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감리교회와 중부연회 소식’을 성도님들과 잠시 공유하고자 합니다.
1. 선교 140주년 기념사업으로 진행되는 ‘평화통일 기도의 집’ 건립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세요. 제가 ‘상임위원장’이 되어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님들께서도 더욱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홍보영상’은 밴드에>
2. 이번 84회 ‘중부연회’에서 우리 교회가 ‘선교 모범상’을 받았고, 박경식 장로님은 근속 20년 상을 받았습니다.
모범상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인데 ① 지난 2011년 이래 4명(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속적으로 후원해 온 공로를 인정한 것입니다. ※ 선교사로 하여금 해당 나라의 국립 혹은 왕립대학의 ‘그 나라 국어과’를 졸업한 후에 시역을 시작케 한 정책 - 선교사가 해당 나라의 고급 언어를 익히게 되고, 또한 같이 공부한 학우들과의 인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장기적으로는 안정된 선교 기반을 다지게 한 점입니다.
② 아프리카 ‘토고’ 감리교회의 목회자 자녀들 70여 명에게, 지속적으로 학비와 기숙사비를 지원하여 임지를 떠나지 않고 안정적인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도운 점입니다.
수도 ‘로메’ 이외의, 지방에 세워진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목회지를 떠나는 일이 많다는 ‘토고 감리교회’의 고민을 듣고, 우리 교회는 수도인 ‘로메’에 세워진 기숙사 학교인 ‘존 웨슬리 중고등학교’에 지방 목회자들의 자녀가 입학하여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전액 장학금’으로 후원해 왔습니다.
3. ‘환경선교위원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중보기도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번 연회에서 ‘환경선교위원장’이 되어서, 앞으로 연회의 관련 사업들을 계획하고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 기도도 해주시고, 적극적인 협력도 부탁드립니다.
오늘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요지는,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의 3년간 ‘말씀의 기반’이 다져진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 이렇게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룬 신앙이라야, ‘건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1.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참 이해 안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두 제자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 몇 명 안되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나왔고, 마지막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가 다 도망갔으니! 예수님의 목회는 과연 성공한 목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엔 제자들의 측면에서 보겠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스승이 보통 분이셨습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탁월한 스승인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들었고, 그의 사역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일상생활을 늘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배신자도 나왔고,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다들 목숨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버렸던 그물을 챙겨 들고, 다시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들은 많이 들었고, 많이 보았고, 많이 깨닫기도 했고,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무기력했을까요?
그것은! 생각으론 알았고, 마음으론 절대 부인하지 않고, 떠나지 않으리라 결심도 했지만!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닥쳤을 때, 그렇게 할 실천의 능력, 삶의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뻔히 답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능력이 안 따라 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집에 냉장고도 갖다 놓고 에어컨도 설치해 놓았습니다. 온갖 가전제품을 다 들여놓았지만, 막상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처럼! 제자로서 외면적 모습은 다 갖추었지만, 내적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많이 아는 것도, 오래 믿은 것도, 직분이 높은 것으로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무기력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이 180˚ 바뀌었습니다. 언제부터 달라졌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약속하신 성령이 강력하게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비겁했던 제자들에게 신령한 용기가 넘쳐났습니다. 하나님 외에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도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주의의 전통도, 협소했던 민족주의도 그들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함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역사가 강력하게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제자들의 사역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4:12 →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네! 껍데기 같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지자! 능력을 행하는 제자들로 변했습니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들도 성령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조화
자,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실패했고, 성령님의 사역만 성공한 것이란 말입니까? 말씀 사역은 필요가 없고, 성령 사역만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복음서는 의미 없고, 사도행전만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눅 24장의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 1장의 첫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똑같은 내용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의사 누가’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인데, 사실 두 책은! 한 권의 책인데 너무 두꺼워서 ‘전편과 후편으로 나눠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전편인 누가복음에서는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 ▸그분의 가르치심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후편인 사도행전에서는 → ▸성령의 임하심과 ▸교회의 탄생 그리고 ▸성령께서 교회와 사역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어떻게 펼쳐 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반드시 완성되고야 말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흔히 ‘말씀 운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오직 말씀’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오직 말씀으로! sola scriptura!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외침은, 성령은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성경 지식은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껍데기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는, ‘체험이나 기적’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면 운행할 수 없듯이, 성령은 말씀을 벗어나서 역사할 수 없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신앙은 ⇨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 사역의 조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균형 ▸말씀과 성령의 일치, 나아가 ▸부활절과 오순절의 바른 관계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의 조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부활절로 문을 닫고, 사도행전은 오순절로 문을 엽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나 부활절로 끝나는 종교가 아니라, 오순절의 성령께서 새롭게 시작하고 역사를 펼쳐가시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부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부활절은 오순절로 새로운 부활 운동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바른 신앙은 ⇨ 균형과 조화입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메마른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은 신비주의로 그치고 말게 됩니다. 바른 신앙은 ⇨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이 함께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성도들이 살아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말씀 운동’과 ‘성령 운동’을 병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진수요 핵심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당당히 역사하실 수 있도록 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성령님! 환영합니다. 인정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내가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이 살고! 성령이 역사하면! 한국교회가 살고, 이 민족이 삽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고, 사모하여, 말씀에 바탕한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 영적으로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하나님의 자녀들! 무기력하고 자꾸 넘어지는 성도가 아니라, 능력을 행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산상수훈의 결론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초가 부실한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날 때 무너짐이 심한 것처럼, 말씀의 기초가 부실한 신앙은 쉽게 흔들립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전기가 연결되지 않은 가전제품의 무기력함과 성령충만하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비교해서,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바른 신앙은 균형과 조화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이 함께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눠봅시다.
