울리는 단어와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리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세 가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해보십시오. → ① 이 말씀이 나의 생각과 감정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②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③ 이 말씀 앞에서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꾸준히 자신에게 하다 보면! 말씀이 우리에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행동의 동력’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셋째, 말씀 암송 — 위기에서의 무장입니다.
삶의 위기와 유혹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의 첫 반응은 우리 안에 저장된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암송된 말씀은! 즉각적인 신앙의 반응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 때에 암송하신 신명기의 말씀으로 대응하여 승리하셨습니다. 다윗과 다니엘도 말씀을 기억하며 위기를 견뎌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일상의 암송 훈련을 통해서 위기의 순간에 필요 적절한 말씀이 떠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 암송을 위해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매주 주보에 ‘요절’을 주일 낮 예배 맨 아랫 칸에 소개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속회마다 그 주의 요절을 함께 외우시길 바랍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암송을 반복하면, 기억에 꼭 남게 될 것입니다. 암송은 단지 기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암송한 말씀이 우리의 양식과 힘이 되어, 시험과 위기 때 반사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훈련입니다.
넷째, 말씀 필사 — 손으로 새기는 영성훈련입니다.
필사는! 우리가 손과 눈과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고, 말씀이 더 깊게 새겨집니다. 그러니까 필사는 읽기와 묵상, 암송을 통합하여 말씀을 ‘몸화’하는 과정입니다. 학습 이론에서도 ‘쓰기’는 기억과 이해에 강력한 영향을 줍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사 실습을 제안합니다. ‘400구절 & 노트’와 지난 첫 주일에 나눠드린 ‘믿음의 가정 세우기’ 필사 노트에 매일 한 페이지씩이라도 노트에 써 보십시오. 그리고 그 옆에 그날의 적용 한 줄을 적으십시오. 한 달이 지나면 자신이 필사한 노트를 통해 영적 여정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속회에서는! 한 주간 필사한 것을 가져와 서로 나누고, 기도 제목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세우는 영적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시오.
이 네 가지 훈련을! 통합적으로 실행할 때, 우리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읽기는 신앙의 폭을 넓혀주고, 묵상은 신앙의 깊이를 깊게 하며, 암송은 위기에서의 방패가 되고, 필사는 말씀의 내면화를 완성해 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일관성입니다. 하루 5분이라도 매일 지속하는 것이, 한 달에 한 번 길게 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이제 첫째, 개인 실천 계획을 세우시기도 하고 둘째, 가정적인 실천 계획도 세우시고, 셋째, 속회적인 실천계획도 세우시길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생령(生靈, living soul)인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되새기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것에 대해 나눠봅시다.
2. 다음 네 가지 ① 성경 읽기 ② 성경 묵상 ③ 성경 암송 ④ 성경 필사 중 본인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무엇인지? 말해보고, 그 벽을 넘을 수 있는 실천적 지혜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근본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나의 삶의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제목: 첫사랑의 감격, 회복의 은총! (계 2:1∼7)
본문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의 결론은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중심을 이룬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소아시아지방의 정치 경제 수도였습니다. 에베소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엔 척박한 땅이었지만, 바울은 2차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3차전도 여행 때는 3년가량 이곳에 머물면서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선교적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세워졌고, 소아시아 지역에 일곱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은 제3의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최선을 다한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칭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가려서 색출해 낼 수 있을 만한 영적 지혜’를 칭찬합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에베소교회는 그로 인해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제 책망하십니다.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 ‘그러나’라는 말은, 앞의 모든 칭찬을 뒤집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책망의 음성을! 나 자신과 가정과 우리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단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첫사랑 회복’을 위해 3가지 ‘R’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영어로는 Remember, Repent, Repeat하라는 것입니다. 네! ‘기억하라, 회개하라, 반복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1. 기억하라. (Remember)
첫사랑의 회복을 위한 첫째 단계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계 2;5a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여기 ‘생각한다’는 단어 (므네모뉴오)는 ⇨ ‘생각하는 신앙자세를 가지라’는 명령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의 시간과 vs 현재 나의 모습과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의 재산을 유산으로 미리 받아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로 배를 채우던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 이렇게 생각합니다. 눅 15:18b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눅 15:19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면서 ‘차라리 품군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굶주림과 방황속에서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어디서부터 내가 잃어버린 자가 되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 때, 회복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의 첫사랑을 기억하며, 나를 꿈마을엘림교회에 보내주시고, 여기서 좋은 성도들과 속도원과 선교회원들을 만나게 하신 것도 감사하지만, 그저 신앙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의 행복한 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좀 더 구체적으로 ▸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아직 믿지 않거나 연약한 식구들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회개하라. (Repent)
두 번째 우리를 향한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이 명령어는 ‘생각한 것’을 의지적인 결단을 갖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의지적인 결단을 가지고 일어섭니다. 눅 15:20a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여기 ‘일어나서 돌아가니라.’는 말은 ⇨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네! 첫사랑의 회복을 위해서는 ‘회개하여 돌이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이 어렸을 때, 엄마가 아끼는 램프를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떨어뜨려서 유리에 금이 갔습니다. 아예 박살 났다면! 어쩔 수 없이 고백했을 텐데, 금만 간 것 때문에 미혹을 받았습니다. 램프의 유리를 금이 간 쪽이 보이지 않도록 안쪽으로 돌려서 다시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이후에, 엄마가 그 램프의 근처에만 가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겁니다. 오랫동안 불안해하다가 드디어, 엄마가 램프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합니다. “고든! 네가 그랬니?” 그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고백하지 않고 숨기고 있던 기간은!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이 공포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가지고, 후일 목사님이 된 고든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하는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대답이 길지 않다. ‘네’라는 회개의 한마디면 족하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첫사랑의 회복은! ‘회개하는 심령’을 통하여 이뤄지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첫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특별히 강조된 단어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첫사랑이 ‘식어지고 없어진 곳’에는 주님이 머무르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습기가 없는 곳에서 사랑의 씨앗이 싹틀 수 없으며, 사랑이 없는 곳에 주님이 머무르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 속에 ‘사랑 없이도 열심’이 있을 수 있고, ‘사랑 없이도 봉사’할 수 있고, ‘사랑이 없이도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봉사나 열심이나 직분 속에서는! 결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은 가슴속에는!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고, 남의 잘못을 따지기 좋아하며, 용서할 줄 모르고,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겉모습만 봐서는 거룩한 성도의 모습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속에는 욕심과 질투로 가득한 어리석은 심령의 모습이 바로 오늘 자신의 모습이라면! 회개하는 결단을 통하여,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처음 행위를 가지라. (Repeat)
