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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김성윤
2024-04-13
조회 88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의 계명 (신 24:10∼22)

 

오늘 본문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부자에게는 친구도 많고, 가까운 이웃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난하게 되면 친구도 떠나고 이웃도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시며 그들 편에 서주시는 것입니다.

 

1. 가난한 자의 주권과 인권을 존중하고, 그 필요에 민감하라!

10∼11절입니다. 신 24:10∼11 →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즉, 무엇을 꾸어준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네가 직접 원하는 물건을 전당물로 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내어주기까지 밖에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난한 자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서, 그로 부끄럽게 하지 말고, 또한 그의 주권과 인격을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2∼13절을 보면, 그 전당물(담보물)이 ‘옷’이거든, 밤까지 그것을 가지고 있지 말고 그날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에게 귀금속이나 값나가는 물건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당장 입고 사는 옷이라도 담보물로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동지역에서 ‘심라’라 불리는 옷은! 단순히 옷의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밤에 잘 때는 이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 24:13 →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팔레스타인은 사막 기후라 낮에는 살인적으로 덥지만, 해가 떨어지면 급격히 추워집니다. 그러므로 밤에 이 옷이 없으면 추위로 밤을 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녁이 되면 그 전당물을 다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가난한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인정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즉, 너는 오늘 저녁에 그 옷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자는 그 옷이 없으면 제대로 밤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가난하다고 해서 무례하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가난한 자들의 인격과 인권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 자치구엔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되었습니다. 88올림픽을 통하여 잘사는 남한 사회에 대한 소식을 접한 조선족들 사이에 소위 코리안 드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연변을 중심으로 한 조선족자치주에는 200만 명이 넘는 조선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급부상한 한국에 대한 무지갯빛 환상을 따라, 수많은 조선족이 한국으로 몰려왔습니다. 이들 중에는 꿈을 실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국이라고 찾아온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실망과 좌절도 늘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그들의 인식도 바뀌었는데, 한․중 수교 초기에는 한국인을 ⇨ ‘한국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 ‘한국 사람’이라고 호칭이 변했고, 나중에는 ⇨ ‘한국 놈’으로 바뀌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조국으로 여기고 동경하며 찾아왔던 대부분의 조선족 동포들은! 남한 사람들의 냉대와 차별 때문에 실망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조선)인에서 ‘중국인’으로 바꿨습니다. 자녀들도 더는 한국학교에 보내지 않게 되었고, 자연히 한국학교들은 학생들의 급감으로 폐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조선어로 교육하는 소학교가 419개였는데, 코리안드림이 악몽으로 바뀐 10년 뒤엔 1/3인 177개로 줄었고, 중학교는 118개에서 49개로 줄었습니다. 2024년 현재는! 이들 학교 대부분이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는 학교들로 변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긍휼과 인정, 존중과 배려가 없는 사회는, 언제나 사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입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과 긍휼의 언행과 생활에서 더 강하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2. 곤궁한 자를 학대하지 말고, 정당하게 대하라!

신 24:14∼15 →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가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이 말씀은! 가난한 품꾼의 일당은 꼭 해지기 전에 줘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즉 품삯을 그날로 주지 않으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품꾼과 그 가족들이 굶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해지기 전에 즉시 주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가 네게로 돌아간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지금은 정부에서도 업주가 노동자의 품삯을 제때 주지 않으면, 그 벌을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수천 년 전부터 ‘노동청장’과 같은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을 학대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며, 그들이 수고한 대로 품삯을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죄로 정죄하고 큰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구절은! 이것입니다. 신 24:15b →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여러분! 여러분도 직장에서 일해 보셨지만, 일꾼이 일터에서 어떤 때는 자존심이 상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주인이나 상사의 말에 순종하고 꾸역꾸역 일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품삯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아니 꼬아도! 집에 있는 자식들을 생각하고, 다달이 내야 하는 비용들을 생각하면서 꾹 참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은 품삯을 사모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일꾼의 품삯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주지 않으면! 세상 법에도 저촉되지만, 하나님께서도 벌을 내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16절 말씀은 네가 만일 곤궁한 자를 돌아보고, 일한 자에게 정당한 품삯을 제때 주면! 너도 억울하게 죽거나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업주와 근로자 관계에서도 본을 보여야 합니다. 내가 근로자의 입장이라면!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업주의 입장이라면! 적어도 악덕 업주의 명단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업에서도 모범적인 업주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업을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X)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O)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양식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업주는! 나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일용할 양식을 책임진 사람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직원은! 나의 성실과 열심은 내가 속한 업체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 약자를 학대하고 등쳐먹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세워주는 참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을 생각하여 겸손하고, 베풀 줄 알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좀 살게 되었다고 해서 가난한 자들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네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을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 24:18 →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 개구리가 되었다고 올챙이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처구니없는 말이나 일을 행하는 것을 비웃는 속담입니다. 부자가 된 사람 중에는, 가난을 딛고 일어나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는! 자기의 과거 가난했던 삶을 감추려는 의도로, 지금의 부를 더 과시하고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서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살피고 돌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모습은 후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받는 부자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이런 지침을 주셨습니다. 신 24:19∼21 요약 →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한 마디로 싹싹 훑지 말고, 흘리기도 하고, 잊어먹기도 하고, 일부러 밭 한 모퉁이는 베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부자이고,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밥상 밑에 앉은 강아지는! 주인어른보다 어린아이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어른은 밥을 먹을 때, 한 톨도 흘리지 않지만! 어린아이는 먹는 것 보다 흘리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흘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육신적으로 가난한 이웃에 대한 ‘긍휼의 계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더불어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과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긍휼과 인정, 존중과 배려가 없는 사회는! 언제나 사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각자의 경험이나, 들은 바를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에 대하여 나눠봅시다.

 

3.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의 계명’을 받은 자로서, 새로운 마음가짐과 고쳐야겠다는 태도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04-06
조회 97


못 본 체하지 마라 (신 22:1∼4)

 

4월에는 다시 ‘신명기’로 돌아와 4주 동안 → ① 배려의 법 ② 긍휼의 법 ③ 청종의 법 ④ 축복에 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째 시간으로 ‘배려의 법’에 대해서 → “못 본 체하지 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일상은 ‘못 본체’로 가득합니다. 이웃의 어려움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괜히 말려들었다가 자기만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말 가운데! “못 본 체해라!” “괜히 끼어들지 마라.”는 말이 상당한 비중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곤란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도우려다가, 오히려 피해를 보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비용이 발생한다든지, 오해를 받는 등의 피해가 발생하는 게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봐도 못 본 체해야 하는 게, 안전수칙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냥 못 본 체하고 지나쳤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도 기독교적 양심과 내가 목사가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관여했다가 ‘참 힘들다. 짜증 난다. 손해 봤다’라는 생각이 든 경험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해 가난한 목수로 사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나를 못 본 체하셨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주받은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못 본 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못 본 체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못 본 체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 네 원수도 네 형제다. 그에게서 숨지 마라.