오늘의 말씀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로 알려진 이들입니다. 이들은 그동안 꿈꿔왔던 기대와 소망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꿈꿔왔던 소망이 무엇입니까? 21절에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희망을 실현시켜 주실 분으로 믿고 기대를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커녕,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참혹한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이 가졌던 희망의 종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겐 실망과 좌절감이 밀물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허탈한 마음으로 이틀을 보냈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저들은 자신들의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기 위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숨 섞인 탄식의 대화! 수심이 짙게 드리워진 슬픈 얼굴! 장차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모습은! 2천 년 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듣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1997년에 시작되었던 I.M.F 때도 어려웠지만, 지금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훨씬 더 어렵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는 탄식과 우려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고, 꿈도 희망도 다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아픔의 대화들이, 나라 구석구석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삶의 현장, 바로 여기도! 엠마오인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높은 지역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로 가는 길은 끝없이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치적으로도 엠마오는 예루살렘 서쪽에 있으므로, 엠마오를 향하여 가는 길은! 해가 저무는 쪽을 바라보며 가는 서향길입니다.
즉, 엠마오로 향하는 길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 길입니다. 땅거미가 찾아들 듯이 온갖 암울함과 낙담이 스며드는 길입니다. 얼굴엔 수심에 차고, 마음엔 절망이 일고, 몸은 피곤해지는 길이 바로 엠마오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들 곁에 한 사람이 따라붙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두 제자와는 달리, 가볍고 힘찼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지만! 두 제자는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심령이 싸늘하게 식어있고, 낙담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뜻하지 않은 이 동행자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벌써 날이 저물어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두 제자가 강권하여 그 동행자도 함께 여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행자가 베푸는 성찬을 받게 됩니다.
그때,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서 그가 바로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눅 24:30∼31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자, 성도 여러분! 두 제자가 ‘다시 마음이 뜨거워지고, 닫혔던 심령의 눈이 뜨여지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 하나는 성경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우리가 은혜받고 심령이 뜨거워지는 통로, 수단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예시하셨습니다. ‘은혜의 통로(수단)’ ⇨ ‘말씀’ ‘성찬’ ‘찬양’ ‘기도’ ‘금식’ ‘영적교제’ ‘전도’ ‘선행’ 등입니다. 그런데 지금 두 제자는 은혜의 통로 ‘2가지’에 접촉했습니다. 주님과 ‘말씀의 교제’를 했고, 또한 ‘성찬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제자의 마음과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이 부활주일 아침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찬을 받는 가운데 ▸찬양을 부르고 듣는 가운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심령도 뜨거워지는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짧게 은혜의 통로, 은혜의 수단 가운데 두 가지 ‘말씀’과 ‘성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
진정한 영적 회복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지금 두 제자는 주님께서 풀어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눅 24:27 →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에 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두 제자가 어떤 것은 믿지 못하고, 또 어떤 말씀에 대해서는 잘못된 기대를 가졌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바르고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오늘날 목사의 사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도들이 바르게 알고 깨닫도록 해설하고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사도행전의 베뢰아교회 성도들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행 17:11∼12a →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믿는 사람이 많고!”
두 제자가 그 동행자,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성경 말씀을 귀담아들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눅 24:32 →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고, 또한 배우기를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 있었습니까?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눅 22:61∼62 →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바른 신앙의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찬
그리고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성찬’을 받았습니다. 눅 24:30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이렇게 ‘성찬을 받은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눅 24:31a →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할렐루야! 네! 성찬을 받을 때, 두 제자의 영의 눈이 뜨여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꼭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신 예식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6:53∼5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그렇습니다. 성찬을 받는 것은 구원과 영생에 직결되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 받을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참여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영적인 눈이 열리고, 마음의 뜨거움을 회복하게 되고, 결국에는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눔과 묵상
1.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뜨거울 때와 식었을 때, 신앙생활이 어떻게 달랐었는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은혜의 통로에는 ‘말씀’ ‘성찬’ ‘찬양’ ‘기도’ ‘금식’ ‘영적교제’ ‘전도’ ‘선행’ 등이 있습니다.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사순절 특별히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내며, 가장 크게 은혜받은 예배나 기도회 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오늘 비유는! 일반적으로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라고 불리는데, 저는 이 비유를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도 이 농부들의 모습 즉,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비슷한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이 말씀을 거울삼아서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세 가지 잘못된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 착각!