본문 말씀 5절은 ‘첫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생각하라. ▸회개하라는 말씀에 이어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은 ⇨ 능동태 명령어로 ‘지금으로부터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해 가져야 할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로 반복해야 할 실제적‧동사적 사랑인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남편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같이 있으면 지겹고, 없으면 아쉬운 사이”입니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데즈먼드 모리스’의 대표적인 책가운데 ‘피플 워칭’(People Watching)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가 동물과 사람부부를 관찰한 결과를 쓴 책인데, 결혼한 지 오래된 - 묵은 부부일수록, 서로 간에 말수가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자! 저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식사시간 때에만 잠깐 그 이름을 부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 그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시길 바랍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으시길 바랍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며 그 편지를 묵상해 보고, 베껴 적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가 되는 구절들은 암송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봉사와, 지식과, 땀 흘림의 수고와, 인내가 있었던, 에베소 교회라고 할지라도! 첫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은 그 촛대를 옮기리라고 무서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첫사랑의 회복을 이룰 수 있는 세 가지 ‘3R 법칙’을 주셨습니다.
① 생각하라. (Remember)- 구원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② 회개하라. (Repent)-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결단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③ 반복하라. (Repeat)- 첫사랑의 행위를 반복하면서 삶에 새기고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나는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시간 ‘생각하시고’ ‘회개하며 결단하여’ 1년 내내 ‘반복해서 시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과의 사랑은 놀랍도록 뜨거워지고 생생해질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활력과 생명력으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내가 처음 예수님을 사랑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지? 솔직하게 나눠 봅시다.
2. 최근에 ‘회개’가 필요하다고 느낀 구체적인 상황이 있었습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고, 앞으로 어떤 실천적 결단을 할 수 있는지 나눠 봅시다.
3.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반복적으로 시행해야 할 ‘영적 습관’은 무엇인지? 자신의 실천 계획을 나눠 주세요.
목말라 합시다! (눅 19:1∼10)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만드시면서 ‘갈증’ 곧 ‘목마름’이라는 경보장치를 달아 두셨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이 말라비틀어져서, 편안하고 부드러운 말이나, 감사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칠고 날카로운 신경질적인 말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만족이 없고, 뭔가에 목마름을 느끼면 느낄수록 마음은 공허해 집니다. 가진 것도 많고 이룬 것도 많은데, 정작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이런 ‘근원적 목마름’으로 고뇌하며 살았던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던 여리고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고, 경제적인 부가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런 도시의 세관장이었습니다. 그러니 지위도 높았고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뭔가 2% 부족했습니다. 지위나 돈이 채워줄 수 없는, 심령적인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을 꼭 만나기를 목말라 합시다.
2천 년 전 여리고라는 도시는 대단한 무역도시였습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여의도나 강남과 같은 금융과 무역의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삭개오는 세관장이었고,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눅 19:3 →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이 “보고자 하되”란 말은, 단순한 호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앞서 달려가,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어지는 4절입니다. 눅 19:4 →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성경은 아주 현장감 있게 삭개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① 달려가 ② 보기 위해 ③ 올라갔다. 이런 모습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체험하고 싶은 목마른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커다란 나무 위로, 키가 작고, 잘 먹어서 얼굴에 기름이 끼고, 운동량은 모자라 배가 나온 삭개오! 누구나 알만한 그 도시의 유명인사가 버둥대며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자기 체면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회적인 지위, 명성, 체면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삭개오는 창피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이나 손가락질을 괘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수고와 댓가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삭개오 같은 마음과 행동력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의 열정과 적극성이 없기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체험 없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체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Experience ‘체험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체험하고자 얼마나 배고파하며 목말라 하십니까? 당시 여리고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 정도를 구경하고 싶어 했으나, 삭개오는 직접 예수님 그분을 만나는 체험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삭개오 같은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굶주린 마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너무나 정겨운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5절입니다. 눅 19:5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묵어야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네!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면! 주님은 우리를 주목하여 보십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고 친히 만나주십니다. 또한,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주십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목마른 영혼에게 참 만족을 주시려고, 영혼의 생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 4:14입니다.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길 원하고, 은혜를 체험하길 원하고, 능력 체험하길 원하고, 성령충만 하길 원하고, 목말라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사모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만나주시고 채워주시는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합시다.