오늘 본문은 “못 본 체하지 말라”,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말씀을 3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사랑의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 22:1 → “당신들은 길 잃은 이웃의 소나 양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반드시 끌어다가 그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2절은 조금 더 어렵습니다. 신 22:2 → “또 당신들은 그 이웃이 가까이에 있지 않거나,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해도, 그 짐승을 당신들의 집에 끌어다 두었다가, 그 주인이 찾을 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 그 짐승을 데리고 있으면 비용이 발생합니다. 먹여야 하고, 청소도 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은근슬쩍 가지려고 했던 것 아니냐?’ 이런 오해라도 발생하면!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시간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못 본 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3∼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 22:3∼4 → “나귀도 그렇게 하고, 옷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 밖에도 이웃이 잃은 것이 무엇이든지, 당신들이 발견하거든 그렇게 하고,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이웃의 나귀나 소가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반드시 그 이웃을 도와 그것을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사실! 어떤 설명이나 주석이 필요 없는 매우 실제적인 교훈입니다. 사실 농경사회에서 소나 나귀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생계를 책임지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들이 소나 나귀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할 중요한 수단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동물들도 생명을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는 ‘형제’라는 단어 대신 ‘원수’와 ‘너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넣어서까지 말씀하십니다. 출 23:4~5 → “네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 잃은 것을 보면, 반드시 주인에게 데려다 주어라. 네가 만약 ‘너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이 너무 무거워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면, 거기 그냥 놔두지 말고 반드시 도와 일으켜 주어라.”

성도 여러분! 형제자매라면 도와줄 마음이 생기겠지만! 원수라면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 원수의 어려움까지도 관심 두고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형제’의 범위를 ‘원수’까지 확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확대하여 해석하면 “네 원수도 네 형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거듭나오는 ‘못 본 체하지 마라’는 말을 직역하면 =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 숨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못 본 체한다.”라는 것은 일부러 이웃의 어려움을 회피하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숨깁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남을 돕는 일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자신을 숨기는 성향이 왜 생겼을까요? 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를 따 먹은 이후 인간에게 숨는 성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존재가 되었을 때, 선하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일로부터도 숨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때와 그냥 지나치고 싶어 하는 때를 특별히 주목하십니다. 바로 그때가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 희생해야 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 성숙이란! 바로 그때에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순간! 그때를 놓치지 않고 올바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영적 성숙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웃 간에 점점 담을 높이 쌓고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의 정서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정’이라는 고유한 단어가 있을 정도로, 정의 문화와 정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다운 정서와 문화가 거의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황금만능주의! 맘몬이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면서 도시화 되고 개인주의가 되면서, 마음이 피폐해지고 화석화된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크리스천도 이런 문화 풍조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선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창조하고 선도하며 견인해 가야 할 사명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에게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셨음을 기억하고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못 본 체하고’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이 마음을 굳게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도울 마음이 있어야 보인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물론 실제로 못 봤을 수도 있습니다. 왜 못 봤을까요? 우리 눈에는 들어왔지만, 뇌 속에는 저장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마음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을 닫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나는 못 봤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사의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봐야 돕는 것이 아니라, 도울 마음이 있어야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 이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는 사람은 사랑의 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 3:17 →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못 본 체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눈 감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꼭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자는 다 ‘나만 아는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마음의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숨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작은 일부터 시작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들입니다.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주인에게 돌려주고”, “잃어버린 의복을 찾아주며”,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일으켜 세워 줄 것이며···” 이런 일들을 오늘의 상황으로 바꾸어보면 이런 일들입니다.

“길 잃은 개나 고양이를 보면 주인을 찾아주려고 노력하고, 지하철이나 공원 의자에 놓고 간 휴대폰이나 목도리나 모자를 발견했으면, 파출소나 분실물 센터에 맡기는 수고를 기꺼이 하라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눈길이나 혹은 구덩이에 빠져 헛바퀴만 돌고 있으면 밀어주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진 사람을 보면 일으켜 주고, 노인이 박스를 가득 실은 무거운 손수레를 끌고 가면 뒤에서 밀어주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과 사랑과 보살핌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한 일만을 하길 원하고, 그런 것만 기뻐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일, 평범한 일상 사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똑같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6:10 →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사랑을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에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큰 사랑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웃의 불행과 곤란과 아픔을 외면하고, 못 본체 그냥 지나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의 눈과 마음으로 돌아보고, 배려의 행함을 실천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이웃의 어려움에 못 본 체하면서 방관하고, 마음의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했던 내 삶의 모습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사랑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이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리라!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을 나눠봅시다.

 

3. 기독교가 교회 안의 종교로만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불신자를 포함한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방법과 아이디어를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03-30
조회 63

제목: 부활의 증인으로! (막 16:1∼8)

 

할렐루야! 어둠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성도 여러분과 가정 위에 임하셔서, 어두움과 근심과 질병은 다 물러가고, 밝음과 기쁨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39년 전인 1885년의 4월 5일은 그 해의 부활절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제물포에는 증기선 한 척이 들어왔습니다. 이 배에는 미 감리회에서 파송한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미 북장로회에서 파송한 언더우드 총각 선교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선교사들입니다. 첫 선교사들이 부활절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은 매우 복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제물포에 도착한 즉시, 조선 땅에 도착한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이같이 적었습니다.