9절을 보면 이렇게 비유가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네! 포도원 주인이 농부에게 소작을 맡기기 전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막 12장에도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에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막 12:1 →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네! 그저 포도나무 몇 그루 심고 끝낸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도 치고, 포도즙을 짤 틀도 만들고, 경계를 위해서 망대까지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맡기실 때, 먼저 정성을 다해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주어 관리하게 했지만, 포도를 수확하려면 여러 해가 걸립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과일나무를 심으면! 첫 3년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 먹을 수가 없었고, 또한 4년째 열매는 하나님께 감사 예물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5년째가 돼서야 마침내 주인이 과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레 19:23∼25 →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결국, 포도원 주인은 4년 동안 기다리면서 농부들의 생활비를 보조해 주어야 했고, 포도원을 가꾸고 돌보는데 필요한 비용을 주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5년째 되는 수확의 계절에, 포도원 주인은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나오는 농부들은 감사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정성껏 마련해 놓은 좋은 포도원 덕분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인 주인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서 일한다는 ‘청지기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맡아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한 청지기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주인이 아니고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도록 맡겼더니, 마치 자기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양 은사와 달란트를 맡겨 주시고, 인생의 열매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노력과 능력과 기술로 얻은 것을 왜 하나님께 드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받은 월급을 아내에게 주면서 당신이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야 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전부 내 힘으로 하는 것 같지만!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이나, 대형 산불 앞에서 얼마나 미약한 인간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경험했습니다. 겸손함으로 본분을 망각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탐욕!
본문을 보면, 주인이 세 차례 종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눅 20:10 →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마땅히 농부들은 주인에게 소출의 일정 부분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계약의 의무입니다.
주인이 많은 것을 원한 것도 아닙니다. 소출의 얼마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는 주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첫 번째 종을 잡아서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얼마든지 법적 조치를 할 수 있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두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인내심과 관용을 가지고 기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번째 종 역시, 마찬가지로 대우했습니다. 눅 20:11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마가복음에는 이를 좀 더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2:4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여기서 우리가 관심해 봐야 할 구절은 ‘머리에 상처를 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머리를 때리는 것은! 명예를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명예는! 목숨처럼 귀하게 생각하는 가치였는데, 종의 머리를 때려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단지 그 종의 명예를 모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를 보낸 주인의 명예를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주인은 또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눅 20:12 →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여러 차례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더 완악해지기만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주인의 생각에는! 종들과는 달리 아들은 존중해 줄 것으로 알고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일뿐이었습니다. 눅 20:13∼15 →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주인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농부들은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한 마디로 ‘욕심’ ‘탐욕’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출 20장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열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출 20:17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런 계명을 주신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탐욕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 4:22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욕심에 사로잡혀 살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그는 십계명을 어기는 자요,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는 욕심이 내 마음에 깊이 터 잡고 있지는 않은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3. 완악함!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인이, 때가 돼서 소작료를 받아오라고 보낸 종들을 농부들은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주인은 세 번까지 참았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자기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나가도 한참 더 나갔습니다. 아들을 죽이면! 상속자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니, 포도원을 자기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고,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은 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농부들의 행동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① 그 ‘악함이 반복되었다는 점’입니다. 같은 죄를 네 번이나 반복해서 저질렀습니다. 도중에 자기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깨닫고’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② 그 ‘악함이 점점 더 심해졌다는 점’입니다. 처음보다 점점 더 그 죄질이 나빠졌습니다. 종을 때려서 내쫓았다가, 머리를 쳐서 능욕하고, 마지막에는 아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태도를 ‘완악하다’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마 13:15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렇게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마음이 단단히 굳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콘크리트가 일단 굳어지면!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딱딱하게 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삐뚤어진 채 굳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임에도, 미움이나 시기로 마음이 굳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당연히 불쌍하게 여기고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함에도, 마음은 돌처럼 차갑게 굳어진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 우리도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점점 더 죄가 커지고 죄질이 나빠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완악해진 마음은 반드시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굳어진 마음은 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심령이 은혜의 단비로 흠뻑 적셔져야 합니다. 은혜를 깨달아 말랐던 눈물이 다시 흘러야 하고, 작은 죄에도 애통해할 수 있는 예민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간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은혜를 힘입는 ‘고난주간’입니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핑계만 대지 마시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고난과 부활로 이어지는 이 한 주간조차도 주님께 드릴 수 없다면! 과연 그런 나를 주님의 아들이라고 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결심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농부가 아니라, 선한 청지기로 다시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착각, 탐욕, 완악함! 이 세 가지 가운데, 자기의 마음과 삶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단어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농부들은 선한 청지기로 살지 않고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들 가운데, 내가 주인 행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예언한 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 9:6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① 기묘자라 모사라 ②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③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④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내용 중에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서 볼 말은 ‘기묘자라 모사라’라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말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고, 또한 느낌상 그렇게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질 않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영어로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아주 명쾌합니다. → “And he will be called ① Wonderful Counselor, ② Mighty God, ③ Everlasting Father, ④ Prince of Peace.” (NIV) 네! 이렇게 영어 성경은 ‘기묘자라 모사라’는 말을 → ‘Wonderful Counselor’ 즉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함으로써, 훨씬 더 명확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시고,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와의 만남’입니다. 삭개오는! 비록 세리장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에 평안과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의 직업에서 비롯된 ‘사회적 따돌림과 소외’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돌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 아래에 멈춰서서 삭개오를 쳐다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① “삭개오야!” -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 / 예수님이 길에서 처음 본 사람에게 ‘이름을 불러주신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외였습니다. “삭개오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삭개오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주셨을까요? 사실 그 이유는! 상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담의 본질이! 먼저 내담자의 마음을 공감해 주는 것이라면, 이웃들에게 비난받고 따돌림받아 ‘외로운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애송하는 시 가운데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는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싯구를 좀 보겠습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 시에서 표현된 대로, 삭개오도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지금까지 이웃들에게 소외된 채로 비난받고 무시당하며 외롭게 지내는,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아름답고 기쁜 꽃으로 다가왔습니다.