삭개오는 외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대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과 행복은 별개입니다.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속으로는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 밖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성공 후의 허탈, 번영 후의 허무, 명예 이후의 허전함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입니다.
네! 삭개오는 지금 외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만족이나, 사회적 신분이 주는 즐거움보다, 인간 본연의 행복에 목마른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의 시대지만 오히려 ‘내려놓음과 비움의 영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영혼의 행복을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는 자가, 배부르고 만족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금세기 설교가 토니 에반스(Tony Evans)가 지적하듯이 →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실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굶주린 심령으로 갈망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목마름이 필요합니다. 나와 하나님만이 아는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누리고자 하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날마다 이런 고백을 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에게, 이런 놀라운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요 7:37∼38입니다.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네!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셔서, 주님께서 주시는 갈함이 없는 만족, 마르지 않는 내면의 행복이, 생수의 강같이 흘러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 합시다.
그날 예수님의 주위를 둘러쌓던 군중들과 삭개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군중들은 예수님의 팬클럽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근본적인 변화’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변화를 목말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앞으로 달려갔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곧바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삭개오는, 그동안 생명처럼 아껴오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정리하겠다는 결심을 공표합니다. 근원적인 변화를 목말라했기에 내린 결단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에게 ‘돈’이 주님이고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심령에 진정으로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이 주인이 되셔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근원적인 변화를 목말라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 받고자 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즉시 놀라운 축복을 선언해 주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눅 19:9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은 Today, ‘오늘’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5절과 9절에서 두 번이나 ‘오늘’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체험을 목말라 하고,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하고,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곧 바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오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 받고 변화 되는 것을 자꾸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아직은 세상적으로 할 일이 많고 재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6:2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삭개오는 예수님 체험을 목말라 했고,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했고,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무화과나무에라도 올라가서, 그 은혜 입기를 열망했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갈망, 거룩한 갈망(divine desire)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그를 만나주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 가정에 들어와 주시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나눔과 묵상
1.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근원적인 삶의 변화를 갈망하고 실천했던 일들 중에, 내가 본받고 실천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혹 하나님이 나를 채우실 수 없을 정도로, 내 속이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오늘’ 나의 변화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참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의 전제하에, 내가 지금 목말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비우고 채워야 야 할 것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 5:2∼5a)
1. 미가의 예언
미가서는 예수님의 탄생 약 700년 전의 예언서입니다. 본문에서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지목합니다. 미가가 이곳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거론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다윗 왕의 출생지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언급하면서도 메시아를 단순히 다윗의 후손으로 한정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미 5:2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여기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를 일러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메시아는 역사적 실존 인물인 다윗보다 훨씬 더 상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혈통으로는 분명히 다윗의 후손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더 근원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태초로부터 계신 분이 바로 메시아!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바로 이 미가서 5:2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마 2:6 →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또한, 헤롯 왕 때에,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점성가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이렇게 수소문하며 다녔습니다. 마 2:1b∼2 →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여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라는 말에,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헤롯 왕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메시아’의 탄생 지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구약성경의 전문가들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역시 미 5:2절을 인용하여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이 들판에서 들은 천사의 합창을 이렇게 전합니다. 눅 2: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기서 언급된 평화는 바로 오늘 본문인 미 5:5절에 나오는 ‘평강’입니다. 누가복음 역시, 미가서의 예언을 ‘메시아 예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의 탄생 때에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가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에서 ‘백성들의 찬송’으로 다시 되풀이된다는 사실입니다. 눅 19:38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인용한 미가의 메시아 예언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시어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미가가 선포한 메시아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즉 메시아의 표상으로 ‘목자’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미 5:4 →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여러분! 목자는! 양의 안전을 보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지혜롭고 용감해야 합니다. 양의 생존에 필요한 풀과 물을 찾을 줄 알아야 하고, 양을 노리는 포식자를 피하거나 물리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가는 메시아를 ‘목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그는 ‘여호와의 능력’과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목자로 인해서 양들은 비로소 그 땅에 평안히 ‘거주’할 것이고, 양의 숫자가 늘어나고, 땅끝까지 채우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가 지켜주는 양처럼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날 것이며, 번성하고 창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미가의 이런 외침은 당시 유대 백성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5절에서 메시아의 본질적 속성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미 5:5a →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히브리어 성경을 그대로 발음하면 이렇습니다. “하야 쩨 샬롬.(חיה זה שלום)” → 이 말은 “그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평화의 왕이 여러분 심령과 가정에 그리고 남과 북, 나아가서 온 세계에 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 삶의 평화 대망
매년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에서 전국 교수들에게 설문하여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합니다. 올해는 → 변동불거(變動不居) =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한다’는 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선정이유로는 “한국 사회가 거센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으며,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시대적 메시지를 상징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안정과 평화’가 예측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지혜롭게 잘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것입니까? 과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선지자들이 ‘평화’를 메시아 대망이라는 차원에서 외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 첫째, ‘평화’는 우리가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늘 평화가 그리웠고, 평상시 인사가 ‘샬롬’이었던 이유도 ‘평화’가 삶 속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잘살게 되었고 부자가 되었어도, 세상이 평화롭지 않으면 삶이 망가집니다. 도둑질, 강도, 살인, 사기, 인신매매, 성폭력 등이 만연한 세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꾸려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매일 매일 상상도 할 수 없는 불의한 일들을 뉴스로 접하고 있습니다.