→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에 왔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얻게 하소서!” 139년 전의 기도문이지만! 읽을 때마다, 아니 읽을수록! 감동을 주는 기도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 기도를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 “이 땅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아파하는 모든 국민들과 가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빛을 주시옵소서!” 또한 독재와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저 북한 동포들을 위해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 “죽음의 철장을 부수고 다시 사신 주님! 북녘의 동포들을 얽매고 있는 모든 억압의 줄을 끊으시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1. 부활 신앙을 가짐으로, 환경이나 여건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로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막 16:1∼3 →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여기 세 여성이 안식 후 첫날, 바로 주일 새벽에 예수님이 묻힌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세 명의 여성들의 실명을 거론한 것은!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 무지, 무관심, 불신했던 제자들과의 믿음을 비교하려는 성경 기자의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세 여성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부활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막 16:6 → “청년이(천사가)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천사가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니라.” 했는데! ‘여기’는 ‘무덤’이고 ‘죽음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죽음의 자리에 그냥 계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신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제자들의 상황을 보십시오. 사실 제자들은 죽을지언정 끝까지 주님을 따르기로 호언장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모두 다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스스로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예수님이 그동안 보여주셨던 기사와 이적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정작 당신의 목숨이 달린 문제 앞에서는 그냥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예수님을 보고는, 제자들은 큰 실망감으로 그 마음이 떨리고 힘이 빠졌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춥고, 손발이 떨립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과 체력이 떨어져서 몸이 허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활 신앙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죽을까 봐 떨고, 망할까 봐 떠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 신앙’만 확실하다면 떨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작은 체구에 볼품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담대하게 이렇게 외칩니다. 롬 8:35∼39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부활 신앙’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기에, 그 어떤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으면! 걱정과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죽음이 겁날 리가 없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이 계시는데 걱정될 리가 없고,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받고 핍박을 받아도! 힘주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도! ‘부활 신앙’을 확고히 가짐으로,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부활의 소식을 전파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막 16:7 →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가서’란 말은! ⇨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음을 전하라’는 것이고, 또한 ‘제자들을 부르셨고 또한 사명을 맡기셨던 ‘갈릴리’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피멍 든 시체를 향유로 닦으면서, 마음의 아픔과 한을 달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죽음의 권세에 눌려서 실의와 좌절, 비애에 젖어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부활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에게 생명, 용기, 희망을 주는 종교입니다.

세 여인은 죄책감과 실망감으로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진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정말 부활 신앙을 가졌다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 나를 변화시킨 예수, 내 삶을 바꿔준 예수, 인생을 바꿔준 예수, 그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진실로 부활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 가슴에 확실하게 믿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입이 열리게 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직 입은 안 열린다고 하면, 내가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인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안 믿어지면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믿어진다고 하면서도 입은 안 열린다고 하면! 내 믿음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히 믿어지면! 의식적으로라도 입을 열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의 천사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 역시, 빨리 가서 아직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한 가족들에게, 친척들에게, 친구들에게, 이웃들에게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증인이 되라.”고 부탁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세 여인들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사모함과 비교해, 나의 주님을 향한 사랑과 사모함은 몇 점을 줄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2. 어떤 대상에 대해서 진정한 사랑과 믿음을 갖고 있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을, 삶에서 체험 한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예수님께서 주신 대 사명인 ‘전도의 사명’에 대해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03-23
조회 66

제목: 과시가 아니라 헌신으로! (막 12:38∼44)


오늘 말씀은,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헌금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크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1.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매우 크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막 12:41 → “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기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다는 것은, 헌금함의 맞은 편에 앉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헌금함이 잘 보이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가, 그곳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두 가지 ‘동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앉다’라는 동사이고, 두 번째는 ‘보다’라는 동사입니다. 여기 ‘앉다’(카티조, kaqivzw)라는 동사가, 분사 형태로 ‘앉으사’라고 되어 있는 것은, 그냥 일반적으로 앉으신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고 일부러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네!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보실새’라고 표현된, ‘보다’(데오레오, qewrevw)라는 동사 역시, 무언가를 알려고 일부러 관찰하면서 지켜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의 형태는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무리가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을까요?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한가하게 헌금함 맞은 편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런 의도 없이 무리가 헌금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의도적으로 지켜보셨습니다. 즉 무리가 헌금을 드리는 행동 이면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자세, 동기, 이유와 목적들까지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 있던 헌금함의 모양은, 윗부분은 넓고 아랫부분은 좁은, 마치 나팔꽃 모양으로 생긴 헌금함이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드린 헌금을 함부로 손을 넣어서 가져갈 수 없도록 높이도 꽤 높았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드리는 사람은! 손을 위로 들어 헌금함에 넣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관심을 가지고 보면, 헌금자가 어떤 종류의 돈을, 얼마나 드리는지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부자들이 많은 돈을 헌금하는 모습을 주목해서 보셨고, 특히 한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6:21 → “네 물질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우리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물질을 드려, 우리 주님께서 주목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양보다는 질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가난한 과부가 부끄러운 듯, 두 렙돈을 헌금했습니다. ‘렙돈’은 이전 제국이었던 헬라의 화폐로, 당시 로마제국의 ‘고트란트’에 절반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고트란트’는 한 ‘데나리온’의 1/64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오늘날로 치면 약 15만 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이것을 환산해 보면, 두 렙돈은 한 고트란트로 2,500원도 안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2:44 →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여기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라는 표현은! 그녀의 ‘전 재산’, ‘가진 것 전부’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돈을 헌금하고 나면, 이 과부는 뭐라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2:43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객관적으로는 이 과부가 드린 헌금을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양적으로 가장 적은 액수의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장 많이 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보실 때, ‘양’보다는 ‘질’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헌금의 액수보다는, 그 헌금에 담긴 정성과 감사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도 제 마음에 뜨거운 감사로 남아 있는 ‘생활비 전부’를 드린 선교사님과 한 집사님의 헌금 사연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님 중에 한 분이, 두 달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헌금을 ‘리모델링’을 위해 보내오셨습니다. 그 헌금을 보는 순간 저는! 넉넉하게 선교비를 보내 드리지도 못하기에, 매달 근근이 생활할 텐데 “이렇게 큰돈을 헌금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그래서 카톡을 보냈습니다. “혹 생활에 곤란을 겪거나, 아니면 부모님이나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오기를 → “아닙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나도 꼭 함께하고픈 마음이 들어서 보낸 것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받으세요. 제 마음에 정함이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후 9:7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헌금을 얼마만큼 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기준은 없습니다. 그저 ‘각자가 스스로 마음에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헌금을 작정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해서’ 헌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한 이후에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여 인색하게 헌금해서 마음에 찜찜함이 남아서도 안 되고, 혹은 마지못해 헌금하므로 마음이 불편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할 때 우리는 늘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나는 마음을 다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했는가? 헌금한 뒤에 내 마음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가?”… 바라기는 우리 모두, 사랑과 정성의 마음이 들어간 헌금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 자신도 기쁘고 또한 주님께도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돈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생활비 전체를 헌금한 것을 칭찬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헌금한 뒤에 당장 생활비가 한 푼도 없어서, 생계 자체가 곤란할 정도로 헌금했다면 그것은 큰 문제일 텐데, 왜 이런 사람을 칭찬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여성은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사한다거나 일용직 노동자로 일할 수도 없었습니다. 과부의 경우 밭에 남겨진 낟알을 줍거나, 일가친척, 주변의 도움을 받아, 그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부가 비록 적은 돈이지만, 가진 돈 전부를 헌금한 것입니다. 과부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며, ‘자기의 생계를 철저하게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안식일 전날입니다. 과부는 자기의 주머니를 뒤져봅니다. 가진 것이라곤 단지 두 렙돈 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 돈으로 2,500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한참 동안을 만지작거렸을 것입니다. 작은 빵 한 덩어리를 살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내일이 안식일입니다. 성전에 가는 날입니다. 내일 성전에 가면! 비록 작지만, 헌금을 드릴 수 있는 돈입니다. 빵을 살까? 헌금으로 드릴까? 고민 끝에 이 과부는 헌금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안식일 날! 그 두 렙돈을 드린 것이고,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잊지 못할 감동적인 헌금을 드린 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당시 이 집사님은 프리랜서로 일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분들이 바로, 이런 프리랜서 같은 분들입니다. 거의 실직 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몇 달째 제대로 된 수입이 없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보니, 돈이 더욱 소중해지고,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아! 내 형편만 생각하다가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겠구나! 빨리 드려야 되겠다! 돈을 믿고,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 이런 생각이 들어서, 즉시 돈을 찾아 ‘리모델링’ 헌금으로 드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집사님의 두 마디의 말이 제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 첫째는 “자칫 내 형편만 생각하다가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겠구나!” 둘째는 “돈을 믿고,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성도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돈을 더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안 되고, 사업이 흔들리면 믿음도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돈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다 헌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다 헌금을 못 하는 것도 아닙니다. →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헌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렙돈!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바로 돈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네! 우리가 헌금할 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계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내 사업과 일터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내 미래와 노후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 주님이 관심 가지시는 영역들 중에 가장 약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극복하고 온전한 성도가 될 길을 나눠봅시다.