삭개오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가 세리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해줬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긴 훈계나 설득, 또는 비난으로도 열 수 없었던 삭개오의 마음이! 놀랍게도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을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② “속히 내려오라” - 마음을 전하시는 예수님 /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하신 두 번째 말씀은, “속히 내려오라(Come down immediately)”입니다. 상담자에게 꼭 있어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상담자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내담자에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두 번째 말씀에는! 삭개오를 빨리 만나고 싶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속히(immediately)’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삭개오를 가까이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위대한 상담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소외된 자들, 어려움 가운데 외로운 사람들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서는 마음과 행동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③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 속마음을 읽고,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예수님 / ‘위대한 상담자’로서의 예수님이 제일 잘 드러나는 대화가 바로 이 세 번째 말씀입니다. 진정한 상담자는 내담자가 이야기하지 않는 속마음까지도 읽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신 이 말씀은 ‘오늘 너의 집에서 먹고 자고 가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따돌림당해 외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삭개오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고, 행동으로 공감해 주시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삭개오와 가까이 있는 것조차 꺼리는 상황에서 ‘그 집에 가서 먹고 자겠다’고 하시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나 비난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나는 네 편에 서주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가시자,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습니다. 눅 19:7 →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만일 이런 반응을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바라보면서, 그저 말로 “나는 너의 친구다. 나는 너를 다른 사람들처럼 비난하지 않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예정된 길을 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삭개오의 마음이나 삶은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마음과 삶이 변한 것은! ‘말’만이 아니라, 다른 이웃들의 비난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을 삭개오의 집에서 묵으시는 ‘행동’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예수님의 용기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2. 삭개오의 변화와 구원
상담의 효과는 내담자의 변화로 검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삭개오가 예수님과 만난 후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①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감정의 변화입니다. / 예수님께 상담을 받은 후 삭개오가 제일 달라진 것은 “즐거워졌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자에게, 쉼을 얻게 하는 것”이 상담의 목적이라면, 삭개오의 이런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즐겁지 못하고 괴로운 것은! 마음속에 해결하지 못한 무거운 짐을 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상담자’이신 예수님께서 그 짐을 덜어주시면, 당연히 우리는 즐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②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행동의 변화입니다. / 예수님과 만난 후 삭개오는 감정만 변한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까지도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세리장으로서 이웃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모아온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삭개오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가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동포들의 충고와 설득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리장이라는 직책을 포기하지 않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삭개오가 깨달은 것은! 재산이나 지위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삭개오는, 진정한 행복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평안과 쉼을 얻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삭개오에게 사회적 지위나 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맛본 삭개오는! 이제 예전의 삭개오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결과 삭개오는! 지금까지 중요하게 생각해오던 재산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③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영적인 변화와 구원입니다. / 삭개오는 처음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who Jesus was) 알아보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실 그는 아직도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스승 중의 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만나고 난 후, 삭개오는 영적인 변화를 겪으며 예수님께 “주여(Lord)”라고 고백합니다. 눅 19:8 →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한 번도 언급하신 적이 없지만, 삭개오는 단지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그가 구세주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놀라운 영적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삭개오의 변화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는 말씀으로 축복해주셨습니다. 눅 19:9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삭개오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눅 19:10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멘! 우리도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외적인 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그런 눈과 마음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고 다가서는 자들이 되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세상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길임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부자가 되려고 하기보다, 나누는 부자, 섬기는 부자, 사랑하는 부자가 되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어야 할 전도대상자는 누구인지? 서로 나누고 함께 그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선 저는 부모들이 자식을 키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으로 ‘편애하면 안 된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편애는! 사랑을 받는 편에서는 좋을지 모르나, 사랑받지 못하는 편에서는 그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되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경을 보아도! 부모의 편애 때문에 형제들 간에 문제가 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가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큰아들 ‘에서’보다 작은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고, 훗날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 편애 때문에, 형제들 간에 그야말로 살인이 일어날 정도로 갈등이 심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애는 결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편애는 한마디로 부모의 지혜 없음의 극치입니다. 물론 자식들을 똑같은 무게로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슨 이유이든 마음이 더 쓰이는 자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세심하고 표시 나지 않게 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몫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식들 가운데 더 마음 가는 정도가 심하게 느껴지신다면! 하나님께 잘 처신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2. 섭섭함을 토로하는 큰아들