가장 평화로워야 할 가정도 평화롭지 못합니다. 대부분 돈 문제로 부모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에 다투고 갈등합니다. 정말이지 개인이나 가정이나 공동체나 국가나 우리 삶의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화의 왕’이 오시기를 기대한 이유가 공감됩니다.
→ 둘째, 우리의 힘만으로는 평화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론 안 되니, 메시아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이 말은! → 평강이 인격화된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 즉, ▸“그는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표준새번역 개정판)라는 뜻입니다.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공동번역 성서 개정판)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평화의 조성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개인, 가정, 사회, 나라, 세계가 되어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3. 남북한의 평화를 위해!
미가는 3절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유지되게 하고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즉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포로생활이 예고된 가운데 있습니다. 아니, ‘예고’라고 하기보다 ‘선고’라고 하는 것이 더 마땅할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 벌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할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하다가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 아니라, 존속되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비춰보면서 읽을 때, 우리는 분단이 끝나고 통일이 오게 해 달라고, 다시 한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분단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세요. 마지막 부분에 ‘땅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미 5:4c →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여기 ‘땅끝이 어디입니까?’ 지리적인 거리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가장 먼 곳이 땅끝이 되겠죠!
그러나 상징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땅끝은 바로 북한이라고 할 것입니다. 선교적인 관점에서도 거리와 상관없이, 전도하기 가장 어려운 곳을 ‘땅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시대의 대표적인 땅끝은 북한이고 또한 우리의 가정입니다.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우리는 주님의 통치가 북한까지, 그리고 우리 가정의 믿지 않는 식구들까지 미치도록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통치를 통해 군사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의 미가서 4장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평화의 노래인지 모릅니다.
미 4:3∼4 →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메시아가 이 세상을 다스릴 때, 이와 같이 아름다운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되어서, 우리 세대에 평화적인 통일을 보게 되는 은혜의 날이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미가가 예언한 메시아의 ‘목자적 이미지’(양을 보호하고 먹일 줄 아는)를 교회와 공동체에서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돌봄, 안전망 마련, 갈등 조정 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우리 일상에서 어떤 변화를 요구한다고 생각하십 니까? 직장·가정·이웃 관계에서 실천 가능한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3. 설교에서 언급한 ‘땅끝’과 오늘날의 선교적 과제(예: 북한과 우리 가정)에 대해서 각자의 형편에 따라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시 139:1∼10, 23∼24)
오늘의 본문 시 139편의 표제를 보면! 이 시는 ‘다윗이 지은 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보면, 그는 늘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거룩한 부담감’과 동시에 ‘담대함과 소망’을 함께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 음욕으로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입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꾸짖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안정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니 죄를 지적받은 것에 대해서, 숨기거나 왕권의 힘으로 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침상이 곰팡이가 슬도록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서, 도망자의 삶을 살아갈 때는 얼마나 기가 막히고 답답한 일이 많았습니까!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감시자’이기 보다는, ‘돕는 자’로서 자신을 살피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1.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
첫째, 주님은 나의 행동과 생각을 다 아십니다. 다 같이! “주님은 나의 행동과 생각을 다 아십니다.” 시 139:2 →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먼저, 앞부분의 ‘앉고 일어섬’이라는 말은! 삶의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앉는 것도 아시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고 살피어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불꽃 같은 눈길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 139:7 →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이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길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 139:8 →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내가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 때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든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서는 시 139:9 →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라고 해서, 하나님을 피해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 후반부’를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시 139:2b →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 같지만,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체적으로 내 생각을 입으로 말하거나 발설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 좀 무섭습니까?
둘째, 주님은 나의 말을 다 아십니다. 다 같이! “주님은 나의 말을 다 아십니다.” 시 121:4 →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하면서 삽니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의 표현’이라, 그 사람의 언어생활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쓸데없는 말을 하건, 선한 말을 하건! 주님께서 다 아신다는 겁니다. 혹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주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말의 의미를 아시고, 어떤 생각에서 나온 말인지까지 다 아십니다. 내 혀로 말하지 않은, 혀 밑에 감추어진 말까지도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을 얼마나 함부로 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죄를 짓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 6:5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선지자로 소명 받는 자리에서 첫 고백이 ‘입술의 문제’였다는 것은 우리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는, 이사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입술, 남에게 힘과 용기와 능력과 희망을 주는 입술, 남을 죽이는 입술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입술이 되어,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거룩한 두려움을 가집시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읽으시고, 마음의 동기와 비밀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은! ‘두려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닙니다. 경외(respectful awe)로서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 자신을 바로 보는 ‘겸손’으로 이끕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못하게 하며, 회개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 양심을 깨우고 회개를 촉구하는 수단이 됩니다. 이는 율법적 강박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정결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되면, 실제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이런 것들입니다. ▸죄에 대한 민감성 회복 ⇨ 작은 거짓말, 이기적 행위, 남을 무시하는 태도까지도 회개의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관계 회복 ⇨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화해와 용서가 시작됩니다. ▸사역과 공동체의 순수성 ⇨ 교회 안에서 권력과 편 가르기, 위선이 사라지고 섬김과 진실이 회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용서와 새 출발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구체적인 신앙생활 지침을 몇 가지 제안해 드립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5분 회개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 자신이 부족했던 점을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매주 속회 모임을 ‘고백의 모임’으로 혹은 ‘영적 점검 시간’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 신실함을 가진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의 신앙을 점검하고 기도해 준다면, 우리의 영적 삶은 안정성과 함께 큰 진보가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속회가 여의치 않은 분이라면!> ▸부부의 기도 시간 혹은 가족(정) 예배를 드리십시오. ⇨ 이는 개인의 신앙회복뿐 아니라, 가정의 신앙회복으로 그리고 교회생활의 회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3. 든든함과 위로, 소망을 누립시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사실이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반대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나를 오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할 때에도! 하나님만은 나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자라고 느끼는 그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의 갈등이나 직장에서의 좌절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때로 ‘아무도 나를 모른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작은 눈물과 숨겨진 한숨까지도 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은! 큰 위로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단지 아시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부터 “주의 눈이 나를 보셨고 나를 살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눈길은 ‘정죄의 눈길’이 아니라, ‘치유의 눈길’이었습니다.
