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천사가 한밤중에 베들레헴의 목동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눅 2:9 →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그러자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고 합니다. 눅 2:10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얼핏 생각하면! 천사가 나타나고, 그를 보면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목자들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목자들은 거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강해 보이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목자들의 내면에는 숨겨져 있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 나는 이 힘든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나의 미래는 무엇인가?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으로 다인가?” ① 감춰져 있던 ‘삶의 두려움’이 환한 빛과 함께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이 무서워한 이유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② 빛 앞에 드러난 자신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두려움’의 이유를! ‘죄의 결과, 즉 하나님과 단절되고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뿌리 뽑힌 나무는 잠시는 살겠지만, 결국은 말라 죽게 됩니다. 물 밖에 나온 고기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단절되고 소외된 결과는 ‘죽음’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지냈습니다. 아무런 부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십니다. 창 3:9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자 뭐라고 대답합니까? 창 3:10b →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두려움’입니다.
즉 그 ‘두려움’은! 말씀을 지키지 않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결과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은 크게 2가지입니다. →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에 느끼는 ‘단절의 두려움’ ‘심판의 두려움’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는 ‘현실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늘 스스로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와 ‘현실의 벽’ 앞에서 갈등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두려움을 갖고 계십니까? 혹 나는 어떤 두려움도 없다! 하실 분도 있겠지만, 실은 감추어져 있을 뿐,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2.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천사가 나타나서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눅 2:10∼11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헬라어 성경을 보면 ‘보라’라는 말 앞에 ‘왜냐하면’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 “무서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보라! 너희를 위해 ‘구주’가 태어나셨는데 그리스도 ‘주’시기 때문이라.” (헬)
여기서 천사가 → ‘구주(Saviour)’와 ‘주(the Lord)’를 구분하여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 두 단어 속에,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두려움을 해결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① ‘구주’는 ‘구원자’ Saviour란 말입니다. → 우리의 ‘죗값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망이라는 죗값을 치러야 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을 어린 양으로 구주가 오셨으니, 이제 더 이상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는 회복되고, 다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단절의 두려움’ ‘심판의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② ‘주’라는 말은 the Lord ‘왕’이란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왕’으로(‘주인’으로) 오셔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 됨’에서 오는 책임질 수 없는 ‘현실의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왕이다!” 참 멋진 말인 것 같지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힘은 참으로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날마다 느끼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왕’으로 오셔서 그분이 내 삶을 다스리고 이끌어 주실 것이니! ‘어떻게 살아갈까?’ 염려하고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눅 2: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성도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 “① 예수님이 나의 죄를 해결하신 ‘구세주’가 되셨고 ② 내 삶의 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죽음의 두려움’과 & ‘생활의 염려’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다 끝난 것 같고 다 해결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질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의 세상의 현실은 결코 이상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 2장 1절에 보면, ‘아구스도’라는 로마 황제가 나옵니다. 눅 2:1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그가 누구냐 하면, 로마 제국의 최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자신의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시이저(Julius Caesar)’를 신(god)으로 선포하고, 자신은 신의 아들(Divi filius, son of a god)로 칭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구스도를 세상의 구주, savior, 세상의 왕이자 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두 명의 구원자요 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하나는, 실제 그 당시 세상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 제국의 황제’인 ‘아구스도!’ 그는 살아 있는 권력자이자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장악하기는커녕 그 당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속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되, 출생할 장소도 없어 냄새나는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입니다.
누가는 이 두 사람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던 그 날 밤에 로마 황제는 ‘왕궁’에서 잠을 자고, 구주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구유’에 누여 있습니다. ‘왕궁’과 ‘구유’의 대비입니다. 지금 누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을 살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와, 찬양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은! 세상의 황제인 아우구스에 비해, 아무 힘 없는 아기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고백하지만! 실상 가끔은, 아니 너무나 자주, 예수님은 그저 구유에 누여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분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갖고 열심히 기도해도, 아우구스로 상징되는 세상의 돈이나 권력의 힘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누가 참된 ‘주님’입니까?
3. 누가 참된 주님인가?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 등록을 명령하여 제국 내 모든 백성들을 다 움직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무조건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필 마리아의 임신 말기에 이런 칙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권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 권력과 통제에 힘없이 당하고 있는 유약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은 세상의 현실이 그러니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은! 누가? 진정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누가는 괜히 아우구스 황제의 호적 등록 사건을 2장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 황제의 칙령은 오히려 700년 전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성취하는 도구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호적 명령을 통해,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면서 예수님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 곧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세상을 통제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이 로마 황제를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오실 메시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 9:6b →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구유에 누워있다고 해서 그가 힘없는 한 아기가 아닙니다. 그는 기묘하고 놀라운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주님(the Lord)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믿는 자는 두려움에 빠져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로마 황제가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해도, 결국 300년 후 로마 제국 전체가 기독교화됩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죽였어도, 믿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처형해서 죽이므로 자기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그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때로 우리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예수를 믿는 나에게 벌어져도 주님의 주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의 현실이지만, 기묘한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의 통치는! 느린 것 같지만 완벽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참된 평강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무서워하지 마십시다. 자녀도, 정치도, 건강도, 우리의 미래도! 다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으시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담대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현재 여러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가장 든든하다고 믿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성경은 힘없는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복음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나의 죄를 해결하신 구세주 되셨고, 내 삶의 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왕 되셨 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고백을 나눠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선택의 자유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은 전혀 달라집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자신의 고별 설교에서 이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의 문화는! 굉장히 음란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문화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농경문화의 특성상, 풍요의 신이 그 땅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을 정복하게 하셨지만, 그 땅의 문화와 종교에 물들지 않도록 계속 경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받은 축복을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빼앗길지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자주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섬기다’라는 동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누구를 섬길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가질 것을 여호수아가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섬기고 사는가?’ 이것은 ‘운명을 가르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자신의 ‘선택과 결단’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 24:15b →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선택과 결정은! 우리 ‘마음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마음의 태도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여 있을 때! 하나님은 변치 않고 계속 이어지는 ‘참된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성도 여러분!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선명하게 선택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 24:15b →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기 ‘오직’이라는 표현은! 타협이나 중간 지점이 없는 절대적 신앙, 절대적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9절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수 24:19 →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이 말은 성경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표현으로, 하나님은! 다른 신들에 대해서 타협의 여지를 허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네! 언제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쉽게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빨리 세상에 영향을 받고, 말씀의 기준을 떠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섬길 것인지?’ 그 선택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해서 복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2가지 단계를 잘 거쳐야 합니다.
① 우리의 선택이 ‘당장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일수록 함부로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포장과 겉이 화려하다고 그냥 집어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내용물이 충실한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맛이 달콤하다고 건강에 유익한지 아닌지를 생각지 않고 그냥 먹어서는 안 됩니다. 들어간 첨가물이 몸에 해롭지는 않은지 따져보고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여러 신’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한번 잘 따져봐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바른 신인지? 아니면 여기 가나안의 우상 신들, 아모리 족속의 신이던지, 그 대상을 자세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잘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촉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백성들 가운데, 이방신들에게 유혹받고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에 백성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16절입니다. 수 24:16 →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반가운 화답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백성들의 이 결단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바로 그다음 세대에서 아주 빠르게 영적인 어둠에 휩싸이고 맙니다. 그 결과, 사사기의 이스라엘에는 영적 혼란기-영적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그 당시의 각오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의 화려함과, 맛의 달콤함의 유혹 또한 컸고, 그것을 분별할 영적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선택을 하므로, 한 시대가 가기도 전에 옆으로 빠지고 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vs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다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당장의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의 탐스러움이 선택의 기준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기초한 선택을 한 것이 다릅니다. 자! 아브라함을 보십시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인생의 가장 크고 놀라운 복이며 열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인간인지라, 아들 이삭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십니다. 창 22:2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독자”라고 하신 말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지금 아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자기가 받은 ‘복’을 붙든 것이 아니라,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손을 들어 칼로 내려치는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막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 22:16∼18 →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여기서 다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삭을 일러 ‘아들’ ‘독자’라는 단어 대신, ‘씨’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로 “씨로 말미암은 축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얻게 된 ‘열매’는 지금 내가 ‘당장’ 먹고 누릴 수 있는 ‘양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면 그것은 ‘영원한’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양식’은 한 번 먹어 버리고 나면 없어지지만, ‘씨’는 또 다른 많은 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양식은 일시적으로 내게 기쁨을 주지만, 씨는 영원히 내게 기쁨이 되고 복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열매를 ‘양식’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씨’로 삼을 것인지는 각 개인의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가치관이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선택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인 선택을 통하여 영적으로 ‘다른 세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서, ‘당장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우리의 선택은, 뚜렷한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선택은 행동에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말은, 다른 신들에 대해서 등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택은 언제나 다른 한쪽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여호와를 선택한다는 것은, 수많은 다른 신들의 유혹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귀고 있다면, 다른 이성적인 관계는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와 깨끗이 결별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도 가나안으로 가져오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도 함께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와 다른 신은 공존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출 20:3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일직선으로 뻗어있는가? 아니면 마음이 나누어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은! 다른 모든 신들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오직 하나님 그 한 분만을 사랑하겠다는, 의도적인 고백과 함께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와야 합니다.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24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늘 여호수아도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애매한 선택은 비굴함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온도는 ‘미지근한 것’입니다. 적당주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그런 것은 그렇다고, 정확하고 올곧게 선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 선명한 기준! “나는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이 절대적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세속화에 물들지 않고 승리하셔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가정 속에 넘쳐흐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선택과 결단을 잘못하여 겪은 인생의 어려움이나 손해가 있었다면 나눠보시고, 특별히 신앙적인 선택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복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주신 복을 붙들고 즐기느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개인의 경험이나,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반복되지 않을 결단도 나눠봅시다.
3.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입니다. 신앙의 위협을 받고 타협하게 하는 유혹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혹 아무런 위협이나 갈등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지 나눠봅시다.
지난주일 말씀대로 ‘갈렙’이 자청하여 모두가 싫어하는 땅인 험한 산지 ‘헤브론 지역’을 분배받음으로써, 땅 분배 문제는 갈등 없이 풀렸습니다. 마침내, 열두 지파에게 각각 땅이 다 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성막을 돌보는 직임과 책임을 맡은 레위 지파에게는 따로 땅을 분배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각 지파들이 분배받은 땅에서 각각 4개씩의 작은 주거지를 레위 지파에게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 속에 흩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특별한 삶에는! 언제나 제약이 따르고 불편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레위 지파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참 불행한 삶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시고 택하신 제사장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를 →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레위 지파처럼 살아야 합니다. 소금처럼 나를 희생하여 세상 속에 스며들어 맛을 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즉, 성도는 섬김과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녹여서 세상 사람들이 바르게 살도록 인도하는 향도 역할을 하는 사명자들인 것입니다.
12지파에서 각각 4개의 성읍을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총 48개의 성읍인데, 그중에 42개의 성읍에는 레위인들이 살고, 나머지 6개의 성읍은 레위인들이 관리하되 특별한 용도로 지정해 주셨습니다. 바로, ‘도피성’으로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도피성(逃避城, City of Refuge)이란? →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fl;q]m ry[])인데, ‘받아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즉 문자 그대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받아들여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읍이, 곧 도피성인 것입니다.
이 도피성에 관한 성경 말씀을 두루 살펴보면 → ① 요단강 양편에 각각 세 군데 씩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도피성’ 사이의 거리가 거의 균형을 이룰 정도로, 등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 도피성의 위치는! 가나안 땅 어디서나 쉽게 몸을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즉, 가나안땅 어느 곳에서든 하루 안에 당도할 수 있는 약 40㎞ 내외에 선정되었습니다. ② 이들 도피성 방향으로는 곧고 넓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고, 연말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나와서 이 길을 보수해야만 했습니다. ③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목 요소요소에 ‘도피성 ⇨’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2. 도피성을 주신 이유
→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주신 것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즉, 비고의적(非故意的)인 살인자, 즉 과실치사자(過失致死者)의 경우 이곳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에 제사장이나 성읍의 장로들이 판단해 보건대, 악랄하고 고의적인 살인자는 비록 도피성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공개 처형시킴으로써 심판의 준엄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통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 생명과 관계된 ‘죄’에 대해서, ‘성경적인 원리’는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연좌제’는 금지다. - 하나님은 가장 가까운 아버지와 아들이라도 그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셨습니다. 겔 18:20 →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나님은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시고, 연대책임을 지는 ‘연좌제’는 인정치 않으신 것입니다. 이 같은 규정을 통하여, 죄지은 사람 그 당사자 외에 억울하게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게 하셨고, 복수가 계속되는 일을 막으신 것입니다.