오늘 본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둘째 아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옴으로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혀주고, 가락지를 끼워주며, 새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은 백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 있는 큰아들의 마음을 좀 더 세심하게 살폈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러면! 큰아들은 뭘 하고 있다가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습니까? 25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눅 15:25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즉 동생이 재산을 챙겨서 먼 나라로 떠나 허랑방탕하게 지내면서 재산을 낭비할 동안, 형은 집에서 성실하게 밭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무슨 날도 아닌데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종을 불러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종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눅 15:27 →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집을 나갔던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주고 있다고 하니,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고, 나중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큰아들은 이렇게 행동합니다. 눅 15:28 → “그가 노하여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이런 형의 행동을 ‘참 속 좁은 형이다!’ 이렇게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지혜로운 아버지란 말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잔치를 벌이기 전에, 아버지는 먼저! 밭에 나가 일하고 있는 큰아들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큰아들의 의견을 물어서 잔치를 벌였으면 좋았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작은아들을 사랑하는 것이야 아버지의 절대주권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준 큰아들의 공로와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 역시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큰아들의 모습에서, 왠지 성실함으로 말없이 일했던 노동의 설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생각해 보세요! 큰아들이 자기 동생처럼 유산을 앞당겨서 받아, 큰돈을 만져봤습니까? 아니면, 먼 나라로 여행 한번 가봤습니까? 그렇다고 원 없이 돈을 써봤습니까? 그냥 시골에 묻혀서 밭일이나 하고 있었으니, 그 마음에 얼마나 설움이 쌓였겠습니까? 오죽했으면 큰아들이 이렇게 말합니까? 눅 15:29 →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동안 쌓인 감정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상시에 큰아들의 마음을 더 살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너무 표나게 작은아들만 그리워하면서, 밥도 제대로 안 잡수시고, 문밖에 나가서 온종일 동구 밖만 쳐다보면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보는 큰아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도대체 집에 남아 있는 나는 뭔가?” 이런 생각으로 가슴에 멍이 들었을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그 마음에 응어리가 쌓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서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지혜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들 즐거움으로 봉사의 일을 나눠 맡아서 잘하고 계시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대개 “일하는 사람만 일을 합니다.” 즉 일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 기쁨으로, 자원해서, 믿음으로 봉사하면 별문제가 없지만, 혹 떠밀려서, 할 사람이 없어서, 엉겁결에 맡았기에 할 수 없이 일하게 되면, 그 마음에 불만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불만과 억울함을 쏟아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도 자기 동생의 허물을 들춰내고 있습니다. 즉 동생에 대해서 독설을 내뱉고 있습니다. 눅 15:30a →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 그동안 큰아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몰라서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니요, 바보 같아서 참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동생에 대한 미움과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으로, 마음의 칼을 갈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의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큰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 15:29∼30 →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①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②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③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④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말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①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하며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고 ② “내게 염소 새끼라도 잡아 주었느냐?”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으며 ③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까?”라며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고 ④ 더 나아가 “왜 동생을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으셨습니까?”라며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버지는 큰아들이 속으로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눈치 없는 아버지는 큰아들의 항의에 속으로 뜨끔했을 것입니다.
3. 따뜻함으로 문제를 풀어내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동생이 보기 싫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큰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집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건넵니다. 눅 15:28 →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여기 ‘권한대’라는 말은 → “곁에 서서 다정히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는 큰아들의 마음 상함을 알고 있었기에, 어찌 보면 작은아들에게보다 더 다정하고, 더 친절하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는 근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이든 작은아들이든!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눅 15:31 →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지금 큰아들이 가진 불만의 저변에는, 재산에 대한 문제가 깔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큰아들의 마음을 아버지는 알았기에 “나와 함께”라는 ⇨ ‘심리적인 안정’과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 ‘물질적인 안정’에 대해서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아가서 아버지는! ▸ 큰아들에게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32절) 동생을 불쌍히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간의 화목을 위한 열쇠는 결국 큰아들이 갖고 있기에, 큰아들에게 동생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와 용서는! 연장자가 할 때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32절)라고 말하면서, 이 아비의 심정도 알아달라고 큰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눅 15:32b →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우리’라는 말로 ‘가족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동생은 남이 아니요 가족이며, 동생이 돌아오므로 깨진 가족 공동체가 마침내 회복되었고, 그래서 다시 ‘우리’가 되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은! 섭섭해하고 미워하며, 등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마땅히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때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에 이 가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사랑으로 화해하고 다시금 화목한 가정으로 하나를 이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 부모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이 있으면 회개함으로 돌아가시고, 형제자매간에 등 돌린 이가 있으면 사랑으로 화해해서, 하나님 안에서 반석 위에 든든히 선 복된 가정을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편애(偏愛)의 문제점에 대해서 나눠보고, 감정을 넘어 지혜롭게 처신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아버지의 설득으로 큰아들은 마음을 풀고 집으로 들어가 기쁨으로 그 잔치에 참석할 수도 있고, 반대로 동생 이 했던 것처럼 집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큰아들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하고 나눠봅시다.
3. 탕자가 고백한 말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런 고백이 있으면 모두가 새로워지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나는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회개의 고백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 실천하십시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공관 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오는 말씀입니다.(마 13:31∼31; 막 4:30∼32; 눅 13:18∼19) 수십 개가 넘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공관 복음서에 다 나오는 비유는 다섯 개 정도인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겨자씨 비유’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경인 도마복음에도 이 비유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도 아주 중요한 비유였기 때문에 ‘겨자씨 비유’가 이렇게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말씀까지 세밀하게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본문보다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막 4:30∼32 →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성도 여러분! 이 짧은 비유의 요점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중의 온갖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큰 가지를 가진 나무’로 자라나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씨의 대명사가 ‘좁쌀’이지만, 유대인들은 겨자씨를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으로 여깁니다. 겨자씨는 길이가 1∼2cm 정도 되는 꼬투리에 들어가 있는 아주 작은 씨앗들인데, 지름이 겨우 1mm 정도밖에 안 되는 흑갈색 씨앗입니다.