상처받은 부부, 자녀를 걱정하는 부모, 은퇴와 미래를 염려하는 직장인들…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안심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계획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고단해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날들을 알고 계시고, 또한 선한 길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시 139:13,16 →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성도 여러분! “내 삶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계획하신 삶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실뿐 아니라, 동시에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거룩한 두려움’과 vs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할 때, 두려움은 사랑과 안전감으로 전환됩니다. 따라서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복과 소망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구체적인 신앙적인 지침 몇 가지를 제안해 드립니다.
▸ 매일 하나의 고백 ⇨ “하나님! 저를 아시고, 사랑하심을 감사합니다.” 아침에 1분이라도 이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 상처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 ⇨ 구체적으로 상처 난 관계나 자리에 대해 하나님께 털어놓으십시오. 하나님은 들으시고 치유하십니다. ▸ 삶의 역사 기록하기 ⇨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순간들을 기록해 보십시오.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 하나님 손길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 공동체의 권면과 기도 ⇨ 신뢰할 수 있는 속도원이나 선교회원들과 자신의 고민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교회는 서로의 든든한 방패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과 행동, 혀 밑에 감추어진 말까지 다 아신다는 사실이, 나에게 주는 ‘두려움’과 ‘위로’는 각각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거룩한 두려움’이 실제의 삶에서 어떤 변화(말의 습관, 관계 회복, 공동체 태도)를 만들었거나, 만들 수 있다고 보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3. 설교에서 제안한 실천<매일 고백, 속회나눔, 가족(정) 예배 등>중 소그룹이 함께 시도해보고, 서로 점검 할 수 있는 것을 정하고 한 달 뒤 나눠봅시다.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84인! (느 10:28∼39)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을 뿐 아니라, 학사 에스라와 함께 유다 백성의 신앙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에스라가 유다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 책을 읽기 시작할 할 때 백성은 울며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이방의 포로가 되고 삶이 곤핍해진 원인이 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튼튼히 세우고 성실하게 지킬 것을 다짐하면서, 그 언약을 기록으로 남기고, 느헤미야를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이 서명 날인하여 인봉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정확하고 용의주도한 지도자였습니다. 느 9:38 →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여기 ‘견고한 언약을 세웠다’는 말은 결단했다는 것이고, ‘인봉했다’라는 것은 서명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인 느헤미야 10장으로 넘어와서 서명한 명단이 나옵니다. 1절로 27절까지 총 84명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유다의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자 이들 84명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남은 백성들이 다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언제나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도장을 찍거나 서명하면 모든 책임과 약속이 보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의 도장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서약을 지키겠다고 굳게 약속하는 것이고 또한, 약속한 대로 안 지키면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 순결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겠다는 서약입니다.
느 10:30 →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그들이 첫째로 서약한 것은 자기의 아들과 딸들, 자녀들에게 이방인과의 결혼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신앙의 정통성과 구별됨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의 하나가 결혼입니다. 결혼으로 인해 사람의 운명이 바뀝니다. 성도들이 결혼의 제일 중요한 조건으로 삼아야 할 것은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그 가정의 믿음입니다. 앞선 말씀에서 이미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의 아들이나 딸들과 통혼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 2차로 귀환한 학사 에스라가 강력하게 갈라설 것을 권고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들이 다시는 이방인들과 통혼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자녀들을 이방 사람들과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은! 결혼할 당사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모의 서약입니다.
결혼은 부부 관계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도 크나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선택하셔서 하나님께 합당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족보를 연구하는 Albert E. Winship이란 사람이 18세기 미국에서 상반되는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의 후손들을 추적하여,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연구하여 책으로 냈습니다. 연구대상 중 한 사람인 맥스 쥬크(Max Jukes)는 술집을 운영하여 자수성가하여 당시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로 청교도 신앙을 가지진 신실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조사해보니, 그 후손들의 삶은 너무나 차이가 컸습니다.
실제로 시작점이 된 쥬크와 에드워드는! 당대에 두 사람 다 똑같이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쥬크는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서 술집을 운영하여 비즈니스에 성공한 사람이었고, 에드워드는 성공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조상 한 사람이 어떤 삶의 철학과 가치관과 신앙을 가지고 살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크게 갈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 없이 성공한 쥬크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후손들을 불행에 빠뜨린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결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들은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하나님을 아는 자, 언약의 의미를 아는 사람과 결혼시키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복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영적으로 순결한 가계를 이어가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것입니다.
둘째, 안식일(주일)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서약입니다.