2. 고의로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 그러면 어떤 자가 고의로 살인을 저지를 자인가? 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흉기나 도구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민 35:16~18 →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그는 살인자니,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그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둘째, 미워하는 마음이나 악의를 가지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민 35:20∼21 →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 죽이면, 그 친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살인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인 살인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3. ‘부지중에’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겐 기회를 주라. - 하나님께서는 의도성이 없는 살인에 대해서는 도피성으로 피해서 복수자로부터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수 20:3 →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실수로라도 사람이 죽으면, 그 죽은 당사자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은 분이 끓어오르고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되겠죠! 그러면 자기 가족이나 친척을 죽인 그 ‘과실치사자’를 또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인’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도피성’이라는 피난처인 것입니다.
3. 도피성의 영적 의미
1. 반드시 죄의 고백, 회개가 필요하다. 수 24:4 →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이 말씀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할 때, 도피성 문 입구에 서서 도피성의 장로들에게 사건의 내막을 상세하게 설명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도피성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죄 사함받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낱낱이 고백해야 하는 것’과 ‘도피성의 목적’과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회개’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우리에게 죄 용서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 우리 스스로 죄를 극복하려는 능동적인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죗값으로 사망에 빠질 수도 있고, 용서받고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이 넓고, 언제든지 죄인이 찾아올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고, 도피성의 장로들이 기다리고 있어도, 죄인이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죄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넓고 깊어도! 심지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하셨어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입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부지 중에 지은 죄라도 뉘우치고 근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수 24:6 →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는 그에게 보복하려는 자들로부터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부지중 살인한 자의 거주를 제한함으로써 그로하여금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근신하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죄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실수였다고 할지라도 피해자는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도피성’은 ⇨ 용서를 위한 ‘자비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죗값을 몸으로 갚는 ‘공의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과실에 의한 살인이라고 해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한 자가 아무런 제약도 없이 활보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살인자의 주거를 제한함으로써 살인자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근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도피성 제도에 나타난 정신을 마음에 새겨, 실수하지 않도록 신중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되, 혹 실수를 범했을 때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속죄하며 철저하게 근신해야 합니다. 또한, 피해 당사자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생각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저 실수였다고 핑계 대며,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실수도 품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냥 말로 ‘네 죄를 용서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주어 죽게 하심으로 죗값을 친히 치루셨습니다. 값비싼 댓가로 얻은 용서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 깊이 새기고, 바르고 진실하게 살기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는 세상을 섬기는 레위인이요 제사장으로서, 그 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 나눠보고, 새 결심을 가집시다.
2. ‘회개’와 ‘용서’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나눠보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스스로 너무 관대하지는 않았는지, 반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냉혹하지 않았는지? 십자가를 생각하며 나눠봅시다.
3. 세상이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도피성의 뜻이 죄인도 ‘받아들이는 곳’임과 같이, 우리 사회가 생각을 달리 하는 상대를 받아들이는 성숙함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주인공 갈렙은, 그 이름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구체적인 삶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20세 이상으로 출애굽 한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더불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유이(唯二)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가려져서, 갈렙은 그 공적에 비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정말 아름다운 신앙유산을 남긴 위대한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갈렙을 본으로 삼아, 우리 자신들의 믿음도 위대해지고, 나아가서는 후손들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은, 아직 가나안 땅 정복이 끝나지 않은 상태지만, 여호수아가 나이가 너무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땅을 분배하는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어 순서를 바꿔서! 먼저 땅을 분배하고, 분배받은 땅을 각 지파별로 정복해 가는 방법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어떤 지파도, 분배받길 원치 않는 땅이 있었습니다. 그 땅은 바로 높은 산악지대이며, 크고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거주함으로 인해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헤브론’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은 “제발 저 헤브론만은 우리에게 걸리지 않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사람들보다 스무 살 이상 많고, 가나안 정복에 공을 많이 세운 갈렙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 14:6∼9 요약 →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나는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열두 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여호수아와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지도자 모세는,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 다음에 이어지는 갈렙의 말이 어떤 말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십니까? 상황으로 보아 “나는 공로가 많은 사람이니, 좋은 땅, 내가 원하는 땅을 차지할 권리와 자격이 있소!” 이렇게 말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갈렙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수 14:12 → “저 헤브론 산지를 나와 우리 지파에게 주시오. 그곳에는 아낙 자손들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렇게 갈렙이 자청하여 모두가 싫어하는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자! 이 사건을 통해 갈렙이 우리에게 남긴 신앙유산은 어떤 것이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갈렙은 ‘영적인 유산’을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가 발언한 12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수 14:12 →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 갈렙의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후 지금까지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쉬워 45년이지, 이건 ‘일평생’입니다. 갈렙은 ‘과연 이루어질까?’ 하는 꿈과 같은 말씀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자신을 85세까지 살아있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약속과 말씀을 이루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수 14:10 →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과 생명 존재의 이유’는 →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취’였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이유도’ 갈렙과 같기를 바랍니다.
또한, 갈렙이 험한 산지인 헤브론을 달라고 일부러 요청한 것은, 그곳이 ‘영적인 유산’이 서린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 14:12 →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이 이야기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 13:18 →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네! 헤브론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제단을 쌓고 예배드렸던 곳입니다. ▶ 두 구절을 요약하면 → <이 산지 = 헤브론(마므레 상수리 수풀이 있는 곳) = 제단을 쌓았던 곳>
또한, 이 헤브론의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아들 이삭과 리브가 내외, 그리고 손자인 야곱과 레아 내외, 증손자 요셉이 묻힌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조상의 부부와 이스라엘을 번성케 한 요셉이 묻혀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고향’입니다. 당연히 갈렙에게는 ‘헤브론’이 ▸자신의 믿음이 시작된 곳 ▸나의 영적 뿌리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렙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하면, 그곳은 바로 ‘헤브론’이었습니다. 아직 정복되지 않았고, 정복하기도 쉽지 않은 땅이었지만, 그 땅이 가진 영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모두가 회피하는 땅이었지만, 그 땅을 자청하여 요구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 땅은 크고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기에,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영적인 유산이 어린 헤브론에 살고 싶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분명히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갈렙은 헤브론을 그냥 살아갈 땅으로서가 아니라, 그 땅의 영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네! 이렇게 영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유다 지파 ‘갈렙의 후손’에서 ⇨ 다윗이 나왔고 ⇨ 예수님! 메시아가 나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 또한 이렇게 ‘영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시각과 세계관을 후손들에게 남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갈렙은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고난과 어려움과 감당하기 어려운 일, 실패가 찾아오면, 그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위기에 부딪혀도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나갑니다. 갈렙은 이런 건강한 긍정적인 ‘정신적 유산’을 이스라엘 공동체에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수 14:8 →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네! 갈렙과 함께 정탐하러 올라갔던 10명의 정탐꾼들이 얼마나 백성들을 놀래고 두렵게 했던지, 간담이 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케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갈렙은 이렇게 외칩니다. 민 14:9 →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에서도 갈렙은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이런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함께하신 결과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속에서 그는 긍정적인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네! 갈렙은 여든다섯 살이나 먹은 노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젊은이였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건강하고 싱싱한 정신적 담대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네! 갈렙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미친 이런 ‘긍정적인 정신적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래야 합니다. 인생살이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붙들고 살면! 승리할 수 있다”는 간증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갈렙은 ‘섬김의 본’을 보여준 신앙인이었습니다.
사실, 갈렙은 여호수아와 ‘동급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여호수아보다 앞서 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와 신명기를 보면, 갈렙의 이름을 앞세워 ‘갈렙과 여호수아’라고 나온 부분이,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 나온 곳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자기에게 주어진 힘과 영향력을, 여호수아를 세워 주고 섬기는 데 사용했습니다.
지금 갈렙은 다들 힘들어하고, 귀찮아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뒤로 빠지는 일에, ‘험한 산지를 내게 주소서!’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유익하고 이익이 되는 일에는 나섰다가도, 헌신해야 하고 힘든 일에는 전부 뒤로 빠져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는 이 일을 하리라!” 자발적으로 나서고 섬기는 교회라야 든든히 서가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누군가 어려운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우리 교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갈렙처럼 → 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100% 신뢰하는 ‘영적 유산’을 물려줍시다. ②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건강한 정신’을 물려줍시다. ③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섬김의 정신’을 물려줍시다. 그래서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이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이고, 갈렙은 유다 지파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여호수아가 승리한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갈렙이 승리했습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2. 나는 갈렙이 남긴 유산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와닿고 본받아야 하겠다고 생각되십니까? 그 이유와 결심을 나눠봅시다.
3. 꿈마을엘림교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당신은 몇%입니까?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김의 자리에 자원합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담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이름으로, 신앙 안에서 부담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부담감을 저는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과 생각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심령의 두드림이요 노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감동대로 따를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에게도 이런 두드림과 노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거부하지 마시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신 15:7a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는 곳에 가난한 이웃이 함께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1. 움켜쥐지 말고 펴라.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 15:7b∼8 →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아멘. 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보면, 마음을 닫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아낌없이 넉넉하게 도와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반드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8, 10, 11절입니다. 그리고 이 ‘반드시’라는 말과 이어지는 말은 ‘펴라’ ‘주라’는 말입니다. 이 ‘주라, 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파타흐’인데, 이것은 가난한 이웃을 보거든 반드시 손을 펴고,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내 주는 그런 행동을 하라고 강조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움켜쥐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티크포츠’인데 이것은 ‘끌어모은다, 닫아버린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하여 마음을 닫고, 지갑을 닫고, 오로지 자기 욕심만을 위해 끌어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파타흐, 즉 여는 일, 펴는 일을 꼭 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반드시, 그리고 넉넉히 손을 펴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신 15:10 →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렇습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풍성하게 베푸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베푸는 자에게 넉넉함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이 말했습니다. → “진정한 부자는 많이 소유한 자가 아니라, 많이 나누는 자다.” 그리고 → “혼자 행복한 사람은 슬픈 사람이며, 진정한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하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두 성경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행 20:35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눅 6:38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 두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남을 돕는 것은, 결국 자기를 돕는 일이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면제하고 탕감해 주라.
여러분은 성경의 ‘안식년 제도’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 안식하듯이, 여섯 해가 지나고 일곱째 되는 해에는 안식년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신명기에서는 그 안식년을 ‘면제년’이라는 말로 바꿔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안식년이 되면 그동안 빚진 자들의 ‘모든 채무를 다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쉽게 지켜지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자들은 면제년 제도 때문에, 남에게 주었던 빚을 면제년이 다가오기 전에 다 갚게 하려고 강압적으로 채무를 이행케 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꾸어주거나 돕는 일을 회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 15:9 →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반면에, 면제년의 은혜! 빚을 면제하고 탕감해 주면, 대신 하나님께서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조금 길지만, 함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신 15:1∼6 →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면제년의 은혜를 베풀면 그 구제, 그 나눔, 그 섬김에 대해서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명령을 그대로 지키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4절 말씀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행하면”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을 뒤로하고, 세상적인 원리와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보라.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베풀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6절 → “꾸어주는 인생이 될지언정, 꾸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해주겠다.” 10절 →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을 주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힘들어도 이웃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은 풍성함으로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긍휼’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자비와 양선’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구제, 나눔, 섬김’은 주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면제와 탕감의 계명은 지키기가 쉽지 않은 계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값없이 모든 죄를 탕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 ‘나 자신이 탕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이 있다면, 이 탕감의 계명도 결코 어려운 계명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이웃에게 탕감의 은혜를 베풀면,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대신 주시마고 약속하신 풍성한 복이 있으니, 즐거움으로 면제하고 탕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는 행복을 알라.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행 20:35 →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성도 여러분! 받는 것은 복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복은 다 ‘받는 것’입니다. 물질, 건강, 사업, 자녀, 성공, 명예, 출세, 이런 모든 것들은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받는 복’이 다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복’이 받는 것이라면, 그러면 ‘행복’은 무엇입니까? 행복은 주는 것입니다. / ‘복’이 소유하는 것이라면, ‘행복’은 감사하고 베푸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과 행복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복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절대적입니다. 물질, 명예, 자녀, 건강의 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복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많이 소유했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받은 복 때문에 오히려 불행하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버는 복은 받았으나, 그 돈으로 인하여 인격이 병들고 가정이 불행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과 권세를 가지는 복은 받았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타락하여 비참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복이 세상적인 것이라면, 행복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복은 인격과 관계없이 옵니다. 악한 사람도 출세하고, 성공하고, 높은 위치에 오르고, 사업이 번창하고,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다릅니다. 행복은 반드시 인격과 비례합니다. 돈을 버는 데는 인격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만, 돈을 값어치 있게 쓰는 데는 반드시 성숙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술집에서 호기로 많은 팁을 주는 것과, 의미 있는 일을 위해 기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가슴으로 세상의 약한 자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될 때, 하나님의 약속도 있습니다. 바로 ‘이로 말미암아’의 약속입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입니까? 우리의 구제와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손이 닿는 모든 일을 복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고 하십니다. 복을 쌓아 놓는 축복의 창고가 아닙니다. 복을 널리 나누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움켜쥐는 자들이 아니라, 사랑의 손을 펴는 사람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면제하고 탕감하는 모험적 사랑을 펼치는 사람들, 그리고 주는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성도와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나눔과 묵상
1. 사해와 갈릴리 호수의 차이점에 대해서 오늘 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고, 내 삶의 가치관과 태도에 있어 바뀌어야 할 것들을 나눠봅시다.