2. “돈을 믿고,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라는 말이, 당신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 지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3.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나, 가장 강하게 마음에 와닿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03-16
조회 99

제목: 여론이 아니라, 진리로! (막 11:27∼33)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제자의 길’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이 아니고,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은! 우리를 ‘진리’와 ‘영생’으로 이끌어 주는 ‘생명의 길’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 여론이란?

사회나 공동체가 잘 유지되려면! 그 구성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민주 사회는 다양한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허용된 사회이고, 그것을 정책과 실행에 잘 반영해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론은! 민주 정치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론’이 가지고 있는 맹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흔히 여론은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에 ‘옳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항상 옳고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론은! 군중심리에 의해 호도될 수 있고, 사적 이익을 따라서 진리하고는 상관없이 어떤 한쪽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여론의 본질은! 동질성을 추구하는 사람의 심리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여러 사람들이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어, 그들과 생각을 공유하며 서로 긴밀하게 결합 되어 있고, 서로를 지지한다는 느낌을 가질 때,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동질성’이지,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여론을 대하는 태도에 신중해야 합니다. 특별히 정확하고 중립적인 정보와, 굳은 신념이 세워지지 않은 사람일수록 다수의 생각에 동의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나 자신이 정치적 도구로 쓰임 받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여론은 진리가 아닙니다.

▶ 신문이나 방송을 볼 때 – 이념적 성향이 서로 다른 2종류 이상의 신문이나 방송을 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여론에 휘둘려 잘못된 길을 걸어간 사람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대부분 여론에 휩쓸려서 진리와는 상관없는 길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① 빌라도 ⇨ 그는 여론 때문에 진실과 자신의 양심을 속인 재판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질이 가장 나쁜 사람을 들어보라면, 자기 이권 때문에 굽은 판결을 내린 재판관과 거짓 증언을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일반적인 죄목으로도, 정치범으로도 죽을죄를 짓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입으로도 세 번이나 예수는 무죄라고 시인했습니다. 성경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① 요 18:38 → “빌라도가 이르되 …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② 요 19:4 →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③ 요 19:6b →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것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마 27:24 → “빌라도가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빌라도는 무엇이 진실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세상의 이익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 그는 자기 자신에게 ‘나의 의무는 무엇인가?’ 이렇게 묻지 않고, 나의 이해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직권을 자신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서만 쓴 것입니다.

②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 ⇨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함과 거짓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지, 세속적인 정권을 잡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부패한 정권에 빌붙어 아부하며, 백성들의 민심과 여론이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지 않는 것에만 신경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보십시오. 이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막 11:28 →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한 마디로! “너는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기나 하냐?” 이런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전하는 말씀’을 보면 당연히 ‘아! 이분이 약속된 메시아시구나!’ 단번에 알아보아야 할 사람들인데! 답답하고 한심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그들에게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그들이 서로 의논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막 11:31∼32 →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의논 끝에 ‘모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중간, 나름 안전지대를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세상에서는 안전지대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선택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형식적인 경건만 남고, 기득권과 사적 이익만을 챙기려는 죽은 신앙인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③ 제자들과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 ⇨ 예수님을 ‘호산나’ 외치며 환영하며 맞이했던 군중들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변합니다. 그들은 그냥 군중입니까? 아닙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선한 일들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금세 부화뇌동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악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수족 노릇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중들 뿐입니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난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리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좌의정 우의정 높은 자리에 관심하고, 서로 시기하던 그들인데!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들인데! 다들 도망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어린 소녀의 위협 앞에서도 모른다고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들만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역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삶 안에서 예수님을 못 박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진리가 결론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진리가 결론이 되는 삶을 살아갑시다.

▶ ‘진리’는 대중들의 여론이나, 숫자나, 함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의 판단 기준은 성경이며, 행동의 기준도 성경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보다 현실이 앞서는 판단과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현실이 부조리한데, 어떻게 말씀대로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말씀보다는 현실과 자기 입장, 사람들의 여론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항상, 진리보다는 현실을 따라갈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 40:7∼8 →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그런데 세상 욕심에 빠져 진리를 외면하고 사적 이익에만 매이면 그는 결국 망하고 말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기에! 어리석은 자처럼 무너질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아니라, 참된 지혜자처럼 견고한 반석! 진리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 바울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고, 갈등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갈 1:10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아멘.