31절 말씀입니다. 느 10:31 →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건이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빛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유다 백성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겠다는 것입니다.
과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주일에는 절대로 돈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너무 완고한 일이고 율법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성경을 글자 그대로 자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에는 돈을 10원도 써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주일에는 버스를 타서도 안 됩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서도 안 되고, 약을 사 먹어도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주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전화도 걸 수가 없고, 전기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분명한 율법주의입니다.
그렇지만,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성도 된 자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예배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또한, 성도 간의 교제하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다 중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안식일(주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사 58:13∼14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①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②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③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에게 세 가지 축복의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을 성수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나 개인적인 목회 경험으로 보나, 주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통해 선한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일을 주님의 날로 구별되게 잘 지켜 하나님의 복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겠다는 서약입니다.
32∼33절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스스로 규례를 정했습니다. 규례라는 말은 정기적으로, 반복적으로 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정기적인 헌금을 하나님께 드려 교회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을 위해, 또한 성전에서 다양한 제사를 드리는 데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도록 백성들이 자원하여 헌금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7절에는 첫 열매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약합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의 생활비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한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삶을 가능하도록 하는 재원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실천하면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신 14:29b →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는 수많은 간증을 통해서, 십일조를 드린 사람들이 받은 복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께 드리라고 하실 때는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반대로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말 3:8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설교자가 헌금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신사적인 것이 아니고,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설교자가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성도들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 입장의 곤란함을 비켜 가려는 비겁하고 책임감 없는 태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자에게 하시는 말씀과, 드린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너무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드리지 않은 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 3:9 →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반면에, 십일조를 드린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라고까지 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말 3:10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리고 11절과 12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말 3:11∼12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①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②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③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모든 물질생활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느헤미야 10장 1절부터 나오는 84명의 명단을 보셨습니까? 여러분도 우리 교회의 헌신자 84명의 명단에 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그들과 같은 결단과 서약이 필요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 백성들은 ‘저주로 맹세’할 만큼 강력한 서약을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았을 때, 회개하고 다시 언약을 세워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각자 나눠봅시다.
2. 믿음의 가문을 세우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힘써야 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무엇일지 각자 나눠봅시다.
3. 주일성수, 첫 열매, 십일조 모두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경험한 은혜나 축복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말씀으로 내적인 영적 재건 (느 8:1∼6, 12∼18)
유다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불과 2달도 채 안 되는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을 다 재건했습니다. 이제 유다 백성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됨으로써, 외적들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방비벽은 구축되었지만, 더 위험한 것은! 내부의 적, 곧 백성들의 영적 태만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나?” “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나?”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성경 말씀을 읽고 강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데, 백성들은 일어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느 8:3 →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네! 새벽부터 정오까지 계속 낭독했다고 하니, 적어도 6시간 이상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선포될 때, 백성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 8:6 →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동시에 그 말씀에 비추어본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슬피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느 8:9 →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그러나 이 백성들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만은 아니었습니다. 깨달음과 감격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말씀 앞에 깨달음과 눈물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렇게 깨달음과 눈물까지로 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냥 감정적인 터치만 있었지,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우리가 말씀으로 내적인 영적 재건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먼저, 지도자들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느 8:13 →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 이들이 언제 나왔습니까? ‘그 이튿날’에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6시간 이상 들었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를 회개했고, 심령이 새로워지는 큰 부흥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자리에 있던 그들은 모두 다 기쁨과 감동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즉 우리로 치면 주일이 지난 월요일에 백성 중에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밝히 알기 위해서 학사 에스라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어제 주일날 받은 말씀으로 만족하지 않고, 월요일에도 말씀을 더 배워서 더 확실히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한 사람이 모범적인 ‘신앙’인 것을 언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한 사람의 진정한 믿음을 알아보려면! 주일 날 교회에서 말씀을 들은 후 ‘그 이튿날’! 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단지 주일날! 말씀을 듣고 은혜받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나는 성도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라는 듯이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진정한 성도,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 말씀을 통해 깨달음과 은혜를 받은 후, 그 이튿날인 월요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한 마음으로 읽으면서,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더 변화되고 새로워지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주일 날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그 이튿날인 ‘월요일부터 한 주간동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주일날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대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결단하는, ‘영적밥먹기’를 계속하고 계십니까? 또한, ‘성경을 암송’하고 ‘성경 필사’를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일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아 그래! 그런 거 하면 좋겠다!” 깨닫기만 하고 그냥 아무런 변화 없이 사십니까? 모든 성도님들이 다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2) 그러면 누가 그 이튿날에도 나온 것입니까? 느 8:13 →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여기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영적 재건을 이루려면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장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교회에서 지도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단지 목사나 장로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란?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하고, 혹은 삶의 본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권사, 집사, 속회지도자, 선교회장, 교회학교 교사… 모두가 지도자입니다.
아니 먼저 믿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실은 영적 지도자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적지도자인 것입니다.