2. 말씀을 통하여 나눈 ‘복’과 ‘행복’의 차이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 것인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나를 향한 질문과 요청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에서 나 중심 으로 변해간다는 신호입니다. 당신의 현재 상태에 대하여, 그리고 결심에 대하여 나눠봅시다.
견고한 성인 여리고와 맞부딪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수 6:2∼5 →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여리고성 함락 작전’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작전에 들어갑니까? 네! 굉장한 작전이었습니다. 희생자 한 명도 없이, 그 강력한 성을 함락시킨!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하나님의 작전’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믿음의 작전’이었습니다. 히 11:30 →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그렇습니다. ‘믿음의 작전’, ‘하나님의 작전’을 통해서, 견고한 성 여리고는 무너졌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작전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여리고를 무너뜨린 하나님의 작전
첫째, 성벽을 둘러싸라!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꿈쩍도 안 할 태산 같은 문제 덩어리인 여리고 성을 둘러싸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장정 60만 명이 성을 에워싸 돌았으니, 성은 완전히 둘러싸인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6일 동안 그렇게 둘러쌌습니다. 무너져 내릴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여리고 성을 둘러쌌습니다.
우리에게도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내 능력 밖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로, 인내로, 믿음으로 그 아픔을, 문제를 감싸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팽개치려고 하지 말고, 그 아픔까지 내 안에 품어버리시길 바랍니다.
마치 진주조개가 고통을 주는 이물질을 내뱉지 않고, 자기 몸의 진액으로 그 상처를 감싸고 감싸서, 마침내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 내듯이! 삶의 어려움과 고통, 문제를 신앙으로 감싸고 감쌀 때, 마침내 그것은 도리어 내 삶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간증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성벽을 감싸 돌며, 인간적인 소리를 멈추라.
완전 ‘침묵시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전략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략으로 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말, 인간의 경험과 지혜에 근거한 것은,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말들은 도리어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보면, 막상 게임에 임해 있는 사람은 볼 수 없는 수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기가 막히게 훈수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임에 임하고 있는 당사자는 긴장해서 상황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반면,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훈수를 잘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훈수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만 고집한다면! 결코, 게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훈수도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훈수를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인생의 큰 문제 앞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 “이것이 적어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너희 주장을 내려놓아라. 인간적인 말을 하지 말아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작전, 하나님의 일엔! 하나님의 견해와 생각이 제일 중요합니다. 금년 한 해, 인간의 생각이나 지혜는 침묵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언약궤를 메고 가라.
언약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궤! 그 ‘말씀’을 붙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도 이 ‘말씀’이 없이 나아간다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 비결은! 확실한 약속의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금년에 결심하신 대로 성경통독, 암송, 필사를 계속해 나가십시오.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어려울 때일수록!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붙드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에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나팔을 불라!
여기 ‘나팔 소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만나 주시는 시내산 장면을 보면! 큰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 19:17∼19 →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문제를 그냥 감싸고 있는 것만으론 불완전합니다.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 결국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이다.” 이렇게 외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 목소리를 하나님도 들으시고 원수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잠 3:6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믿음의 선포로 여러분의 인생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결정적일 때 큰 목소리로 외치라.
뭐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라고 했을까요? “할렐루야!” “아멘!” “주여!” … 정확히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여호와께서 이 성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이렇게 신앙의 확신을 외치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수 6:20 →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문제 앞에서도 우물쭈물하지 말고 외칩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크게 외칩시다!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선포하십시오! 자기가 누구인지,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 분명히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가로막고 있는 견고한 여리고 성과 같은 문제가, 무너지고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작전대로 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철옹성인 여리고 성이 단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온전히 순종했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리고 성을 발굴했던 고고학자들은 한결같이 여리고 성은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지진은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으킨 지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성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장 바로 앞인 여호수아 5장입니다. 수 5:13∼14 →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싸고돌기 전부터, 이미 그곳에 하나님의 군대가 와 있었던 것입니다. 네! 하나님의 작전에 따라,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때, 그들도 같이 움직였고, 나팔 불며 소리지를 때, 그들도 함께 외쳐 결정적인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여리고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여호와의 군대가 이미 나를 도우려 도착하여 역사하고 있음을 믿고, 말씀대로 따라 사십시오. 그리할 때 견고한 여리고는 무너질 것입니다. 스가랴서의 말씀입니다. 슥 4:6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도 여러분!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있는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들이 우리 앞에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네! ‘하나님의 성령’!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힘의 원천입니다. 이 성령의 힘이! 큰 산이건, 견고한 여리고성이건 다 무너뜨릴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 성령의 힘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모든 견고한 여리고를 무너뜨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매일 한 바퀴씩 여리고를 돌라는 명령은,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라는 교훈입니다. 나의 매일 경건생활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나눠보고 서로 격려합시다.
2. 부정적인 사람일수록 불평을 잘하고, 성숙한 신앙인일수록 묵묵히 침묵 정진할 줄 압니다. 신앙은 바로 ‘언어훈련’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지금 내가 무너뜨려야 할 가장 큰 외적, 내적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느끼고 깨닫고 결심한 바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① 1/19 창립 50주년 기념일 ② 2/23 창립 50주년 기념예배 및 장로 은퇴 및 임직예식 ③ 5/4∼5 30·40 캠프(교회학교와 함께) ④ 5/25 창립 50주년 기념음악회(부천시민회관) ⑤ 6/1, 12/7 성경암송예배 ⑥ 6/15 홈커밍데이1(원로목사님), 6/22 홈커밍데이2(제가 목회하는 동안에 신앙생활 하셨던 분들 – 성도 여러분이 연락하셔야 합니다.) ⑦ 6/29 성경퀴즈대회(모세오경) 11/23 (4복음서) ⑧ 8/15∼16 50·70 리트릿 ⑨ 9/7∼ 사마리안 퍼스(선교지에 선물 상자 보내기) ⑩ 9/28∼한달, 전도초청(새생명 전도축제) ⑪ 11월 중 실업인선교회 주관 해외선교지 방문 ⑫ 희년 기념사업으로 (개안수술 지원, 선교지 태양광발전소 설치 혹은 도서관 트럭 봉헌, 강화 교동에 평화통일 기도교회 건립 지원)
2. 개인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룬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시상계획
① 개근상: 주일 52주(현장 만) ② 성경암송: 400구절(송신후 학생 백만원 상금/ 그러나 그것은 첫 번째 암송자여서! ③ 성경필사: 신구약 전체(언제 시작했던지, 금년에 제출하시면!) ④ 성경통독: 1회 이상 /최다독 ⑤ 전 도: 등록 및 5주 새가족교육 마치고 속회와 선교회 배치까지 하게 하면!
지난 40년간 이스라엘을 이끌어왔던 영도자 모세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큰 손실이고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힘들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낙심하고 주저앉아 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지명하셨습니다.
새로운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된 여호수아는 물론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형통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상황은 무척 어렵고, 짐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향한 힘찬 행진을 시작합니다.
기독교 정신은 가만히 앉아서 묵상하거나 명상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가지 동사입니다. 수 1:2 →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1. 일어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동사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죽었다고 힘없이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라고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신앙입니다. 성경에 ‘일어나라’는 말이 618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났습니다. 다리 저는 자도 일어났고, 앉은뱅이도 일어났고, 절망의 자리에서도 일어났고, 죽었다가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어서 침상에 누워있는 어린아이에게 “소녀야! 청년아! 나사로야! 일어나라. “달리다굼” 하심으로 일으켜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 문을 열고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도! 좌절과 낙담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성전 입구에서 앉은뱅이로 구걸하던 사람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행 3:6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자 40살이 넘도록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그가 베드로와 요한의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설 때,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오그라졌던 다리가 쭉 펴져,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님들! “밟히면서도 노랗게 피어나는 민들레와 같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 어떤 역경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도약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동사는! 요단강을 건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홍해를 건넌 것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도약’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3장을 보면,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을 건너는 데 강물이 가장 범람하는 시기에 강을 건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수 3:14∼15 →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강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그동안 40년이나 방황케 하셨던 하나님이, 왜 하필 가장 건너기 힘들 때를 골라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위하여 또 다른 ‘영적 도약’을 체험케 하기 위함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스스로 정해 놓은 선을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속회, 선교회에 참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주일예배로 너무 충분해! 난 새벽엔 죽어도 못 일어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없습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상 받을 여러 가지 일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한계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도전과 도약의 믿음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물이 펄펄 끓기 위해서 1도만 높이면 되듯이, 한계는 도약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전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동사는, 앞을 향해 계속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멈추지 말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목적지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애굽 쪽을 바라보지도 말고, 광야에 머물러 불필요한 고생도 하지 말고, 축복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뚜렷한 목적을 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미래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네 발로 ‘밟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북쪽 헐몬산의 눈이 녹아내리고, 또 우기와 홍수 철이라서 강물이 가장 많고, 요단강 폭이 가장 넓을 때이지만 앞으로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땅 짚고는 누가 헤엄을 못 치겠습니까? 신앙이란! 모험이고 도전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어려울수록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모험적 신앙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 축복을 약속합니다.
첫째, 주리라.
수 1:3∼4 →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두려움과 낙담의 자리에서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시겠다’는 말씀을 2천 번 이상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함께 하리라.
수 1:5 →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여호수아)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을!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에, 더욱 함께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더욱 함께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형통하리라.
수 1:7∼8 →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기 ‘형통한다’는 말은 ‘성사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내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사시켜주시는 형통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형통’이라는 말을 75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를 위해 성공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2025년을 출발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 형통한 삶의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희년 프로그램 일정 중에 ‘기대되고, 꼭 참석하리라!’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나눠보고, 속회 단위로 함께 할 계획을 세워봅시다.
2. 2025년에 상 받을 여러 가지 일들을 제시해 드렸습니다. ‘나도 도전해 보리라’ 마음먹은 신앙 성장·성숙의 일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세 가지 동사’와 ‘세 가지 약속’을 열거해 보고, 그중 본인에게 가장 도전이 되고 힘이 되는 내용은 무엇 인지 나눠봅시다.
오늘 본문인 시편 115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째 성전을 짓고, 헌당할 때 바쳐진 헌시(獻詩)입니다. 새 성전을 완공하고, 그들이 성전으로 올라갈 때 불렀던 찬양 가사란 말입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 땅에 돌아와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복합적인 이유로, 무려 16년 동안이나 성전 건축이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암울한 때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앞장서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방에서 반대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지금 흉년과 기근과 경제적 불황이 심각한데, 무슨 성전 건축이냐고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더군다나 사마리아 토착민들의 공격까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그들과의 싸움도 버거운데 성전 건축이 말이 되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함께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사기까지 꺾어놓았습니다. 하지만 학개 선지자의 탁월한 영적 지도력에 의해서 성전 건축은 계속 진행됐고,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이때, 오늘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힘차게 선포합니다. 시 115:3 →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마 19:26 →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꿈마을엘림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부족했는데, 하나님께서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50년 전! 복음의 불모지 삼정동에서 땅 한 평도 없어, 시 소유의 공원용지 위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였지만, 오늘의 교회로 부흥 성장케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15절 말씀이 실감 나지 않습니까? 시 115:15 →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복 받은 교회와 성도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결실인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이 ‘아멘!’이신가요? 아멘.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받는 축복을 오늘 성경은 → ‘삼중적으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 115:9∼11절입니다. →
하나님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성전 건축을 이룬 이스라엘 집, 아론의 집안,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렇게 오늘 성경에서 약속하신 복을! 저와 여러분도 똑같이 누리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세 가지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 보호해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9,10,11 →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기 ‘도움과 방패’라는 말은 ‘보호와 은총’을 뜻합니다.