두리번거릴 것 없이! 주님을 선택하고, 주저함 없이!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 진리의 길을 기쁨으로 걷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진리가 결론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참 주님의 제자!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여론이나 사람들의 평판에 예민한 사람인지? 아니면 무엇이 진리이고 옳은 길 인지를 살피는 사람 인지? 나의 성향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여론에 휘둘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일조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나라면! 그때 어떻게 했을지를 신앙고백적으로 나눠봅시다.


3. 지금도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진리보다는 개인적인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는 데 힘쓰라고 말 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재영
2024-03-09
조회 107

제목: 하늘에서 큰 자가 됩시다. (막 9:30∼41)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배자’이고, 다른 하나는 ‘지도자’입니다. 대개 ‘지배자’는 정치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의 인격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정신을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지배자’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긴 사람입니다. 남을 넘어뜨리고 죽이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도자’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혼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다른 사람과 싸워서 승리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싸워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지배자’는 성공한 사람이고, ‘지도자’는 승리한 사람입니다. 지배자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자, 자기를 기꺼이 희생합니다. 지배자는 살아서 지배하고, 죽거나 물러나면 끝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도자는 죽어서도 지배하고, 영원히 살아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제자로 택하신 것은! 그들을 ‘지배자’가 아닌 ‘지도자’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고, 3년 동안 친히 본을 보여 주시면서 훈련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치관의 대변혁을 불러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도자론은!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하늘에서 큰 자가 되길 힘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음에 잘 새기고, 우리 모두 ‘하늘에서 큰 자’가 될 것을 열망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큰 자가 될 수 있습니까?


1.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참 지도자상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3년 동안 갈릴리 지역에서 수많은 활동과 업적을 쌓아오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랑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큰일을 많이 하시고도, 결코 자기를 나타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막 9:30 →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그런데! 이같이 모범을 보이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주 딴판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고자 예루살렘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계신 데, 제자들은 길거리에서 옥신각신 싸우고 있었습니다. 본문 33절과 34절입니다. 막 9:33∼34 →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은 지금 무엇을 두고 ‘쟁론’ 즉 쉬운 말로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말씨름’하며 ‘열불’을 내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중에 누가 가장 크냐?’는 문제였습니다. ‘서로 내가 제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자가 된 순번대로, 나이대로, 실력대로, 예수님께 인정받은 대로, 부모나 가족의 후원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의 논쟁은 점점 더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언쟁이 심한지! 예수님은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이 문제만큼은 걸어가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가르칠 내용이 아니었기에, 가던 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드디어 예수님이 내각을 발표하는가 싶어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막 9:35 →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뭐?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라고? 이게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이건 종이 되라는 말인데! 지금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의 종으로 살고 있고, 종교지도자들과 윗사람들의 종으로 살고 있어 열불 날 때가 많은데, 종 중에서도 꼴찌가 돼서 섬기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실망! 완전 대실망하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꿈을 산산이 깨뜨리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따른 제자들에게, 왜 이런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것이 하늘나라의 법이고, 천국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에는 로마의 법이 있듯이, 천국에는 천국의 법이 있습니다. 로마식 삶의 방식은! 약육강식 강강약약입니다. 약자에게는 더 강하게, 강자에게는 더 약하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국의 삶의 방식은 로마식 삶의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왕이 종처럼 섬기고, 종이 왕에게 섬김받는 곳이 천국입니다. 계급이 없어지고, 직급이 없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간극이 없고, 높은 사람일수록 더 낮아져서 섬기는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그 본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심으로 오히려 높아지신 분이십니다. 빌 2:8∼11 →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배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적’이 많고, 섬기는 자에게는 ‘벗’이 많아집니다.” 내려가는 만큼 올라가게 될 줄 믿고, 친구가 많고, 섬김으로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작은 자를 잘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을 낮추고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도록, 실물교육을 하시기 위해 어린아이 하나를 안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 ‘어린아이’는 가난한 사람, 평범한 사람, 영향력도, 부귀도, 권력도 없는 사람, 보살펴주지 않으면 안 될 사람, 아무것도 없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 섬기면, 그 사람이 곧 하늘에서 큰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막 9:37 →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이 말씀은 곧! → 작은 아이 영접 = 주님 영접 =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삼단논법’이 형성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높은 사람, 부유한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잘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 없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값진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 이런 섬김을 귀하게 평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자세로 일하지 말고, 저자세로 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높임 받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높임 받기를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지배자가 되려 하지 말고, 천국에서 인정받는 하나님의 자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 그릇이 크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활동 지역은 갈릴리 지역에 국한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 지역, 사마리아지역, 그리고 레바논과 시리아까지 폭이 넓었고, 전도 대상자도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차등이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어울리셨습니다.

그런데 제자 ‘요한’은 자기가 이렇게 했다고 예수님께 자랑했습니다. 막 9:38 →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이 구절의 중심 단어는 ‘우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일수록 내 편, 네 편 잘 따지고 편을 가릅니다. 배타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실상 요한이 자기의 속 좁은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가슴이 넓은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내 편, 네 편 가르지 말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 함께 하나님 편이라는 것입니다. 막 9:40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① 우리는 함께 부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열두 제자 그룹에 속해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를 위해 일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에게 답하십니다. 막 9:39 →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② 우리는 함께 상 받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 하늘의 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막 9:41 →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아멘.

성도 여러분! 천국에서는 마음이 넓은 자가 큰 자입니다. 바울은 외모는 작은 자였으나, 마음은 큰 자였습니다. 빌립보교회 안에 여선교회의 분열이 있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빌 1:18 →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네! ‘예수님만 높임 받으시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이런 넓은 마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위대한 사람 ⇨(밥통이 큰 사람)이 되지 말고, 심대한 사람 ⇨ (마음이 큰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 주신 모습을 본받아 ‣ 마음을 낮추고 ‣ 작은 자를 잘 섬기고 ‣ 마음을 넓혀, 하늘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지도자’와 ‘지배자’의 차이, 혹은 ‘리더’와 ‘보스’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목적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목적은 완전히 동상이몽이었 습니다. 그러면 나의 예수 믿는 목적은 어떤지 나눠봅시다.