2. 말씀대로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이 지도자들이 그 이튿날 나와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느 8:14 →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네! 저들의 관심사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그것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 최후의 권위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토론과 생각은 다 멈추고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지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 말씀을 듣고 또한 보니까, 하나님께서 유대력으로 7월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느 8:14 →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유다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느 8:16, 17a →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초막을 짓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진정한 영적 재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네! 말씀을 깨달은 후에, 그 말씀대로 살려고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듣고 감동 받고 깨닫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모든 백성이 다 함께 말씀에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몇 사람이나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했다고 했습니까? 17절입니다. 느 8:17a →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네! 모든 백성이 다 순종하였습니다. 몇 사람만 행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동안 제대로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느헤미야 8장에는 “크게 즐거워했다, 크게 기뻐했다”는 말이, 12절과 17절에 두 번 나옵니다. 12절의 즐거움은 ⇨ ‘말씀을 깨닫게 됨으로 갖게 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17절의 기쁨은 ⇨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갖게 된 기쁨’이었습니다. 17절의 기쁨은 12절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가 ‘말씀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뻐하는 경험’을 갖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매 주일마다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영광을 돌리고, 말씀 앞에서 내 죄와 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울어본 적’은 언제입니까?
그리고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실천한 것’은 언제입니까? 성도 여러분! 주일 날 만의 신자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이루십시다.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성도가 성도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변화되어 가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주일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목회자나 장로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영적 지도자’라고 했는데, 본인은 직장, 학교, 가정 등 삶의 자리 에서 영적인 지도자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함으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었다면 서로 나눠봅시다.
힘을 내어 함께 선한 일을! (느 2:11∼20)
오늘의 주인공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페르시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그곳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늘 조상의 땅 유다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생과 몇 친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그곳 형편을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은 벌써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 거의 150년이나 되었는데, 성벽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고, 성으로 출입하는 문들도 불에 탄 채로 그냥 있고,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고생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슬퍼하면서 4개월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슬르월-니산월) 기도합니다. 왕의 측근이었기에 아닥사스 왕이 그의 얼굴이 초췌해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느 2:2 →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러자 느헤미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느 2:3 →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그러자 왕이 다시 말합니다. 느 2:4 →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때 이렇게 구합니다. 느 2:5 →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여 왕의 허락과 총독의 지위를 받은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사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한 느헤미야는 어떻게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사명에 집중력을 가졌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그냥 성취될 일도 아닙니다. 건축 자재, 사람의 동원, 보수해야 할 문, 재건에 드는 예산 등 책상 앞에 앉아있는 탁상공론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귀국 후 3일 동안 조용히 지낸 것도, 일을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대면해보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3일의 시간을 집중하여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일어났습니다. 현장에 나가보기 위해 모두가 잠자는 시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느 2:12b →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자기가 감당할 일을 위해 밤중에 일어나는 사람! 그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적당히 일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선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깨어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사명이라고 말하면서 집중하지 않는다면! 일도 제대로 이룰 수 없고, 그런 모습에는 어떤 감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책임을 맡은 것이 있다면 사명감으로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현장에 맞는 일이 되도록 점검하고 계획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 골짜기 문으로 나갑니다. 오늘 본문 2:13~16을 보면! 분문을 지나, 샘문을 지나, 왕의 연못이 있던 곳에 이르러보니, 느헤미야가 탄 짐승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짐승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살펴본 후에 되돌아 왔습니다.
느헤미야는! 공사를 하되, 짐승을 동원할 수 있는 현장, 사람이 걸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현장을 확인한 것입니다. 또한, 무너진 성벽을 따라가며 불에 타버린 문들을 확인하고 점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를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책임이 맡겨졌을 때 현장이 어떤 상태이며, 무엇이 시급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 점검하므로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재료와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현장 점검을 도외시하는 사람은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현장감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지도자, 좋은 일군은 준비와 점검을 위해 현장으로 가보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의 역할이 신뢰받을 수 있게 하려고, 현장 점검을 실행했습니다. 현장 경험이 자신을 지혜롭게, 권위 있게 하는 것입니다.
현장을 모르는 지도자는 언제나 실수를 계속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권위도 안 서고, 존경도 받지 못합니다. 언제나 현장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자원하는 협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잠재된 하나님을 향한 꿈과 열정이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느 2:17 →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 이는 민족적 자존심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도우신 일과, 왕이 일러준 말씀을 전합니다. 느 2:18a →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무슨 말입니까? 내가 페르시아에서 고국의 무너진 소식을 듣고, 회개하고 금식하며 뜻을 세웠을 때, 하나님이 역사 하심으로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가 성벽 재건을 허락받는 응답의 열매가 주어졌다는 간증을 한 것입니다. 이 간증은 저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느 2:18b →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네! “일어나 건축하자.” 하면서 힘을 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구구절절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일이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일이며, 느헤미야 한 사람만의 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백성들 안에 타오르고 있던 열망이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성벽 재건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의 일이며,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민족의 숙원 사업’이라는 것을 되새겨 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벨론에서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 폐허더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성을 회복하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잠들어 있는 우리의 손과 발을 깨워,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그 꿈을 다시 이루어 봅시다!” 희미해진 꿈,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는 외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느헤미야 3장엔! 사람들의 이름과, 예루살렘 성의 문과 지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약 40명의 개인 이름과, 그 외에 75명에 달하는 가족들과 지역대표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명단을 합하면 아마 3~4백 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의 직종을 분류해보면 15종류 이상의 다양한 전문 기능인들이 동원됩니다. 성직자, 정치인, 상인, 각종 기술자, 여성들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3:1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느 3:1b →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성별하였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 모두가 함께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부터 앞장서서 일하게 합니다. 동시에 모든 동료 제사장들이 함께 일하도록 했습니다.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여 함께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수고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함께 할수록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함이 힘입니다. 할렐루야!