사실 인생은 모험입니다. 모험이란? 모르고 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모험에는 반드시 위험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호하심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짓는 데는, 많은 위험과 방해가 따랐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힘든데!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공격해왔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성전 짓는 일을 계속할 때! 하나님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생의 보호자’십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여호수아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때, 이들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나아갈 때, 언제나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했던 다윗! 수많은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진을 쳐주셨습니다. 시 34:6∼7 →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불모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때 숱한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박해자들의 암살 계획의 위기 상황에서도, 독사한테 물리더라도, 바다 한복판의 노도 광풍중에서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행 27:24∼25 →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주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를 보호해주십니다. 마 28:20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런 하나님의 ‘보호의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생각해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12∼13 →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정리해주셨습니다. 마 16:23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깊이 생각해주시는 것입니다.
12절에 ‘생각하사 복을 주신다’는 표현은 ‘특별히 깊은(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생각해주신 축복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간증했습니다. ⇨ 시 8:4 → 크게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 40:5 → 많이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 92:5 → 깊이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복’이 임하시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사정을 아시고, 아픔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인생!” 생각만 해도 얼마나 든든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지 못하던 라헬을 생각해주시니까, 태의 문이 열려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고(창 30:22), 또한, 불임여성이었던 한나를 생각하여 주시니까, 사무엘 외에도 자식을 다섯 명이나 더 낳을 수 있었습니다(삼상 1:11). 할렐루야!~ 우리 모두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번창케 해 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14 →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소위 ‘제사장적 축복’(Priestly blessing)입니다. ‘풍성한 축복’(abundant blessing)을 말합니다. 여기 ‘번창’이라는 말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훨씬 능가하는 ‘흥왕’을 뜻합니다(become greater by far than). 아버지 다윗의 헌신의 결과, 아들 솔로몬은 그 누구보다도 창성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전 2:9 →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여 그 어려운 경제 한파 속에서도 성전 건축을 위해 헌신하였더니, 하나님은 번창의 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시 115:14 → “주께서 너희를 번창하게 하여 주시고, 너희의 자손을 번창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것은 없고 생활은 어려웠지만, 학개 선지자의 지도를 따라 성전 건축을 위해 산에 올라가서 나무라도 베어오기 시작했더니! 하나님께서 당장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학 2:19 →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동안 흉년으로 시달리던 그들에게, 당장 풍작의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 시편 115편 15절 말씀과 같은 놀라운 축복을 ‘선언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 115:15 →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다.” 아멘.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사실을 당신은 믿으십니까? 환경과 조건은 불가능 인데! 그렇게 믿고 살아서 받은 개인적인 응답이나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와 성도들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들(교회)입니다. 이에 대한 간증을 나눠봅시다.
3. 우리는 지금 정치 경제적으로 그 어느 해 보다 어려운 때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할지 나눠봅시다.
오늘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믿고 맡길 만한 사람 - 요셉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까요?
첫째, 요셉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셉이 마리아라는 처녀와 약혼을 했는데, 어느 날 약혼자인 마리아가 자기와 상관없는 아이를 뱄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가졌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요셉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마리아! 그녀는 순결한 여인이 아닌가? 그런데 아이를 임신했다니! 의분이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율법이 정한 방법대로 처리하고픈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내가 그렇게 한다면 마리아는?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당할 수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이어져 갔습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요셉은 침착하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베풀기 위해 고민하였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 1:19∼20a →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 ‘생각했다’라는 말은 ‘고민했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한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고민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입장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남의 허물과 약점을 알게 되었을 때, 기가 막힌 말거리를 알게 되었다고 흥분하셨습니까? 아니면 드러내지 않고, 덮어 주려고 깊이 생각하셨습니까?
성경 잠언엔 이렇게 말합니다. 잠 17:9 →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 주려는 요셉의 의로운 마음을! 우리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셉과 같이 거룩한 고민과 침착함, 배려를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관계를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요셉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그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가 낳을 아기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만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이,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입니까? 마리아에 대한 ‘긍휼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마리아에 대한 ‘동정심’ 때문입니까? 물론 긍휼의 마음과 동정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오해를 풀고, 기쁨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이는 일에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천사가 요셉을 설득하는 장면이 20∼23절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은!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마 1:20∼22 →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그러면서 천사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사 7:14(마 1:23)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요셉에게 먹혀들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이 먹혀들어 가는 마음은 복 있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들어 가지 않는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쌓인 사람들, 쓸데없는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을 품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겐 말씀이 먹혀들어 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보세요.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같이 말씀에 대한 수용력이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못 믿을 일을, 요셉은! 주의 사자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요셉은 즉시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결국, 이 믿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셋째, 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마 1:24∼25 →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아내와 동침치 않았습니다. 아내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외경에 의하면, 요셉은 아주 늦장가를 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육신의 욕망을 절제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식 결혼을 하고도 부인과 가까이하지 않는, 인내와 경건의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성결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러한 요셉의 경건을 배우기 위하여 12월 14일부터 성탄일까지 열흘 동안 금식일로 선포하고 매일 한 끼씩 금식하며 주의 오심을 경건하게 맞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사모하여, 몸도 마음도 영혼도 순결하게 지켰던 요셉과 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세속적인 성탄 문화를, 성경적인 경건한 성탄 문화로 바꾸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순종과 헌신의 여인 - 마리아
자! 이제,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까요?
첫째, 마리아는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처녀 마리아는 어느 날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뜻밖의 소식이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고서는 임신을 할 수가 없는 법인데, 아직 동정녀인 자신의 몸에 아기가 잉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 과학과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아해하고 놀라워하는데,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눅 1:37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아멘’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만드셨고,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마 24:35 →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사 55:11 →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에 대해서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눅 1:38 →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우리들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성도들이 되어서, 늘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순종과 헌신의 여인이었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동거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사랑하는 약혼자와의 파혼을 의미합니다. 그 사회에서 발붙일 수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의 율법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돌에 맞아 죽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신 22:23∼24 →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잉태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눅 1:41c∼42 →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네! 여자 중에 제일 복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성경 인물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탄생부터 성장,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3일 만에 부활 승천, 이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복된 일을 다 체험한 사람, 오직 한 사람! 마리아뿐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었고, 그 말씀에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가장 저주받은 여자일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가 가장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눔과 묵상
1. 오늘날 부부간의 신뢰와 믿음이 점점 희박해져서 이혼이 보편화되고, 가정의 문제들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중 요셉의 모습을 통해 느낀 바를 나눠봅시다.
2. 이 대림절과 성탄절에 회복해야 할 우리의 경건과 절제의 삶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순종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삶과 비교해서 나의 삶은 어떤지? 이야기해 보고 본인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모스’는 남 왕국 출신으로 BC 8세기경 북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드고아’라는 지역 출신으로, 그의 직업은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농부였습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아모스’의 이름 뜻은 →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자”입니다. 그는 시대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던 선지자였기에 적절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는 불의로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온몸으로 선포한 정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5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 첫째: ‘황충이 모든 풀을 베어 먹는 환상’(암 7:1∼3) 둘째: ‘불이 모든 물을 사르는 환상’(암 7:4∼6) 셋째: ‘다림줄을 드리우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의 환상’(암 7:7∼9) 넷째: ‘여름 실과가 한 광주리에 담긴 모습의 환상’(암 8:1∼2) 다섯째: ‘성전이 무너지는 환상’(암 9:1∼6)입니다. 이 다섯 개의 환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징표들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세 번째인 ‘다림줄 환상’입니다.
1. 기준이 되는 다림줄
‘다림줄’은 건축에서 벽돌을 쌓거나 벽을 세울 때, 수직을 잡아주는 도구입니다. 실 끝에 무겁고 뾰족한 추를 달아서 중력의 법칙을 이용하여 정확히 수직을 잡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다림줄>
<레이저 레벨기>
이 다림줄에 맞추어 담을 쌓아야! 견고하고, 무너지지 않고, 아름답게, 높이, 쌓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은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환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집을 짓는 자’에 종종 비유됩니다.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짓는 집’과 ‘모래 위에 짓는 집’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나,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엡 2:20∼22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삶은! 거룩한 성전의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기초와 모퉁이돌 위에 믿음의 벽돌을 쌓아서,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살림집도 잘 지어야겠지만,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지을 때는, 더더욱 정성을 들여 잘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림줄을 따라 정확하고 반듯하게 벽돌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다림줄이 있음에도 그 줄을 따르지 않고, 내 멋대로 벽돌을 쌓는다면! 결코 튼튼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삐뚤어진 벽돌은 다림줄에 맞추어서 바로 잡아야지, 그대로 놔둔 채 또 다른 벽돌을 쌓게 되면! 결국은 집 전체가 삐뚤어지게 되고, 마침내 허물고 다시 지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건축 기술도 상당히 발전했지만, 그러나 기술만 가지고는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짓는 사람의 인격과 마음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인격, 대충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다림줄의 선을 따르지 않으면, 잘 설계된 건축도면을 갖고 있더라도, 틀림없이 부실한 집, 아름답지 못한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림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다림줄’은 →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의 바르게 서 있는지, 아니면 기울어져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말씀의 다림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기준을! 이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인간적인 판단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판단의 기준은! 스스로는 바르고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 착각이나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 매일 매일의 삶을! 다림줄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확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쌓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마침내 보기에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는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께 칭찬받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개인의 신앙생활도 다림줄에 맞추어야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의 다림줄에 맞추어 자기 인생을 쌓는 것입니다. 좀 튀어나와 있으면 집어넣고, 들어가 있으면 밖으로 내어야 합니다.
조종사들에게는 ‘비행 착각’이라는 ‘착시현상’이 있습니다. 악천후나 야간 비행, 회전 비행, 오랜 시간 비행하다 보면! 감각에 이상이 생겨, 자신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착시현상은! 바다 위를 비행할 때,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하여,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가 하늘처럼 보여,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고 거꾸로 날아가는 현상입니다. 자신은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항공기의 추락이 대부분 이런 비행 착각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런 때의 기본 수칙은! 자기의 감각보다 계기판을 보고 계기판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앉아 있을 때, 옆 차가 앞으로 가면 순간 내 차가 뒤로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내 감각을 신뢰해서는 안 되고, 바깥의 고정물체나 계기판을 신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깊은 산속이나 사막에서 나침반을 신뢰하고 가야지, 자기 육감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벽돌을 쌓아야지 여기에서 틀어지면 튼튼하게 쌓을 수도 없고, 높이 쌓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이 건강하고 튼튼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의 다림줄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하는 것이 ‘경건 훈련’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므로! 자기라는 기초를 바로 세워가고, 기도로 다림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살펴서 바로 세워야, 그 위에 크고 든든하고 아름다운 인격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3. 공의롭고 동시에 사랑이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도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의의 다림줄’입니다. 권력자들은 이 정의의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아모스가 다림줄을 띄워놓고 보니, 이스라엘이라는 건물이! 기울어도 한참 기울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 상태 그대로 두면 무너질 것이니까, 다시 쌓던지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자들이 공의를 싫어하는 것은, 자기가 현재 잡고 있는 권력과, 그 편리함을 잃어버리기 싫어서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그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높이 쌓을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런 정의의 다림줄을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은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소리가 듣기 싫다고 억눌러 놓으면! 사회는 한순간에 망하거나, 구부러져 왜곡되어 발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다림줄에 맞추어, 쌓은 담을 측량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 담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패역한 상태임을 명백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암 7:8∼9 →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오늘 우리 시대도 하나님의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인 성장을 높이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볼 때 기울어져 있으면 어느 순간 우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계기판이요, 다림줄입니다. 이 다림줄에 맞추어 내 인생을 설계하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사업을 운영함으로! 반듯하고 건강하고 높이 쌓을 수 있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 시민 중 25세 미만의 사람들의 사고에 달려있다.” 이 말에 빗대어 보면!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장래는! 교회학교에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장래도! 역시 청소년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는 신앙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부모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했다면 이 시간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자녀교육에 하나님의 다림줄을 대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삐뚤어져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다음 세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주의 자녀들로 세워져서, 공의와 사랑이 펼쳐진 복된 나라를 일으키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인생의 집을 짓는 자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나눠봅시다.
2.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므로 자기라는 기초를 바로 세워가고, 기도로 다림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경건훈련’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에게 맡기신 ‘창조세계보전’의 사명과 과제를, ‘더 늦기 전에’라는 시급성에 비추어서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나눠봅시다.