3. 요즘 우리 한국인의 심리적 병폐들이 조금 더 나빠졌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① 화를 잘 낸다. ② 성격이 거칠어졌다. ③ 조급해졌다. ④ 믿지 않으려 한다. ⑤ 마음이 좁아졌다. 이런 분석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처방을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03-02
조회 109

제목: 이방인에게도 똑같은 복음과 기적을! (막 8:1∼10)


오늘 여러분과 나눌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칠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오늘 본문보다 2장 앞인 막 6장에 기록되어 있고, 유대인들을 위해 베푸신 기적이었습니다. 오늘 막 8장에 기록된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들을 위해 베푸신 기적입니다.


1. 예수님의 갈릴리 북쪽 두로와 시돈 그리고 갈릴리 호수 동쪽 이방 지역에서의 복음 사역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이방인 사역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증거되었으며, 이방인들이 어떻게 예수를 만났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오늘 본문 8장 1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막 8:1 →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이 ‘그 무렵’이 어떤 때인지를 알려면, 바로 앞장인 7장을 보아야 합니다. 7:31에 이렇게 말합니다. 막 7:31 →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지금 예수님은 갈리리 북부지역의 여러 이방인 도시와 마을들을 다니셨고, 또한 동남쪽으로 내려와서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갈릴리 호수 동편 이방인들이 사는 동네인 ‘텔 하다르’에서 복음을 전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텔 하다르에는 예수님께서 ‘칠병이어 기적을 베푼 곳’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두로에서 텔 하다르까지는 직선거리로 60km가 넘는 먼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돌고 돌아오셨으니, 아마 배 이상 되는 먼 길을 4,000명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들은 사흘간이나 굶어가면서 따라왔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면! 이 4천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무리들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예수님을 따라왔을까요?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오게 된 동기는 오늘 본문에서는 명확히 찾아볼 수 없지만, 역시 앞장인 마가복음 7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막 7:24절 이하에 보면, ‘두로’의 한 여인이 딸이 귀신 들려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막 7:24∼26 →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네! 이 여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태생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딸의 병을 고쳐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청을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그것도 정중한 거절이 아니라, 마치 개 취급을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막 7:27 →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좋사오니, 그것을 주십시오!” 사모하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바로 이 장면을 본 것입니다. ‘아! 믿음이란 저런 것이로구나! 아무리 무시하고 소홀하게 취급당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따라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로구나! 그리고 그런 믿음에는 반드시 복된 결과가 따르는구나!’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60km가 넘는 먼 거리의 길을,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해가면서 예수님을 따라온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따라온 대부분의 사람이 병자이거나 병자의 가족·지인들이었습니다. 마 15:30∼31 → “큰 무리가(4천 명이 넘는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 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주시니,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렇습니다. 이들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작정하고 준비해서 예수님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그냥 급한 마음에 예수님이 가시는 대로 뒤따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먹을 것도 챙기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얼마나 흥분했던지, 사흘 동안이나 굶어가면서도 배고픈 줄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8:1b∼3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이 가지셨던 이런 긍휼의 마음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체험하고도 금방 잃어버린 믿음 없는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

예수님은 이방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던 오병이어의 기적과 똑같은 기적을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계획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막 8:4 →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성도 여러분! 제자들의 이런 반응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얼마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맞는데! 제자들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받았던 그 은혜! 그 감격과 놀람! 그 믿음이! 일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광야와, 수많은 군중의 현실이, 훨씬 더 크게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 광야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하겠습니까? 이곳에 마트가 있습니까? 식당이 있습니까?” … 예수님이 늘 그들과 함께하셨고, 말씀하셨고, 체험케 했음에도, 그들은 참으로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둔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달리, 지금 예수님을 따라온 이방인들은 사흘을 굶었음에도 꿈적하지 않고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좀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냥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동행했다고 해서 통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아무런 영적 감동이나 결단 없이, 오로지 의무감만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말씀을 많이 들었던 것이, 도리어 제자들에게는 해가 되고, 독이 되고 만 겁니다. 많이 듣다 보니, 오히려 무감각해져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속으로 한 번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능력이 충만히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메말라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일 후자라면!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 성령충만함을 받고 다시 열정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3. 이방인들의 믿음의 반응과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

참으로 놀랍게도 광야 빈들에 모였던 이방인들! 병든 사람들과 가족들은 예수님! 그분을 바라볼 줄 알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굶으면서도 끄덕하지 않고, 사흘을 멀다 않고 예수님을 따라오는 영적 능력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이 무리들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열심을 품고 주님을 따르는 무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이들에게 7병 2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7’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말합니다. 즉 7은 이방인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열두’제자 중심이었다면, 헬라문화권에 속했던 사람들을 위해 초대 교회가 뽑았던 집사는 ‘일곱’ 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광주리’가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졌고, ‘일곱 광주리’가 남은 본문의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들을 향한 기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단순히 기적을 소개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고, 이 기적 사건을 통해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가장 큰 표적이며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주리고 목마름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써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요 6:35). 예수님만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7병 2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아!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시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순절 사건 이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끼리 잘 지내는 것에 목적을 두지 말고,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차별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주십시오!’라고 구했던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얼마 전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과 너무나 유사한 상황인데도, 제자들은 회의적인 질문으로 반응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각자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불신, 이방인 차별, 고정관념 등)


3. 일부러 제자들과 함께 이방 지역으로 가서 전도와 치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근본적인 의도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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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명을 주시고, 고치시는 예수님 (막 5:24∼34)