이 겨자씨는 매우면서도 향기가 있어서, 조미료나 약용으로 쓰이는 씨입니다. 겨자는 1년 초 혹은 2년 초 식물인데, 최고 2m까지 자라납니다. 이렇게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서 여러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셨던 것입니다.
2. 겨자씨 비유의 비밀 3가지 - ① ‘대조’ ② ‘성장’ ③ ‘포용’
그렇다면 이 ‘겨자씨’와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겨자씨 비유’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조’ ‘성장’ 그리고 ‘포용’입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① 대조 : 무엇과 무엇의 대조입니까?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 한 알’ vs ‘공중의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 한마디로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큰 것으로 성장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겨자씨가 땅에 심겨지기 전과 후를 대조해 봅시다. 겨자씨는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심긴 후에는 ‘모든 나물보다 크게 자라고, 심지어 가지를 내어서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즉,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는 것! 이렇게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달라진 모습 속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쉽게 ‘하나님 나라!’ 하면! 그 나라는 엄청난 힘과 크기를 가진 나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 로마 제국이나, 엄청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오늘의 미국과 같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나라로 연상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경쟁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그 힘의 크기에서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적의 나라, 군사 · 경제적인 제국, 이런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씨앗, 막 4:31의 말씀대로 한다면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작은 씨” 즉, ‘겨자씨 한 알’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보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소리 없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것 하나를 소홀히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일 속에 사랑과 생명이 있으면! 그것은 크게 자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또 지역사회에서! 작은 봉사 하나, 작은 사랑 하나를 실천하게 될 때, 바로 거기에서부터 커다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됨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성장 : 여기에는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즉, ‘썩어짐으로 자라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생을 통하여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역시 마가복음 본문입니다. 막 4:32 →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동사들이 있습니다. ⇨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라는 말입니다. 모두 성장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장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씨가 심겨지고 썩어 없어질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희생을 통하여 성장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2: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은 <‘희생’이 ‘성장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은! 자신이 썩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희생’에 의해서 ‘성장’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성장이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희생의 댓가를 치른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50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특별히 3번의 성전건축과 리모델링을 하면서 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쾌적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희생과 헌신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점점 자라나고 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미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 그것은 반드시 성장하고 확산케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썩어져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성장 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봉사, 작은 희생으로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포용 :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을 품을 만큼 넉넉한 나라’입니다. <작은 씨앗이었는데! 많은 새들이 깃들일 만큼 넉넉한 가지를 가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9절 후반부를 보겠습니다. 눅 13:19b →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는 ‘가지에 깃들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새들의 은신처 혹은 쉼의 터전을, 한 작은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로 자라나서 그것을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들과 것들을 ‘포용’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시겠지만, 요즘 들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사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참 고마운 나라였습니다. 식량 원조로 세계를 먹여 살리고, 무상 의약품을 공급해 수많은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이 예방접종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고,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무역 항로를 지켜줘서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게 했고, 때론 무력으로 개입해서라도 불의한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역할을 포기했습니다. 민주주의나 자유무역 경제체제, 과거의 형제애나 동맹의 가치! 이런 것들은 다 필요 없고, 미국의 이익에 우선하는 정책을 펼쳐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온 세계가 뒤숭숭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현실에 당혹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의와 공정, 약자에 대한 돌봄과 배려, 선한 가치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헌신짝처럼 내 던지고, 그저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면서! 말을 안 들으면 힘으로 관세로 밀어붙이겠다는 작금의 태도는! 그동안 쌓아왔던 신뢰와 고마운 마음을 한꺼번에 잃게 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제국도 물리적인 힘만 세다고 해서 그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발적으로 따르고 함께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힘이 있어야 제국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힘을 학문적으로는 ‘헤게모니’라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힘이 센 자 많이 가진 자가 솔선하여 겸손하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희생의 십자가를 지신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런 ‘겸손과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지배하는 강압적인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이 지배하는 평화의 나라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순절기를 지내고 있는 성도님들! 겸손과 낮아지심, 희생과 헌신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나도 따르리라!’ 마음먹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가는 선한 일꾼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작은 사랑, 섬김, 헌신이 큰 결과를 만들어낸 경험이 있다면 나눠보고,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나 자신과, 우리 가정,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나라는 포용성 측면에서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눠보고, 포용성을 높일 수 있는 마음과 역할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렇게 질문합니다. 눅 10:25b →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질문을 던지십니다. 눅 10:26b →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를 되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라는 질문 다음에, 하나의 질문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생 얻는 방법을 묻는 율법교사에게 대답 대신, 결이 다른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특별히 두 번째 질문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첫째는, ‘율법에 쓰여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 율법을 너는 어떻게 읽고 있느냐?’ 즉,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율법교사는 신명기와 레위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해서 아주 능숙하게 대답합니다. ① 신 6:5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어 ② 레 19:19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수직적 계명과,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계명까지 대답했으니, 그의 대답은 백 점 만점입니다.
하지만, 이 율법교사의 대답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을 들으시고는 “네 대답이 옳다”라고 답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영생을 얻기 위한 율법의 가르침을 ‘네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도 네 말에 동의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율법교사로부터 듣지 못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이 직접 알려 주셨습니다. → “(네 대답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라.”