제목: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8∼14)
1. 몹시 무서워한 목자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천사가 한밤중에 베들레헴의 목동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눅 2:9 →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그러자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고 합니다. 눅 2:10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얼핏 생각하면! 천사가 나타나고, 그를 보면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목자들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목자들은 거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강해 보이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목자들의 내면에는 숨겨져 있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 나는 이 힘든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나의 미래는 무엇인가?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으로 다인가?” ① 감춰져 있던 ‘삶의 두려움’이 환한 빛과 함께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이 무서워한 이유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② 빛 앞에 드러난 자신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두려움’의 이유를! ‘죄의 결과, 즉 하나님과 단절되고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뿌리 뽑힌 나무는 잠시는 살겠지만, 결국은 말라 죽게 됩니다. 물 밖에 나온 고기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단절되고 소외된 결과는 ‘죽음’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지냈습니다. 아무런 부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십니다. 창 3:9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자 뭐라고 대답합니까? 창 3:10b →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두려움’입니다.
즉 그 ‘두려움’은! 말씀을 지키지 않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결과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은 크게 2가지입니다. →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에 느끼는 ‘단절의 두려움’ ‘심판의 두려움’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는 ‘현실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늘 스스로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와 ‘현실의 벽’ 앞에서 갈등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두려움을 갖고 계십니까? 혹 나는 어떤 두려움도 없다! 하실 분도 있겠지만, 실은 감추어져 있을 뿐,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2.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천사가 나타나서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눅 2:10∼11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헬라어 성경을 보면 ‘보라’라는 말 앞에 ‘왜냐하면’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 “무서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보라! 너희를 위해 ‘구주’가 태어나셨는데 그리스도 ‘주’시기 때문이라.” (헬)
여기서 천사가 → ‘구주(Saviour)’와 ‘주(the Lord)’를 구분하여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 두 단어 속에,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두려움을 해결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① ‘구주’는 ‘구원자’ Saviour란 말입니다. → 우리의 ‘죗값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망이라는 죗값을 치러야 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을 어린 양으로 구주가 오셨으니, 이제 더 이상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는 회복되고, 다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단절의 두려움’ ‘심판의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② ‘주’라는 말은 the Lord ‘왕’이란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왕’으로(‘주인’으로) 오셔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 됨’에서 오는 책임질 수 없는 ‘현실의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왕이다!” 참 멋진 말인 것 같지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힘은 참으로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날마다 느끼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왕’으로 오셔서 그분이 내 삶을 다스리고 이끌어 주실 것이니! ‘어떻게 살아갈까?’ 염려하고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눅 2: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성도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 “① 예수님이 나의 죄를 해결하신 ‘구세주’가 되셨고 ② 내 삶의 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죽음의 두려움’과 & ‘생활의 염려’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다 끝난 것 같고 다 해결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질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의 세상의 현실은 결코 이상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 2장 1절에 보면, ‘아구스도’라는 로마 황제가 나옵니다. 눅 2:1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그가 누구냐 하면, 로마 제국의 최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자신의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시이저(Julius Caesar)’를 신(god)으로 선포하고, 자신은 신의 아들(Divi filius, son of a god)로 칭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구스도를 세상의 구주, savior, 세상의 왕이자 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두 명의 구원자요 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하나는, 실제 그 당시 세상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 제국의 황제’인 ‘아구스도!’ 그는 살아 있는 권력자이자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장악하기는커녕 그 당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속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되, 출생할 장소도 없어 냄새나는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입니다.
누가는 이 두 사람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던 그 날 밤에 로마 황제는 ‘왕궁’에서 잠을 자고, 구주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구유’에 누여 있습니다. ‘왕궁’과 ‘구유’의 대비입니다. 지금 누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을 살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와, 찬양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은! 세상의 황제인 아우구스에 비해, 아무 힘 없는 아기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고백하지만! 실상 가끔은, 아니 너무나 자주, 예수님은 그저 구유에 누여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분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갖고 열심히 기도해도, 아우구스로 상징되는 세상의 돈이나 권력의 힘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누가 참된 ‘주님’입니까?
3. 누가 참된 주님인가?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 등록을 명령하여 제국 내 모든 백성들을 다 움직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무조건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필 마리아의 임신 말기에 이런 칙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권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 권력과 통제에 힘없이 당하고 있는 유약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은 세상의 현실이 그러니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은! 누가? 진정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누가는 괜히 아우구스 황제의 호적 등록 사건을 2장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 황제의 칙령은 오히려 700년 전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성취하는 도구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호적 명령을 통해,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면서 예수님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 곧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세상을 통제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이 로마 황제를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오실 메시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 9:6b →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구유에 누워있다고 해서 그가 힘없는 한 아기가 아닙니다. 그는 기묘하고 놀라운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주님(the Lord)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믿는 자는 두려움에 빠져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로마 황제가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해도, 결국 300년 후 로마 제국 전체가 기독교화됩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죽였어도, 믿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처형해서 죽이므로 자기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그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때로 우리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예수를 믿는 나에게 벌어져도 주님의 주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의 현실이지만, 기묘한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의 통치는! 느린 것 같지만 완벽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참된 평강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무서워하지 마십시다. 자녀도, 정치도, 건강도, 우리의 미래도! 다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으시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담대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현재 여러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가장 든든하다고 믿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성경은 힘없는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복음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나의 죄를 해결하신 구세주 되셨고, 내 삶의 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왕 되셨 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고백을 나눠봅시다.
제목: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수 24:14∼21)
1.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복 ‘선택의 자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선택의 자유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은 전혀 달라집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자신의 고별 설교에서 이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의 문화는! 굉장히 음란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문화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농경문화의 특성상, 풍요의 신이 그 땅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을 정복하게 하셨지만, 그 땅의 문화와 종교에 물들지 않도록 계속 경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받은 축복을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빼앗길지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자주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섬기다’라는 동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누구를 섬길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가질 것을 여호수아가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섬기고 사는가?’ 이것은 ‘운명을 가르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자신의 ‘선택과 결단’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 24:15b →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선택과 결정은! 우리 ‘마음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마음의 태도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여 있을 때! 하나님은 변치 않고 계속 이어지는 ‘참된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성도 여러분!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선명하게 선택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 24:15b →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기 ‘오직’이라는 표현은! 타협이나 중간 지점이 없는 절대적 신앙, 절대적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9절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수 24:19 →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이 말은 성경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표현으로, 하나님은! 다른 신들에 대해서 타협의 여지를 허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네! 언제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쉽게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빨리 세상에 영향을 받고, 말씀의 기준을 떠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섬길 것인지?’ 그 선택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해서 복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2가지 단계를 잘 거쳐야 합니다.
① 우리의 선택이 ‘당장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일수록 함부로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포장과 겉이 화려하다고 그냥 집어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내용물이 충실한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맛이 달콤하다고 건강에 유익한지 아닌지를 생각지 않고 그냥 먹어서는 안 됩니다. 들어간 첨가물이 몸에 해롭지는 않은지 따져보고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여러 신’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한번 잘 따져봐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바른 신인지? 아니면 여기 가나안의 우상 신들, 아모리 족속의 신이던지, 그 대상을 자세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잘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촉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백성들 가운데, 이방신들에게 유혹받고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에 백성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16절입니다. 수 24:16 →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반가운 화답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백성들의 이 결단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바로 그다음 세대에서 아주 빠르게 영적인 어둠에 휩싸이고 맙니다. 그 결과, 사사기의 이스라엘에는 영적 혼란기-영적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그 당시의 각오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의 화려함과, 맛의 달콤함의 유혹 또한 컸고, 그것을 분별할 영적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선택을 하므로, 한 시대가 가기도 전에 옆으로 빠지고 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vs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다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당장의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의 탐스러움이 선택의 기준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기초한 선택을 한 것이 다릅니다. 자! 아브라함을 보십시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인생의 가장 크고 놀라운 복이며 열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인간인지라, 아들 이삭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십니다. 창 22:2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독자”라고 하신 말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지금 아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자기가 받은 ‘복’을 붙든 것이 아니라,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손을 들어 칼로 내려치는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막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 22:16∼18 →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여기서 다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삭을 일러 ‘아들’ ‘독자’라는 단어 대신, ‘씨’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로 “씨로 말미암은 축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얻게 된 ‘열매’는 지금 내가 ‘당장’ 먹고 누릴 수 있는 ‘양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면 그것은 ‘영원한’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양식’은 한 번 먹어 버리고 나면 없어지지만, ‘씨’는 또 다른 많은 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양식은 일시적으로 내게 기쁨을 주지만, 씨는 영원히 내게 기쁨이 되고 복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열매를 ‘양식’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씨’로 삼을 것인지는 각 개인의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가치관이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선택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인 선택을 통하여 영적으로 ‘다른 세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서, ‘당장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우리의 선택은, 뚜렷한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선택은 행동에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말은, 다른 신들에 대해서 등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택은 언제나 다른 한쪽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여호와를 선택한다는 것은, 수많은 다른 신들의 유혹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귀고 있다면, 다른 이성적인 관계는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와 깨끗이 결별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도 가나안으로 가져오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도 함께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와 다른 신은 공존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출 20:3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일직선으로 뻗어있는가? 아니면 마음이 나누어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은! 다른 모든 신들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오직 하나님 그 한 분만을 사랑하겠다는, 의도적인 고백과 함께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와야 합니다.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24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늘 여호수아도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애매한 선택은 비굴함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온도는 ‘미지근한 것’입니다. 적당주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그런 것은 그렇다고, 정확하고 올곧게 선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 선명한 기준! “나는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이 절대적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세속화에 물들지 않고 승리하셔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가정 속에 넘쳐흐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선택과 결단을 잘못하여 겪은 인생의 어려움이나 손해가 있었다면 나눠보시고, 특별히 신앙적인 선택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복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주신 복을 붙들고 즐기느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개인의 경험이나,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반복되지 않을 결단도 나눠봅시다.
3.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입니다. 신앙의 위협을 받고 타협하게 하는 유혹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혹 아무런 위협이나 갈등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지 나눠봅시다.
제목: 실수도 품어주시는 하나님 (수 20:1∼6)
1. 땅 분배와 제외 된 레위인, 그리고 여섯 개의 도피성
지난주일 말씀대로 ‘갈렙’이 자청하여 모두가 싫어하는 땅인 험한 산지 ‘헤브론 지역’을 분배받음으로써, 땅 분배 문제는 갈등 없이 풀렸습니다. 마침내, 열두 지파에게 각각 땅이 다 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성막을 돌보는 직임과 책임을 맡은 레위 지파에게는 따로 땅을 분배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각 지파들이 분배받은 땅에서 각각 4개씩의 작은 주거지를 레위 지파에게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 속에 흩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특별한 삶에는! 언제나 제약이 따르고 불편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레위 지파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참 불행한 삶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시고 택하신 제사장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를 →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레위 지파처럼 살아야 합니다. 소금처럼 나를 희생하여 세상 속에 스며들어 맛을 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즉, 성도는 섬김과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녹여서 세상 사람들이 바르게 살도록 인도하는 향도 역할을 하는 사명자들인 것입니다.
12지파에서 각각 4개의 성읍을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총 48개의 성읍인데, 그중에 42개의 성읍에는 레위인들이 살고, 나머지 6개의 성읍은 레위인들이 관리하되 특별한 용도로 지정해 주셨습니다. 바로, ‘도피성’으로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도피성(逃避城, City of Refuge)이란? →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fl;q]m ry[])인데, ‘받아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즉 문자 그대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받아들여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읍이, 곧 도피성인 것입니다.
이 도피성에 관한 성경 말씀을 두루 살펴보면 → ① 요단강 양편에 각각 세 군데 씩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도피성’ 사이의 거리가 거의 균형을 이룰 정도로, 등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 도피성의 위치는! 가나안 땅 어디서나 쉽게 몸을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즉, 가나안땅 어느 곳에서든 하루 안에 당도할 수 있는 약 40㎞ 내외에 선정되었습니다. ② 이들 도피성 방향으로는 곧고 넓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고, 연말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나와서 이 길을 보수해야만 했습니다. ③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목 요소요소에 ‘도피성 ⇨’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2. 도피성을 주신 이유
→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주신 것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즉, 비고의적(非故意的)인 살인자, 즉 과실치사자(過失致死者)의 경우 이곳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에 제사장이나 성읍의 장로들이 판단해 보건대, 악랄하고 고의적인 살인자는 비록 도피성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공개 처형시킴으로써 심판의 준엄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통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 생명과 관계된 ‘죄’에 대해서, ‘성경적인 원리’는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연좌제’는 금지다. - 하나님은 가장 가까운 아버지와 아들이라도 그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셨습니다. 겔 18:20 →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나님은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시고, 연대책임을 지는 ‘연좌제’는 인정치 않으신 것입니다. 이 같은 규정을 통하여, 죄지은 사람 그 당사자 외에 억울하게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게 하셨고, 복수가 계속되는 일을 막으신 것입니다.