메시아로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주요 사역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 9:35 →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즉 ‣ 가르침 ‣ 복음 전파 ‣ 치유를 ⇨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예수님의 사역은 세 번째인 ‘치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1. 사람을 찾아다녔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고난이 닥치면! 자신의 힘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용하다고 소문난 의사를 찾아다녔습니다. 적극적으로 치료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지난 12년 동안 치료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26절 말씀은, 그가 지금 어떤 절망 속에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 5:26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여기 ‣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 ‘다 허비하였으되’ ‣ ‘아무 효험이 없고’ ‣ ‘도리어 더 중하여 졌던 차에’라는 ‘4가지 표현’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일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든 병을 고쳐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수많은 의사를 찾아다녔고, 온갖 치료를 받아봤고, 좋은 약이란 약은 다 써봤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이 와중에, 가진 재산도 다 소비하게 되었고, 병세는 차도 없이 날로 더욱 중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긴 투병 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고, 재정적인 압박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여인의 이런 고통스러운 삶! ‣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되지 않는 삶 ‣자신을 고쳐줄 사람을 찾아 희망을 걸어 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고 ‣ 더욱 망가지기만 하는 삶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어려움이 겹겹이 내 인생을 둘러 진치고 있을 때! 먼저 누구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까? 일단 사람의 손을 잡아보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손 붙잡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께 손 내미는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기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절망에 빠져있는 이 여인에게 소문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병이든지 고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들었던 소문이! 당시 어떻게 퍼지고 있었는지를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 4:23∼24 →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 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이런 소문을 듣고, 그녀도 희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지난 12년!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쳐준다는 수많은 의사를 만났지만, 결국 아무런 도움도 받질 못했습니다. 어떤 의사는 고쳐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돈만 챙겨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나도! 그분을 만나면 나을 수 있다”라는 강한 확신과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복된 소식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들음에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롬 10:17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시며, 치료자가 되신다.”라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런 통로 역할만 하면! 말씀의 능력이 ⇨ 구원의 역사, 치료의 역사, 회복의 역사를 이룰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 절망에 처했던 사람들이 새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소문을 듣고 굳센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이 여인은! 믿음을 갖기에는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하기에는, 모든 여건이 좋질 못했습니다. ‣ 그녀는 긴 세월 동안 치료에 계속 실패했고 ‣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고치려고 애쓰다가 심신이 다 망가져 버렸습니다. ‣ 그뿐만 아니라, 부정한 병에 걸린 여자로 낙인찍혀 사회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가족들도 거의 포기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니, 곁에서 도울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지난 12년의 세월은! 실패의 세월, 좌절의 세월, 고립의 세월, 상처의 세월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인생을 포기할 만한 고난의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예수님께 나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본문 27∼28절은 그녀의 ‘믿음과 행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막 5:27∼28 →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아멘.

지금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녀는 그 사람들을 뚫고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힘도, 멀리서 소리칠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예수님 쪽으로 한 발 한 발 결사적으로 다가갔습니다. 이처럼 그녀를 움직인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몸도 마음도 오랫동안 지쳐있었지만, 믿음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행동’하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필요’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한 번 대보자. 그러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녀는 지금 혈기 왕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시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장애물을 헤치고 그녀는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댈 수만 있다면! 이제껏 그녀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실패의 세월, 배신의 세월, 고립의 세월, 상처의 세월이 끝나고, 새날이 열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가졌던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내 인생에도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3. 기적을 체험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정말 그녀에게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막 5:29 →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할렐루야!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순간, 그녀는 지난 12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혈루증이 나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이켜 뒤를 돌아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5:30 →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그러자!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막 5:31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사실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 밀고 있었으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파에 밀려가듯 걷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과 옷에 손을 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믿음의 행동만이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고, 예수님을 따르며 밀고 만지고 했지만, 주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오직 이 여인 한 사람뿐이었다는 점입니다. 믿음의 행동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이 여인은! 즉시 자기 몸에 병이 나은 줄을 깨달았고, 예수님도!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셨습니다. 기적은! = ‘하나님의 능력’과 + ‘믿음’이 만날 때, 스파크와 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발걸음을 멈추시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예수님께 기쁨과 두려움으로 나아와 엎드립니다. 막 5:32∼33 →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그리고 이 여인의 사연과 주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막 5:3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내 옷자락을 만져서 병이 나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필요가 큰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고, 기적의 주인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9:23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날의 아픔과 상처, 절망과 좌절을 물리치고, 오늘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서서, 오직 주님 한 분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긍정의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 먼저 세상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찾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나를 생각하는 신앙의 사람입니까?


2. 예수님께서 고침을 받은 여인에게 하신 4가지 말씀에 대해서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봅시다. “① 딸아! ②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③ 평안히 가라. ④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3.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이 만날 때, 스파크와 같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본인의 경험이나 생각을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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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척받은 왕 - 예수님 (막 3:20∼35)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단어는 ‘가족’입니다. 가족이란!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 가족이기 때문에 쉽게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는 가슴 깊이 박힙니다. 그런가 하면! 따뜻한 말 한마디로, 그 깊이 박혔던 상처를 쉽게 아물게도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1. 여러분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 어떤 사람은 가족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족이란 꼭 영어 같아요. 마음에는 있는데 표현이 잘 안 되니까요.” ‣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이란 내게 공기와 같아요.” ‣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이란 외로움이다”라고 말합니다. 때론 외로움이 삶의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외로움으로 인해 ‘나는 이 땅에 홀로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이 어떤 의미이든! 육신의 가족을 통하여 사랑과 행복도 누리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함께 누리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도 가족들로부터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유다 땅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자라나신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은 본격적인 공생애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몰려드는 병자들을 고치시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와중에,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왔습니다. 막 3:21 →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신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에 있어 줘야 할 친족들이 이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협력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쁜 소문이 있으면! 오히려 그것을 변호해 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문을 듣고, 사실 확인도 없이 그렇게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친족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막 3:31∼32 →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여기 31절의 ‘밖에 서서’와 32절의 ‘밖에서’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예수님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밖에 선 사람과 vs 안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이 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밖에 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혈연 공동체인,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친족들입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단순한 상황 묘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임에 우리는 참여할 수 없다는 심리적인 거부 의사입니다. 그 속에 끼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교회에 오기는 왔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그냥 관망자로 머무는 것입니다. 모임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냥 밖에서 구경꾼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진리는 3인칭의 지식이나 정보만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내가 그 속에 들어가야 깨달아집니다.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먼저 마음을 열어 믿고, 결단해야,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하시는지를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3인칭 신앙에 머물러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신앙의 자리에 직접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과 자세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3.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음해하고 매도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유대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음해하고 매도하려고 했습니다. 예수가 병자들을 고쳐주고 기적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정치 않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결과라고 음해하며, 그가 행하는 능력은 모두 사단의 농간이라고 매도했습니다. 막 3:22 →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음해와 매도, 비판적인 시각은 매우 파급력이 컸습니다. 예수님의 친척이나 가족들조차 우려하는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막 3:21 →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네! 예수님의 친족들조차 ‘혹 예수님이 정말 미친 것은 아닌가?’ 의심을 가질 만큼, 오해의 골은 꽤 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붙들어 집으로 끌고 가려는 심산으로 예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족들의 오해에 대해서는 즉각 반응하지 않으시고, 먼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평생 율법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바알세불, 귀신의 왕의 조종을 받는 자라고 매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음해하고 매도하는 그들의 죄는 ‘성령 훼방 죄’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시며, 이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막 3:28∼29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네!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인간적으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다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던 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관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종교지도자들을 질책하신 후에, 예수님은 다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막 3:33∼35 →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가족에 관한 전혀 새로운 이해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혈연 공동체가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공동체의 중요성을 더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혈연에 의해서 맺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맺어진 공동체!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모인 믿음공동체, 즉 영적인 믿음의 가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사람들이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이렇게 새로운 가족관계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가족이란 개념을 좀 더 이해하시기 쉽도록, ‘사랑’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가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를 사랑하기 전에는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였던 사람들이,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새로운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믿음’공동체, ‘사랑’공동체는 ‘혈연’ 공동체를 뛰어넘습니다.