넷째, 비웃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새 힘을 얻고 일어나 성벽을 재건할 마음을 먹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방해세력! 일을 그르치려는 마귀의 궤계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느 2:19 →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비웃음을 일축하고 당당하게 맞섭니다. 느 2:20 →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일이든! 그 사역에 대한 비웃음과 반대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벽 재건을 위해 일어나는 일만 남았다. 나머지 이 일을 잘되게 하실 분은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책임과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의 근거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자신의 귀국 이유도, 총독이 된 이유도, 왕의 허락을 받아낸 이유도, 유대 땅에서 해야 할 성벽 재건도, 다 하나님에 근거하여 진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믿음에 뿌리 박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손의 선하심 도움의 손길로 불과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단시간에 끝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 준비하는 사람! 협력을 이끌어 내는 사람, 하나님의 선한 손길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 인생을 승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두고 슬퍼하며 기도한 것처럼, 각자 삶에서 무너진 성벽, 회복이 필요한 부분(신앙, 관계, 건강, 재정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느헤미야가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증으로 나누어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냈듯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자녀, 부모, 교우, 친구 등)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로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3. 느헤미야는 비웃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근거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반대나 비판을 마주했을 때, 신앙적으로 어떻게 반응할지 나눠봅시다.
부끄러움을 알고 무릎을 꿇읍시다. (스 9:1∼10)
1.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모두 부끄러움이 없는 인생을 살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부끄러움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2차 귀환의 지도자인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무너졌던 성전 재건이 완성되자! 하나님은 ‘학사 에스라’를 페르시아에서 유다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네!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자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율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한, 상황을 살펴보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앞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너무 부끄러운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 부끄러운 심정을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 9:6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네! 에스라는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에스라는 무엇을? 왜? 그처럼 부끄러워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백성들의 배은망덕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는데, 여기서 살아남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었지만, 다시 고향 유다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그들이니,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격과 감사로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감격과 감사는 잠시뿐이었고, 금세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심지어 제사장들을 위시해서 레위 사람들조차 그런 일에 동참했고,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그들이었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육체의 정욕만을 추구하며 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 우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합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보호하여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해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모르고 오히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세상에 빠져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을 주셨는데도 그 건강 때문에, 물질을 주셨는데도 그 물질 때문에, 더 범죄의 자리로 나아가는 일은 없습니까? 만일 세상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고 산다면!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은혜 의식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자유의 시간을 범죄의 기회로 삼은 백성들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기적적으로 풀어주시고 자유인으로 귀환케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자유의 시간을 범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 당했던 유다 나라와 백성들이었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다시 회복시켜 소생할 기회를 주었더니! 오늘의 모습은 과거 징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때와 동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기회를! 죄를 짓는 범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신앙의 기회를! 이방 여자들이나 취하는 타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회복의 기회를! 육신적인 즐거움에 도취하는 쾌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고, 이방 민족과 섞여 쾌락과 범죄를 일삼았고, 이방인과 선민의 울타리를 다 무너뜨려 버렸고, 선민의 거룩함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기회를 선용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또한 세속화, 형식화, 무력화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와 불신자의 분간이 없는, 섞여 있는 상태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시간을 방종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거룩의 시간으로 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이 백성들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할 때 회개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 버리면! 더는 긍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때는! 은혜를 타락으로 갚고, 긍휼을 배역으로 갚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스 9:9∼10 →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소생케 되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다시 죄악으로 빠져들어 간 삶을 살고 있으니, 어찌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탄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유다 백성들만의 이야기입니까? 실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자신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양심을 팔고 믿음에서 떠난 일은 없었습니까? ▸진리를 떠나 자기의 유익을 도모한 일은 없었습니까? ⇨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부끄러워하면서 회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됩시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스 9:5 →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 여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네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경배를 의미합니다. 서양 사람들의 인사 방법은 허리를 편 채로 악수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는 굽혀서 인사를 합니다. 조금만 높이는 인사는 고개만 굽힙니다. 좀 더 공손히 인사할 때는 고개만이 아니라 허리까지 굽힙니다. 아주 극존칭으로 인사할 때는 목과 허리와 무릎까지 굽혀 절을 합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세배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세배입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경배’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의미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겸손의 사람, 경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항복을 의미합니다. 이긴 자가 진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법은 없습니다. 진 사람이 무릎을 꿇게 됩니다. 자기를 낮추고 항복할 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패장의 목은 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 내 방법 내 의지로 살았던 나를,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극기를 의미합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은! 누구나 흔히 취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릎을 꿇고 있으면! 근육이 경직되고 피가 잘 통하지 않아 통증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절에도 무리가 옵니다.
그런데도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즉 극기한다는 말입니다. 요가나 도를 닦는 사람들도 눕거나 서성거리면서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무릎을 꿇거나 정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무릎만이 아니라, 마음의 무릎을 꿇어 모든 죄악의 유혹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간구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땅에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왕상 18:42 →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기도했다는 것은! 3년 6개월 동안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려 주시라는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간절함입니다. 이런 간절한 기도를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은! 절대 경배, 절대 항복, 철저한 극기, 절대 갈망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무릎 꿇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서 이 시대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개인과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지금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서로 나눠봅시다.
2. 우리가 받은 ‘자유’ 또는 ‘은혜’를 잘못 사용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이며, 이를 바르게 돌려세울 수 있는 실천적 대책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무릎을 꿇는 것의, 네 가지 의미를 경배·항복·극기·간구로 설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지금 우리의 삶 에서 가장 회복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