2. 고의로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 그러면 어떤 자가 고의로 살인을 저지를 자인가? 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흉기나 도구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민 35:16~18 →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그는 살인자니,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그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둘째, 미워하는 마음이나 악의를 가지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민 35:20∼21 →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 죽이면, 그 친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살인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인 살인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3. ‘부지중에’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겐 기회를 주라. - 하나님께서는 의도성이 없는 살인에 대해서는 도피성으로 피해서 복수자로부터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수 20:3 →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실수로라도 사람이 죽으면, 그 죽은 당사자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은 분이 끓어오르고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되겠죠! 그러면 자기 가족이나 친척을 죽인 그 ‘과실치사자’를 또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인’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도피성’이라는 피난처인 것입니다.
3. 도피성의 영적 의미
1. 반드시 죄의 고백, 회개가 필요하다. 수 24:4 →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이 말씀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할 때, 도피성 문 입구에 서서 도피성의 장로들에게 사건의 내막을 상세하게 설명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도피성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죄 사함받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낱낱이 고백해야 하는 것’과 ‘도피성의 목적’과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회개’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우리에게 죄 용서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 우리 스스로 죄를 극복하려는 능동적인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죗값으로 사망에 빠질 수도 있고, 용서받고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이 넓고, 언제든지 죄인이 찾아올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고, 도피성의 장로들이 기다리고 있어도, 죄인이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죄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넓고 깊어도! 심지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하셨어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입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부지 중에 지은 죄라도 뉘우치고 근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수 24:6 →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는 그에게 보복하려는 자들로부터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부지중 살인한 자의 거주를 제한함으로써 그로하여금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근신하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죄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실수였다고 할지라도 피해자는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도피성’은 ⇨ 용서를 위한 ‘자비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죗값을 몸으로 갚는 ‘공의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과실에 의한 살인이라고 해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한 자가 아무런 제약도 없이 활보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살인자의 주거를 제한함으로써 살인자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근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도피성 제도에 나타난 정신을 마음에 새겨, 실수하지 않도록 신중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되, 혹 실수를 범했을 때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속죄하며 철저하게 근신해야 합니다. 또한, 피해 당사자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생각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저 실수였다고 핑계 대며,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실수도 품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냥 말로 ‘네 죄를 용서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주어 죽게 하심으로 죗값을 친히 치루셨습니다. 값비싼 댓가로 얻은 용서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 깊이 새기고, 바르고 진실하게 살기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는 세상을 섬기는 레위인이요 제사장으로서, 그 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 나눠보고, 새 결심을 가집시다.
2. ‘회개’와 ‘용서’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나눠보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스스로 너무 관대하지는 않았는지, 반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냉혹하지 않았는지? 십자가를 생각하며 나눠봅시다.
3. 세상이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도피성의 뜻이 죄인도 ‘받아들이는 곳’임과 같이, 우리 사회가 생각을 달리 하는 상대를 받아들이는 성숙함 있도록 기도합시다.
제목: 갈렙의 신앙유산을 본받아! (수 14:6∼15)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주인공 갈렙은, 그 이름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구체적인 삶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20세 이상으로 출애굽 한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더불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유이(唯二)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가려져서, 갈렙은 그 공적에 비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정말 아름다운 신앙유산을 남긴 위대한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갈렙을 본으로 삼아, 우리 자신들의 믿음도 위대해지고, 나아가서는 후손들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은, 아직 가나안 땅 정복이 끝나지 않은 상태지만, 여호수아가 나이가 너무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땅을 분배하는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어 순서를 바꿔서! 먼저 땅을 분배하고, 분배받은 땅을 각 지파별로 정복해 가는 방법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어떤 지파도, 분배받길 원치 않는 땅이 있었습니다. 그 땅은 바로 높은 산악지대이며, 크고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거주함으로 인해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헤브론’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은 “제발 저 헤브론만은 우리에게 걸리지 않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사람들보다 스무 살 이상 많고, 가나안 정복에 공을 많이 세운 갈렙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 14:6∼9 요약 →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나는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열두 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여호수아와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지도자 모세는,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 다음에 이어지는 갈렙의 말이 어떤 말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십니까? 상황으로 보아 “나는 공로가 많은 사람이니, 좋은 땅, 내가 원하는 땅을 차지할 권리와 자격이 있소!” 이렇게 말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갈렙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수 14:12 → “저 헤브론 산지를 나와 우리 지파에게 주시오. 그곳에는 아낙 자손들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렇게 갈렙이 자청하여 모두가 싫어하는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자! 이 사건을 통해 갈렙이 우리에게 남긴 신앙유산은 어떤 것이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갈렙은 ‘영적인 유산’을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가 발언한 12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수 14:12 →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 갈렙의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후 지금까지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쉬워 45년이지, 이건 ‘일평생’입니다. 갈렙은 ‘과연 이루어질까?’ 하는 꿈과 같은 말씀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자신을 85세까지 살아있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약속과 말씀을 이루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수 14:10 →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과 생명 존재의 이유’는 →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취’였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이유도’ 갈렙과 같기를 바랍니다.
또한, 갈렙이 험한 산지인 헤브론을 달라고 일부러 요청한 것은, 그곳이 ‘영적인 유산’이 서린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 14:12 →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이 이야기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 13:18 →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네! 헤브론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제단을 쌓고 예배드렸던 곳입니다. ▶ 두 구절을 요약하면 → <이 산지 = 헤브론(마므레 상수리 수풀이 있는 곳) = 제단을 쌓았던 곳>
또한, 이 헤브론의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아들 이삭과 리브가 내외, 그리고 손자인 야곱과 레아 내외, 증손자 요셉이 묻힌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조상의 부부와 이스라엘을 번성케 한 요셉이 묻혀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고향’입니다. 당연히 갈렙에게는 ‘헤브론’이 ▸자신의 믿음이 시작된 곳 ▸나의 영적 뿌리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렙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하면, 그곳은 바로 ‘헤브론’이었습니다. 아직 정복되지 않았고, 정복하기도 쉽지 않은 땅이었지만, 그 땅이 가진 영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모두가 회피하는 땅이었지만, 그 땅을 자청하여 요구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 땅은 크고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기에,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영적인 유산이 어린 헤브론에 살고 싶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분명히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갈렙은 헤브론을 그냥 살아갈 땅으로서가 아니라, 그 땅의 영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네! 이렇게 영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유다 지파 ‘갈렙의 후손’에서 ⇨ 다윗이 나왔고 ⇨ 예수님! 메시아가 나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 또한 이렇게 ‘영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시각과 세계관을 후손들에게 남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갈렙은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고난과 어려움과 감당하기 어려운 일, 실패가 찾아오면, 그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위기에 부딪혀도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나갑니다. 갈렙은 이런 건강한 긍정적인 ‘정신적 유산’을 이스라엘 공동체에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수 14:8 →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네! 갈렙과 함께 정탐하러 올라갔던 10명의 정탐꾼들이 얼마나 백성들을 놀래고 두렵게 했던지, 간담이 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케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갈렙은 이렇게 외칩니다. 민 14:9 →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에서도 갈렙은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이런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함께하신 결과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속에서 그는 긍정적인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네! 갈렙은 여든다섯 살이나 먹은 노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젊은이였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건강하고 싱싱한 정신적 담대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네! 갈렙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미친 이런 ‘긍정적인 정신적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래야 합니다. 인생살이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붙들고 살면! 승리할 수 있다”는 간증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갈렙은 ‘섬김의 본’을 보여준 신앙인이었습니다.
사실, 갈렙은 여호수아와 ‘동급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여호수아보다 앞서 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와 신명기를 보면, 갈렙의 이름을 앞세워 ‘갈렙과 여호수아’라고 나온 부분이,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 나온 곳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자기에게 주어진 힘과 영향력을, 여호수아를 세워 주고 섬기는 데 사용했습니다.
지금 갈렙은 다들 힘들어하고, 귀찮아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뒤로 빠지는 일에, ‘험한 산지를 내게 주소서!’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유익하고 이익이 되는 일에는 나섰다가도, 헌신해야 하고 힘든 일에는 전부 뒤로 빠져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는 이 일을 하리라!” 자발적으로 나서고 섬기는 교회라야 든든히 서가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누군가 어려운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우리 교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갈렙처럼 → 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100% 신뢰하는 ‘영적 유산’을 물려줍시다. ②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건강한 정신’을 물려줍시다. ③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섬김의 정신’을 물려줍시다. 그래서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이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이고, 갈렙은 유다 지파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여호수아가 승리한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갈렙이 승리했습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2. 나는 갈렙이 남긴 유산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와닿고 본받아야 하겠다고 생각되십니까? 그 이유와 결심을 나눠봅시다.
3. 꿈마을엘림교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당신은 몇%입니까?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김의 자리에 자원합시다.
제목: 거룩한 부담감 (신 15:7∼11)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담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이름으로, 신앙 안에서 부담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부담감을 저는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과 생각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심령의 두드림이요 노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감동대로 따를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에게도 이런 두드림과 노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거부하지 마시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신 15:7a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는 곳에 가난한 이웃이 함께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1. 움켜쥐지 말고 펴라.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 15:7b∼8 →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아멘. 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보면, 마음을 닫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아낌없이 넉넉하게 도와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반드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8, 10, 11절입니다. 그리고 이 ‘반드시’라는 말과 이어지는 말은 ‘펴라’ ‘주라’는 말입니다. 이 ‘주라, 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파타흐’인데, 이것은 가난한 이웃을 보거든 반드시 손을 펴고,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내 주는 그런 행동을 하라고 강조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움켜쥐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티크포츠’인데 이것은 ‘끌어모은다, 닫아버린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하여 마음을 닫고, 지갑을 닫고, 오로지 자기 욕심만을 위해 끌어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파타흐, 즉 여는 일, 펴는 일을 꼭 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반드시, 그리고 넉넉히 손을 펴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신 15:10 →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렇습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풍성하게 베푸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베푸는 자에게 넉넉함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이 말했습니다. → “진정한 부자는 많이 소유한 자가 아니라, 많이 나누는 자다.” 그리고 → “혼자 행복한 사람은 슬픈 사람이며, 진정한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하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두 성경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행 20:35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눅 6:38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 두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남을 돕는 것은, 결국 자기를 돕는 일이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면제하고 탕감해 주라.
여러분은 성경의 ‘안식년 제도’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 안식하듯이, 여섯 해가 지나고 일곱째 되는 해에는 안식년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신명기에서는 그 안식년을 ‘면제년’이라는 말로 바꿔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안식년이 되면 그동안 빚진 자들의 ‘모든 채무를 다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쉽게 지켜지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자들은 면제년 제도 때문에, 남에게 주었던 빚을 면제년이 다가오기 전에 다 갚게 하려고 강압적으로 채무를 이행케 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꾸어주거나 돕는 일을 회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 15:9 →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반면에, 면제년의 은혜! 빚을 면제하고 탕감해 주면, 대신 하나님께서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조금 길지만, 함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신 15:1∼6 →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면제년의 은혜를 베풀면 그 구제, 그 나눔, 그 섬김에 대해서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명령을 그대로 지키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4절 말씀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행하면”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을 뒤로하고, 세상적인 원리와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보라.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베풀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6절 → “꾸어주는 인생이 될지언정, 꾸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해주겠다.” 10절 →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을 주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힘들어도 이웃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은 풍성함으로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긍휼’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자비와 양선’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구제, 나눔, 섬김’은 주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면제와 탕감의 계명은 지키기가 쉽지 않은 계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값없이 모든 죄를 탕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 ‘나 자신이 탕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이 있다면, 이 탕감의 계명도 결코 어려운 계명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이웃에게 탕감의 은혜를 베풀면,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대신 주시마고 약속하신 풍성한 복이 있으니, 즐거움으로 면제하고 탕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는 행복을 알라.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행 20:35 →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성도 여러분! 받는 것은 복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복은 다 ‘받는 것’입니다. 물질, 건강, 사업, 자녀, 성공, 명예, 출세, 이런 모든 것들은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받는 복’이 다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복’이 받는 것이라면, 그러면 ‘행복’은 무엇입니까? 행복은 주는 것입니다. / ‘복’이 소유하는 것이라면, ‘행복’은 감사하고 베푸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과 행복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복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절대적입니다. 물질, 명예, 자녀, 건강의 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복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많이 소유했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받은 복 때문에 오히려 불행하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버는 복은 받았으나, 그 돈으로 인하여 인격이 병들고 가정이 불행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과 권세를 가지는 복은 받았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타락하여 비참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복이 세상적인 것이라면, 행복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복은 인격과 관계없이 옵니다. 악한 사람도 출세하고, 성공하고, 높은 위치에 오르고, 사업이 번창하고,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다릅니다. 행복은 반드시 인격과 비례합니다. 돈을 버는 데는 인격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만, 돈을 값어치 있게 쓰는 데는 반드시 성숙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술집에서 호기로 많은 팁을 주는 것과, 의미 있는 일을 위해 기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가슴으로 세상의 약한 자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될 때, 하나님의 약속도 있습니다. 바로 ‘이로 말미암아’의 약속입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입니까? 우리의 구제와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손이 닿는 모든 일을 복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고 하십니다. 복을 쌓아 놓는 축복의 창고가 아닙니다. 복을 널리 나누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움켜쥐는 자들이 아니라, 사랑의 손을 펴는 사람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면제하고 탕감하는 모험적 사랑을 펼치는 사람들, 그리고 주는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성도와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나눔과 묵상
1. 사해와 갈릴리 호수의 차이점에 대해서 오늘 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고, 내 삶의 가치관과 태도에 있어 바뀌어야 할 것들을 나눠봅시다.