그런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는 “네 대답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라.”는 이 두 문장이 서로 붙어 있습니다. 눅 10: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하지만! 이 두 문장, 두 말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원하심인지? 그 정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 말씀이 성경 어디에 쓰여 있는지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요청 앞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적절히 행하라’ 또는 ‘요령껏 행하라’가 아니라, “그대로 행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네가 잘 알고 있구나!’ 그러니 ‘그대로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 자체로 매우 큰 부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다음 문장을 듣게 되면, 그 부담은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눅 10: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해야만 산다’고 하시니! 참으로 막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생을 구하는 율법교사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난데없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또 다른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는 말씀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어야 했습니다. ⇨ “네 주님!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엉뚱하게도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무언가 많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등장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평가를 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에겐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이들에 대해서 단순하게 윤리적인 평가 또는 신학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쉽지 않은 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없었지만,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있었던 것, 달랐던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자마자 사마리아인에게 들었던 ‘감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눅 10:33b →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불쌍히’ 여깁니다. 측은지심이 든 것입니다.
여기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는 단어와 표현은 같은 누가복음 안에서 먼저 7장 13절에 등장합니다. 눅 7:13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인 성의 한 과부가 죽은 아들 곁에서 슬피 우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5장에서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며 달려 나온 아버지를 묘사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눅 15:20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러니까 누가복음에서 ‘불쌍히 여기다’ 혹은 ‘측은히 여기다’라는 표현은! 실의와 절망에 빠진 인간에 대한 ‘애끓는 감정’을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없었던 이 마음,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긍휼의 마음에 충실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34절과 35절에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 ① 가까이 다가가서 ②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씻고 싸맸습니다. 그리고 ③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④ 일단 비용을 지불하고, 나중에 비용이 더 들면 추가로 지불 할 용의가 있음을 여관 주인에게 밝힙니다. 비유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3. 누가 내 이웃인가? vs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한번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눅 10:36b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앞서 29절에서 율법교사가 한 질문과 짝을 이룹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눅 10:29b →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기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말과 vs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는 말은! ⇨ 아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말입니다. 전자의 질문, 다시 말해 율법교사의 의도는! 내 이웃의 범위를 한정 짓겠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내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내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치 않고, 나와 입장을 달리하더라도, 내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이웃 섬김에는 제한도 없고 범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의 마음에도 어떤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자비를 베푼 사람이니이다.”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답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율법교사에게 반복하여 당부하십니다. 눅 10:37b →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여라.” 이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순서대로 죽 살펴보면 이렇게 됩니다. 눅 10: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① 네 대답이 옳도다. ② 이를 행하라. ③ 그러면 살리라.” 이것을 좀 쉽게 풀어서 말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 “그래! ▸ 네가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잘 알고 있구나!’ 그러니 ▸ ‘그대로 행하라.’ ▸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기 위한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도,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고, 또한 그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렇게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거 중요하지!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이런 생각과 판단이 거의 진리처럼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사랑의 방법을 친절히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다면 불쌍히 여기고,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가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라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거나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냥 필요를 채워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었음에도, 못내 이웃을 돕는 일에 썩 나서게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비유 속에서 우리 자신이! 지나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를 만나서 매 맞고, 빼앗기고, 쓰러져, 거반 죽게 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누군가의 즉각적인 도움이 없다면, 곧 죽을 사람이 바로 나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제발 누군가가 나의 그런 형편을 보고 가까이 다가와 불쌍히 여겨 상처를 닦고 싸매고, 업든지 자동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옮겨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 아닙니까?
이렇게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너무나 당연하고 쉽습니다. 냉혹한 현실 인식과 이기주의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가졌던!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기의 것을 기꺼이 소모하며 구조하려고 애썼던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인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네 대답이 옳다.(앎) ▸그대로 행하여라.(행함) ▸그러면 살 것이다.(영생) ⇨ 이 말씀 중 어디에서 나는 주저하게 되고 막히는지 나눠봅시다.
2. 당신에게 ‘하나님 사랑’이라는 수직적 계명과,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계명 중 어떤 계명이 더 어려운지? 왜 그런지? 나눠봅시다.
3. 우리는 이웃을 고르려고 하고, 사랑을 베푸는 정도와 수준도 적절히 조절하려고 합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순절 기간동안‘차별 없는 사랑의 실천’ 계획을 나눠봅시다.
오늘 본문은 열두 제자들이 현장으로 나가 전도하고 돌아와 그 결과를 예수님께 보고한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버나움 건너편, 벳새다에 있는 한적한 빈들로 가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었지만! 막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피곤한 것을 아셨기에, 그들을 좀 쉬게 하고자 빈들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벳새다 광야에 도착해보니,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엄청난 인파가 그리로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33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리리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도보로 그곳으로 달려와, 오히려 그들보다도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은! 마실 물과 먹을 꼴과 쉴 안식처로 인도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목자 없는 양은! 살았으나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를 오늘의 말로 바꾸어 보면,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엄밀히 말해서 지금 광야의 무리는! 자기들이 제 발로 걸어서 거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제자들이 초청한 것도 아니요, 그들을 강권하여 억지로 데려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그 무리에게 먹을 것을 대접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나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을, 나더러 먹이라고 하시는가? ▸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눈감고 모르는 척할 수 없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빚을 졌는가? ▸왜 주님은! 우리더러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나는 나의 제자들이 ‘남을 먹이는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 못 먹어 끼니를 굶는 사람들을 ‘너희가 좀 먹여 살릴 수는 없겠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더 깊은 뜻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거기 모인 사람들이 불쌍해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너희가 주라!” 하신 점도 있겠지만, 장차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남을 먹이는 인생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명하신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2. 남을 먹이려는 인생이 되려면!