교회들마다 부흥을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적인 가족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숫자의 부흥이나 재정의 부흥이 아니라, ‘가족성의 부흥’이어야 합니다. 교인의 숫자가 많아지고 교회가 점점 커지는 일은 우리가 바라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가족애가 사라지고 가족성이 유지되기 어렵다면, 그 부흥은 결코 좋은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부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와 더불어서 성도 간의 사랑과 우애와 돌봄, 즉 가족성이 함께 성장하고 부흥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숫자적으로 많이 부흥한다 해도 가족성이 사라지고 사무적이고 기능적으로 교회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바람이나 목적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과 더불어서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식구들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그 속에서 사랑을 주고 받는 경험도 없다면! 그는 마치 영적인 고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꿈마을엘림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믿음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함께 살아갈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믿음을 이끌어주고, 아플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좋을 때나,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가족, 마음의 흉허물을 다 터놓을 수 있는 믿음의 가족, 하나님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오늘 말씀에서 성도들의 관계를 ‘가족’ ‘형제자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가족의 특징은 무엇일까? 나눠봅시다.


2. 성도들이 “아 나도 한 가족이구나! 이 공동체에 일원이구나!”하고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나눠봅시다.


3. 오늘 말씀을 듣고 내 혈육의 가족과 또한 영적 가족에게 꼭 해야겠다고 생각된 말이나 일이 있다면 먼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02-09
조회 110

제목: 왕의 대관식 (막 1:1∼13)


오늘부터 8주 동안 ‘원포인트 설교’의 본문은 ‘마가복음’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

오늘 본문 2∼8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역입니다. 막 1:2 →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먼저 ‘그 길을 준비할 사자’를 보내겠다는 예언인데, 그 사자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명이 무엇인지? 이사야서에 예언된 말씀을 근거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 40:3 →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 예언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4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세례 요한은 실제로 ‘광야’에 거주하면서 사역하였고, 또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데, 그것은 곧 등장하시게 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역으로서, 예언된 내용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은 자기가 베풀고 있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물세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진짜 세례는! 곧 사람을 본질적으로 중생시키고 구원받게 하는 ‘성령 세례’이며, 이것은 오직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비록 신약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임금님 납시오!’라고, 왕의 행차를 선포하는 내관처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 하라!’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만천하에 알리는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2. 성부 하나님과 성령께서 확증해 주신 왕이신 예수님의 대관식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를 세례 요한에게로 가서 ‘세례’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 3:14 →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 3:15 →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 신비하고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하늘이 갈라졌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셨고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막 1:9c∼13 →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 하늘이 갈라짐과 ‣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공생애 취임식’과 같은 현장에 친히 왕림해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삼위 하나님’께서 동시에 나타나신, 성경에 몇 안 되는 특별한 경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로’,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3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1.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10절 → “하늘이 갈라짐과” / 여기 ‘갈라졌다’라는 말을! 달리 번역하면 ‘찢어졌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열린 것, 갈라진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400년 만에 드디어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갈라진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말을 하려면! 먼저 입을 벌려야 하듯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입을 여셨다는 의미입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쫙 찢어진 사건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의 ‘갈라짐’이나, 휘장이 ‘찢어진 것’이나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이제 하늘과 땅의 연결통로가 예수님 안에서 열렸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다른 중보자는 필요 없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10절 중반 절 →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 일반적으로 비둘기의 상징은 ‘평화’입니다. 비둘기의 속성인 순진함, 온유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비둘기는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치 대한민국 대통령의 심볼은 ‘봉황’이고, 미국 대통령의 심볼은 ‘독수리’인 것처럼, 이스라엘 왕의 심볼은 ‘비둘기’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막 1:11 →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신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구약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시편 2편입니다. 이 시편 2편은 ‘제왕시’로 불립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이 등극할 때는 꼭 시편 2편을 낭송했습니다. 제가 시편 2편 7절 말씀을 읽을 때, 여러분은 오늘 본문 11절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시 2:7 →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여기서 말하는 아들은! 왕위에 앉히는 아들, 즉 황태자와 같은 아들을 말합니다. 내가 너를 ‘왕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11절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 역시, 예수님의 왕위를 인정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 장면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동시에 등장하면서, 비록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이심이 천명되고 있으며, ‘왕 중의 왕’으로 오셨음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3. 기름 부음을 받은 왕,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인 소개’를 첫 절에서 요약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막 1: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기름 부음 받은 왕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별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뒷부분에 나오는 ‘시작’이라는 단어입니다. 막 1: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우리 한글 성경엔 ‘시작’이라는 단어가 맨 뒤에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엔 맨 앞에 나옵니다. →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그런데 이 ‘시작’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1에 나오는 ‘태초’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창 1:1 →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온 우주 만물! 축약해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중 하나님의 복을 제일 많이 받은 피조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람입니다. 창 1:28 →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놀라운 복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유일한 한가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거짓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속아 넘어가므로! ‘복’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을 잃어버리고 저주받은 인간에게 다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독생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막 1:9 →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세례는! 죄인이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 받는 세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회개해야 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셨기에, 세례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 복을 잃어버리고 저주받은 죄인 된 인간에게 다시 복을 주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 취급을 받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죄인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생애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죄인이 아니셨지만! ⇨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기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로 바쳐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언제나 예수님을 인생의 왕으로 모시고! 그 말씀과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셔서, 예수님이 들으셨던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는 복 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복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바로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나눠봅시다.


2.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그 삶의 내용은 희생과 헌신, 섬김과 내어주심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나눠봅시다.


3.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심에도 세례를 받으셨고,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여기에 담긴 뜻에 대해서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