2. 말씀을 통하여 나눈 ‘복’과 ‘행복’의 차이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 것인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나를 향한 질문과 요청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에서 나 중심 으로 변해간다는 신호입니다. 당신의 현재 상태에 대하여, 그리고 결심에 대하여 나눠봅시다.
제목: 여리고성 정복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 (수 6:1∼7, 20∼21)
견고한 성인 여리고와 맞부딪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수 6:2∼5 →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여리고성 함락 작전’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작전에 들어갑니까? 네! 굉장한 작전이었습니다. 희생자 한 명도 없이, 그 강력한 성을 함락시킨!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하나님의 작전’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믿음의 작전’이었습니다. 히 11:30 →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그렇습니다. ‘믿음의 작전’, ‘하나님의 작전’을 통해서, 견고한 성 여리고는 무너졌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작전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여리고를 무너뜨린 하나님의 작전
첫째, 성벽을 둘러싸라!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꿈쩍도 안 할 태산 같은 문제 덩어리인 여리고 성을 둘러싸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장정 60만 명이 성을 에워싸 돌았으니, 성은 완전히 둘러싸인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6일 동안 그렇게 둘러쌌습니다. 무너져 내릴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여리고 성을 둘러쌌습니다.
우리에게도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내 능력 밖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로, 인내로, 믿음으로 그 아픔을, 문제를 감싸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팽개치려고 하지 말고, 그 아픔까지 내 안에 품어버리시길 바랍니다.
마치 진주조개가 고통을 주는 이물질을 내뱉지 않고, 자기 몸의 진액으로 그 상처를 감싸고 감싸서, 마침내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 내듯이! 삶의 어려움과 고통, 문제를 신앙으로 감싸고 감쌀 때, 마침내 그것은 도리어 내 삶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간증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성벽을 감싸 돌며, 인간적인 소리를 멈추라.
완전 ‘침묵시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전략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략으로 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말, 인간의 경험과 지혜에 근거한 것은,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말들은 도리어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보면, 막상 게임에 임해 있는 사람은 볼 수 없는 수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기가 막히게 훈수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임에 임하고 있는 당사자는 긴장해서 상황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반면,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훈수를 잘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훈수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만 고집한다면! 결코, 게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훈수도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훈수를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인생의 큰 문제 앞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 “이것이 적어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너희 주장을 내려놓아라. 인간적인 말을 하지 말아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작전, 하나님의 일엔! 하나님의 견해와 생각이 제일 중요합니다. 금년 한 해, 인간의 생각이나 지혜는 침묵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언약궤를 메고 가라.
언약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궤! 그 ‘말씀’을 붙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도 이 ‘말씀’이 없이 나아간다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 비결은! 확실한 약속의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금년에 결심하신 대로 성경통독, 암송, 필사를 계속해 나가십시오.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어려울 때일수록!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붙드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에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나팔을 불라!
여기 ‘나팔 소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만나 주시는 시내산 장면을 보면! 큰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 19:17∼19 →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문제를 그냥 감싸고 있는 것만으론 불완전합니다.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 결국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이다.” 이렇게 외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 목소리를 하나님도 들으시고 원수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잠 3:6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믿음의 선포로 여러분의 인생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결정적일 때 큰 목소리로 외치라.
뭐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라고 했을까요? “할렐루야!” “아멘!” “주여!” … 정확히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여호와께서 이 성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이렇게 신앙의 확신을 외치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수 6:20 →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문제 앞에서도 우물쭈물하지 말고 외칩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크게 외칩시다!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선포하십시오! 자기가 누구인지,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 분명히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가로막고 있는 견고한 여리고 성과 같은 문제가, 무너지고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작전대로 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철옹성인 여리고 성이 단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온전히 순종했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리고 성을 발굴했던 고고학자들은 한결같이 여리고 성은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지진은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으킨 지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성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장 바로 앞인 여호수아 5장입니다. 수 5:13∼14 →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싸고돌기 전부터, 이미 그곳에 하나님의 군대가 와 있었던 것입니다. 네! 하나님의 작전에 따라,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때, 그들도 같이 움직였고, 나팔 불며 소리지를 때, 그들도 함께 외쳐 결정적인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여리고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여호와의 군대가 이미 나를 도우려 도착하여 역사하고 있음을 믿고, 말씀대로 따라 사십시오. 그리할 때 견고한 여리고는 무너질 것입니다. 스가랴서의 말씀입니다. 슥 4:6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도 여러분!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있는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들이 우리 앞에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네! ‘하나님의 성령’!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힘의 원천입니다. 이 성령의 힘이! 큰 산이건, 견고한 여리고성이건 다 무너뜨릴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 성령의 힘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모든 견고한 여리고를 무너뜨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매일 한 바퀴씩 여리고를 돌라는 명령은,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라는 교훈입니다. 나의 매일 경건생활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나눠보고 서로 격려합시다.
2. 부정적인 사람일수록 불평을 잘하고, 성숙한 신앙인일수록 묵묵히 침묵 정진할 줄 압니다. 신앙은 바로 ‘언어훈련’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지금 내가 무너뜨려야 할 가장 큰 외적, 내적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느끼고 깨닫고 결심한 바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제목: 세 가지 동사, 세 가지 약속! (수 1:1∼9)
1. 2025년 희년을 맞아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일정들:
① 1/19 창립 50주년 기념일 ② 2/23 창립 50주년 기념예배 및 장로 은퇴 및 임직예식 ③ 5/4∼5 30·40 캠프(교회학교와 함께) ④ 5/25 창립 50주년 기념음악회(부천시민회관) ⑤ 6/1, 12/7 성경암송예배 ⑥ 6/15 홈커밍데이1(원로목사님), 6/22 홈커밍데이2(제가 목회하는 동안에 신앙생활 하셨던 분들 – 성도 여러분이 연락하셔야 합니다.) ⑦ 6/29 성경퀴즈대회(모세오경) 11/23 (4복음서) ⑧ 8/15∼16 50·70 리트릿 ⑨ 9/7∼ 사마리안 퍼스(선교지에 선물 상자 보내기) ⑩ 9/28∼한달, 전도초청(새생명 전도축제) ⑪ 11월 중 실업인선교회 주관 해외선교지 방문 ⑫ 희년 기념사업으로 (개안수술 지원, 선교지 태양광발전소 설치 혹은 도서관 트럭 봉헌, 강화 교동에 평화통일 기도교회 건립 지원)
2. 개인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룬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시상계획
① 개근상: 주일 52주(현장 만) ② 성경암송: 400구절(송신후 학생 백만원 상금/ 그러나 그것은 첫 번째 암송자여서! ③ 성경필사: 신구약 전체(언제 시작했던지, 금년에 제출하시면!) ④ 성경통독: 1회 이상 /최다독 ⑤ 전 도: 등록 및 5주 새가족교육 마치고 속회와 선교회 배치까지 하게 하면!
지난 40년간 이스라엘을 이끌어왔던 영도자 모세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큰 손실이고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힘들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낙심하고 주저앉아 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지명하셨습니다.
새로운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된 여호수아는 물론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형통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상황은 무척 어렵고, 짐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향한 힘찬 행진을 시작합니다.
기독교 정신은 가만히 앉아서 묵상하거나 명상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가지 동사입니다. 수 1:2 →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1. 일어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동사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죽었다고 힘없이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라고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신앙입니다. 성경에 ‘일어나라’는 말이 618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났습니다. 다리 저는 자도 일어났고, 앉은뱅이도 일어났고, 절망의 자리에서도 일어났고, 죽었다가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어서 침상에 누워있는 어린아이에게 “소녀야! 청년아! 나사로야! 일어나라. “달리다굼” 하심으로 일으켜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 문을 열고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도! 좌절과 낙담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성전 입구에서 앉은뱅이로 구걸하던 사람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행 3:6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자 40살이 넘도록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그가 베드로와 요한의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설 때,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오그라졌던 다리가 쭉 펴져,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님들! “밟히면서도 노랗게 피어나는 민들레와 같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 어떤 역경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도약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동사는! 요단강을 건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홍해를 건넌 것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도약’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3장을 보면,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을 건너는 데 강물이 가장 범람하는 시기에 강을 건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수 3:14∼15 →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강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그동안 40년이나 방황케 하셨던 하나님이, 왜 하필 가장 건너기 힘들 때를 골라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위하여 또 다른 ‘영적 도약’을 체험케 하기 위함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스스로 정해 놓은 선을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속회, 선교회에 참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주일예배로 너무 충분해! 난 새벽엔 죽어도 못 일어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없습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상 받을 여러 가지 일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한계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도전과 도약의 믿음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물이 펄펄 끓기 위해서 1도만 높이면 되듯이, 한계는 도약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전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동사는, 앞을 향해 계속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멈추지 말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목적지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애굽 쪽을 바라보지도 말고, 광야에 머물러 불필요한 고생도 하지 말고, 축복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뚜렷한 목적을 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미래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네 발로 ‘밟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북쪽 헐몬산의 눈이 녹아내리고, 또 우기와 홍수 철이라서 강물이 가장 많고, 요단강 폭이 가장 넓을 때이지만 앞으로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땅 짚고는 누가 헤엄을 못 치겠습니까? 신앙이란! 모험이고 도전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어려울수록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모험적 신앙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 축복을 약속합니다.
첫째, 주리라.
수 1:3∼4 →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두려움과 낙담의 자리에서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시겠다’는 말씀을 2천 번 이상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함께 하리라.
수 1:5 →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여호수아)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을!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에, 더욱 함께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더욱 함께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형통하리라.
수 1:7∼8 →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기 ‘형통한다’는 말은 ‘성사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내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사시켜주시는 형통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형통’이라는 말을 75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를 위해 성공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2025년을 출발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 형통한 삶의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희년 프로그램 일정 중에 ‘기대되고, 꼭 참석하리라!’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나눠보고, 속회 단위로 함께 할 계획을 세워봅시다.
2. 2025년에 상 받을 여러 가지 일들을 제시해 드렸습니다. ‘나도 도전해 보리라’ 마음먹은 신앙 성장·성숙의 일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세 가지 동사’와 ‘세 가지 약속’을 열거해 보고, 그중 본인에게 가장 도전이 되고 힘이 되는 내용은 무엇 인지 나눠봅시다.
하나님께 복 받는 교회와 성도! (시 115:3∼15)
오늘 본문인 시편 115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째 성전을 짓고, 헌당할 때 바쳐진 헌시(獻詩)입니다. 새 성전을 완공하고, 그들이 성전으로 올라갈 때 불렀던 찬양 가사란 말입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 땅에 돌아와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복합적인 이유로, 무려 16년 동안이나 성전 건축이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암울한 때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앞장서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방에서 반대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지금 흉년과 기근과 경제적 불황이 심각한데, 무슨 성전 건축이냐고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더군다나 사마리아 토착민들의 공격까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그들과의 싸움도 버거운데 성전 건축이 말이 되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함께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사기까지 꺾어놓았습니다. 하지만 학개 선지자의 탁월한 영적 지도력에 의해서 성전 건축은 계속 진행됐고,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이때, 오늘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힘차게 선포합니다. 시 115:3 →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마 19:26 →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꿈마을엘림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부족했는데, 하나님께서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50년 전! 복음의 불모지 삼정동에서 땅 한 평도 없어, 시 소유의 공원용지 위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였지만, 오늘의 교회로 부흥 성장케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15절 말씀이 실감 나지 않습니까? 시 115:15 →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복 받은 교회와 성도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결실인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이 ‘아멘!’이신가요? 아멘.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받는 축복을 오늘 성경은 → ‘삼중적으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 115:9∼11절입니다. →
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최대로 축복하실 때, 대개 삼중적으로 반복해서 그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지는 12∼13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12.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13.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성전 건축을 이룬 이스라엘 집, 아론의 집안,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렇게 오늘 성경에서 약속하신 복을! 저와 여러분도 똑같이 누리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세 가지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 보호해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9,10,11 →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기 ‘도움과 방패’라는 말은 ‘보호와 은총’을 뜻합니다.
사실 인생은 모험입니다. 모험이란? 모르고 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모험에는 반드시 위험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호하심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짓는 데는, 많은 위험과 방해가 따랐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힘든데!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공격해왔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성전 짓는 일을 계속할 때! 하나님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생의 보호자’십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여호수아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때, 이들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나아갈 때, 언제나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했던 다윗! 수많은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진을 쳐주셨습니다. 시 34:6∼7 →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불모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때 숱한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박해자들의 암살 계획의 위기 상황에서도, 독사한테 물리더라도, 바다 한복판의 노도 광풍중에서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행 27:24∼25 →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주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를 보호해주십니다. 마 28:20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런 하나님의 ‘보호의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생각해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12∼13 →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정리해주셨습니다. 마 16:23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깊이 생각해주시는 것입니다.
12절에 ‘생각하사 복을 주신다’는 표현은 ‘특별히 깊은(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생각해주신 축복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간증했습니다. ⇨ 시 8:4 → 크게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 40:5 → 많이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 92:5 → 깊이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복’이 임하시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사정을 아시고, 아픔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인생!” 생각만 해도 얼마나 든든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지 못하던 라헬을 생각해주시니까, 태의 문이 열려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고(창 30:22), 또한, 불임여성이었던 한나를 생각하여 주시니까, 사무엘 외에도 자식을 다섯 명이나 더 낳을 수 있었습니다(삼상 1:11). 할렐루야!~ 우리 모두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번창케 해 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14 →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소위 ‘제사장적 축복’(Priestly blessing)입니다. ‘풍성한 축복’(abundant blessing)을 말합니다. 여기 ‘번창’이라는 말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훨씬 능가하는 ‘흥왕’을 뜻합니다(become greater by far than). 아버지 다윗의 헌신의 결과, 아들 솔로몬은 그 누구보다도 창성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전 2:9 →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여 그 어려운 경제 한파 속에서도 성전 건축을 위해 헌신하였더니, 하나님은 번창의 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시 115:14 → “주께서 너희를 번창하게 하여 주시고, 너희의 자손을 번창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것은 없고 생활은 어려웠지만, 학개 선지자의 지도를 따라 성전 건축을 위해 산에 올라가서 나무라도 베어오기 시작했더니! 하나님께서 당장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학 2:19 →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동안 흉년으로 시달리던 그들에게, 당장 풍작의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 시편 115편 15절 말씀과 같은 놀라운 축복을 ‘선언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 115:15 →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다.” 아멘.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사실을 당신은 믿으십니까? 환경과 조건은 불가능 인데! 그렇게 믿고 살아서 받은 개인적인 응답이나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와 성도들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들(교회)입니다. 이에 대한 간증을 나눠봅시다.
3. 우리는 지금 정치 경제적으로 그 어느 해 보다 어려운 때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할지 나눠봅시다.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마 1:18∼25, 눅 1:26∼38)
오늘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믿고 맡길 만한 사람 - 요셉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까요?
첫째, 요셉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셉이 마리아라는 처녀와 약혼을 했는데, 어느 날 약혼자인 마리아가 자기와 상관없는 아이를 뱄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가졌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요셉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마리아! 그녀는 순결한 여인이 아닌가? 그런데 아이를 임신했다니! 의분이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율법이 정한 방법대로 처리하고픈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내가 그렇게 한다면 마리아는?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당할 수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이어져 갔습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요셉은 침착하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베풀기 위해 고민하였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 1:19∼20a →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 ‘생각했다’라는 말은 ‘고민했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한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고민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입장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남의 허물과 약점을 알게 되었을 때, 기가 막힌 말거리를 알게 되었다고 흥분하셨습니까? 아니면 드러내지 않고, 덮어 주려고 깊이 생각하셨습니까?
성경 잠언엔 이렇게 말합니다. 잠 17:9 →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 주려는 요셉의 의로운 마음을! 우리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셉과 같이 거룩한 고민과 침착함, 배려를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관계를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요셉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그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가 낳을 아기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만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이,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입니까? 마리아에 대한 ‘긍휼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마리아에 대한 ‘동정심’ 때문입니까? 물론 긍휼의 마음과 동정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오해를 풀고, 기쁨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이는 일에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천사가 요셉을 설득하는 장면이 20∼23절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은!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마 1:20∼22 →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그러면서 천사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사 7:14(마 1:23)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요셉에게 먹혀들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이 먹혀들어 가는 마음은 복 있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들어 가지 않는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쌓인 사람들, 쓸데없는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을 품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겐 말씀이 먹혀들어 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보세요.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같이 말씀에 대한 수용력이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못 믿을 일을, 요셉은! 주의 사자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요셉은 즉시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결국, 이 믿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셋째, 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마 1:24∼25 →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아내와 동침치 않았습니다. 아내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외경에 의하면, 요셉은 아주 늦장가를 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육신의 욕망을 절제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식 결혼을 하고도 부인과 가까이하지 않는, 인내와 경건의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성결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러한 요셉의 경건을 배우기 위하여 12월 14일부터 성탄일까지 열흘 동안 금식일로 선포하고 매일 한 끼씩 금식하며 주의 오심을 경건하게 맞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사모하여, 몸도 마음도 영혼도 순결하게 지켰던 요셉과 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세속적인 성탄 문화를, 성경적인 경건한 성탄 문화로 바꾸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순종과 헌신의 여인 - 마리아
자! 이제,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까요?
첫째, 마리아는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처녀 마리아는 어느 날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뜻밖의 소식이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고서는 임신을 할 수가 없는 법인데, 아직 동정녀인 자신의 몸에 아기가 잉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 과학과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아해하고 놀라워하는데,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눅 1:37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아멘’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만드셨고,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마 24:35 →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사 55:11 →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에 대해서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눅 1:38 →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우리들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성도들이 되어서, 늘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순종과 헌신의 여인이었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동거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사랑하는 약혼자와의 파혼을 의미합니다. 그 사회에서 발붙일 수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의 율법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돌에 맞아 죽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신 22:23∼24 →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잉태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눅 1:41c∼42 →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네! 여자 중에 제일 복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성경 인물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탄생부터 성장,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3일 만에 부활 승천, 이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복된 일을 다 체험한 사람, 오직 한 사람! 마리아뿐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었고, 그 말씀에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가장 저주받은 여자일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가 가장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눔과 묵상
1. 오늘날 부부간의 신뢰와 믿음이 점점 희박해져서 이혼이 보편화되고, 가정의 문제들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중 요셉의 모습을 통해 느낀 바를 나눠봅시다.
2. 이 대림절과 성탄절에 회복해야 할 우리의 경건과 절제의 삶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순종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삶과 비교해서 나의 삶은 어떤지? 이야기해 보고 본인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더 늦기 전에! (암 7:1∼9)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모스’는 남 왕국 출신으로 BC 8세기경 북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드고아’라는 지역 출신으로, 그의 직업은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농부였습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아모스’의 이름 뜻은 →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자”입니다. 그는 시대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던 선지자였기에 적절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는 불의로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온몸으로 선포한 정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5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 첫째: ‘황충이 모든 풀을 베어 먹는 환상’(암 7:1∼3) 둘째: ‘불이 모든 물을 사르는 환상’(암 7:4∼6) 셋째: ‘다림줄을 드리우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의 환상’(암 7:7∼9) 넷째: ‘여름 실과가 한 광주리에 담긴 모습의 환상’(암 8:1∼2) 다섯째: ‘성전이 무너지는 환상’(암 9:1∼6)입니다. 이 다섯 개의 환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징표들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세 번째인 ‘다림줄 환상’입니다.
1. 기준이 되는 다림줄
‘다림줄’은 건축에서 벽돌을 쌓거나 벽을 세울 때, 수직을 잡아주는 도구입니다. 실 끝에 무겁고 뾰족한 추를 달아서 중력의 법칙을 이용하여 정확히 수직을 잡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레이저 레벨기>
이 다림줄에 맞추어 담을 쌓아야! 견고하고, 무너지지 않고, 아름답게, 높이, 쌓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은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환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집을 짓는 자’에 종종 비유됩니다.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짓는 집’과 ‘모래 위에 짓는 집’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나,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엡 2:20∼22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삶은! 거룩한 성전의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기초와 모퉁이돌 위에 믿음의 벽돌을 쌓아서,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살림집도 잘 지어야겠지만,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지을 때는, 더더욱 정성을 들여 잘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림줄을 따라 정확하고 반듯하게 벽돌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다림줄이 있음에도 그 줄을 따르지 않고, 내 멋대로 벽돌을 쌓는다면! 결코 튼튼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삐뚤어진 벽돌은 다림줄에 맞추어서 바로 잡아야지, 그대로 놔둔 채 또 다른 벽돌을 쌓게 되면! 결국은 집 전체가 삐뚤어지게 되고, 마침내 허물고 다시 지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건축 기술도 상당히 발전했지만, 그러나 기술만 가지고는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짓는 사람의 인격과 마음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인격, 대충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다림줄의 선을 따르지 않으면, 잘 설계된 건축도면을 갖고 있더라도, 틀림없이 부실한 집, 아름답지 못한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림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다림줄’은 →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의 바르게 서 있는지, 아니면 기울어져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말씀의 다림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기준을! 이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인간적인 판단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판단의 기준은! 스스로는 바르고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 착각이나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 매일 매일의 삶을! 다림줄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확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쌓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마침내 보기에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는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께 칭찬받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개인의 신앙생활도 다림줄에 맞추어야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의 다림줄에 맞추어 자기 인생을 쌓는 것입니다. 좀 튀어나와 있으면 집어넣고, 들어가 있으면 밖으로 내어야 합니다.
조종사들에게는 ‘비행 착각’이라는 ‘착시현상’이 있습니다. 악천후나 야간 비행, 회전 비행, 오랜 시간 비행하다 보면! 감각에 이상이 생겨, 자신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착시현상은! 바다 위를 비행할 때,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하여,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가 하늘처럼 보여,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고 거꾸로 날아가는 현상입니다. 자신은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항공기의 추락이 대부분 이런 비행 착각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런 때의 기본 수칙은! 자기의 감각보다 계기판을 보고 계기판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앉아 있을 때, 옆 차가 앞으로 가면 순간 내 차가 뒤로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내 감각을 신뢰해서는 안 되고, 바깥의 고정물체나 계기판을 신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깊은 산속이나 사막에서 나침반을 신뢰하고 가야지, 자기 육감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벽돌을 쌓아야지 여기에서 틀어지면 튼튼하게 쌓을 수도 없고, 높이 쌓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이 건강하고 튼튼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의 다림줄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하는 것이 ‘경건 훈련’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므로! 자기라는 기초를 바로 세워가고, 기도로 다림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살펴서 바로 세워야, 그 위에 크고 든든하고 아름다운 인격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3. 공의롭고 동시에 사랑이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도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의의 다림줄’입니다. 권력자들은 이 정의의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아모스가 다림줄을 띄워놓고 보니, 이스라엘이라는 건물이! 기울어도 한참 기울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 상태 그대로 두면 무너질 것이니까, 다시 쌓던지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자들이 공의를 싫어하는 것은, 자기가 현재 잡고 있는 권력과, 그 편리함을 잃어버리기 싫어서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그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높이 쌓을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런 정의의 다림줄을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은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소리가 듣기 싫다고 억눌러 놓으면! 사회는 한순간에 망하거나, 구부러져 왜곡되어 발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다림줄에 맞추어, 쌓은 담을 측량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 담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패역한 상태임을 명백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암 7:8∼9 →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오늘 우리 시대도 하나님의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인 성장을 높이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볼 때 기울어져 있으면 어느 순간 우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계기판이요, 다림줄입니다. 이 다림줄에 맞추어 내 인생을 설계하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사업을 운영함으로! 반듯하고 건강하고 높이 쌓을 수 있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 시민 중 25세 미만의 사람들의 사고에 달려있다.” 이 말에 빗대어 보면!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장래는! 교회학교에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장래도! 역시 청소년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는 신앙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부모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했다면 이 시간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자녀교육에 하나님의 다림줄을 대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삐뚤어져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다음 세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주의 자녀들로 세워져서, 공의와 사랑이 펼쳐진 복된 나라를 일으키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인생의 집을 짓는 자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나눠봅시다.
2.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므로 자기라는 기초를 바로 세워가고, 기도로 다림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경건훈련’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에게 맡기신 ‘창조세계보전’의 사명과 과제를, ‘더 늦기 전에’라는 시급성에 비추어서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