① 계산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계산을 하다 보면, 언제나 우리 가정을 꾸려가기에도 충분치 않습니다.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사람들은 항상 돈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계산하기 시작하면, 절대로 ‘남을 먹이는 인생’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숫자’가 더 많아서, 전쟁에 승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기드온의 3백 용사들이 ‘숫자’가 많아서 미디안 10만 대군을 물리쳤습니까? 절대로 ‘숫자’를 가지고 승리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주님의 일을 ‘숫자’를 가지고 하려고 하는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보시고,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렙돈’은 어른의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1/128입니다. 그만큼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액수나 숫자로 따지지 않으시고 과부가 가장 많은 돈을 헌금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작은 것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남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해서, 계산에 밝은 사람이 아니라, 그래! ‘나는 남을 먹이는 인생이 되리라!’ 이렇게 마음먹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② 남을 먹이면 나도 산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3년 6개월 가뭄 가운데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줌과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아들과 먹고 죽으려 했던 사렙다 과부!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그 떡을 만들어 자기에게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사실, 지금 사렙다 과부는 남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도우니까 기적이 일어나서,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먹을 것을 찾으신다고 하니, 한 아이가 5병 2어 자기 도시락을 기꺼이 제자 안드레에게 드렸습니다. 만일 이 아이가! 못 들은 척하고 그냥 혼자 먹었다면! 아니면 그걸 받은 안드레가 먹어버렸다면! 한 명이 먹기에도 충분한 분량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남을 돕는 마음으로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니, 남도 살리고 자기들도 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물론! 남을 돕다 보면, 자기가 못 먹을 때도 ‘잠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자기의 배가 부른 것 같은 행복과 정신적인 포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그런 영적 배부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통해 그녀를 구원하셨습니다. 마침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 4:31∼34 →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네! 이렇게 남을 살리고 구원하여 누리게 되는 ‘영적 배부름’을 사모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선진국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함
오병이어로 장정만 5천 명! 그러니 최소 1만 명 이상을 배부르게 먹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먹고 남은 조각을 다 거둬 모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았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1인분의 양식으로 5천 명, 1만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이, ‘남은 것을 다 모으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쩨쩨하게 보이십니까? 아니면 비효율로 보이십니까?
성도 여러분! 필요하면 얼마든지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예수님이! 남은 것을 다 거두라고 하시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네! 그것은 ‘욕심부리지 말아라. 낭비하지 말아라! 절약해라!’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각성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연구 조사에 의하면 선진국 사람들은 ⇨ 인간이 기본적으로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 에너지의 ‘4백 배’나 더 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니, 2~3백 배를 쓴다고 봐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화장실을 사용하고 아무 생각 없이 변기의 물을 내리지만,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 분량의 물이면 하루 종일 사용하는 분량입니다. 아니, 그 분량만큼의 물도 못 쓰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 외 우리는 전기, 음식, 육류, 옷, 종이 등 모든 자원을,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보다 수백 배나 더 쓴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많이 부유해지고, 많이 소비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과거보다 더 행복해졌습니까? 우리가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은! 결코 소득이 높은 순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죄’에 대한 ‘개념’과 그 ‘범위’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개인이나 민족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죄’에 대한 가치관과 관점이 약간씩은 다르지만, 근자에 환경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자원의 무분별한 낭비,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행위’를 큰 죄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고 남용하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산화탄소의 대량 배출, 환경오염, 무분별한 자원 낭비’ 같은 행동을! 사기, 간음, 살인과 같은 큰 죄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토크쇼의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결심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땀 흘려 번 돈을 가지고, 자기의 구두, 옷 그리고 가족이 먹을 것을 사고 구매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삽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번 돈으로, 내 옷과 구두를 사는 즐거움과 행복! 그 이상의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프라 윈프리는 ‘그 이상의 무엇을 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아동들을 위해서 학교와 체육관을 지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능한 많은 돈으로, 누군가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축복받아서 잘살게 되었다고, 많이 먹고, 많이 쓰면서 나는 행복하다고 자기를 과시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5천 명이 먹을 분량을 모았다”라고 자랑하지 말고 ⇨ 대신,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쓰는 에너지가 가난한 사람들의 3~4백 배 이상이라면, 그것을 절약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어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한번 자신을 평가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내가 번 돈으로, 내 옷과 구두를 사는 정도로 만족하며 사는 인생인가? 아니면, 주님의 명령을 따라 ‘남을 먹이는 인생’으로 살려고 힘쓰는가? 우리 교회가 수백, 수천 명 모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가 수천 명을 먹이는 그것을 자랑하게 되는 교회로 성장 성숙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왜 주님은! 우리더러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시는가에 대해서 자신들의 생각이나, 마음먹은 것을 나눠봅시다.
2. 선진국 사람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 에너지의 ‘4백 배’나 더 쓴다는 결과에 대해서 당신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 상태를 아주 명확하게 분석해주셨습니다. → 첫째는, ‘길가’와 같은 굳은 마음이요. 둘째는, ‘돌짝 밭’과 같이 깊이가 없는 마음이요. 셋째는, ‘가시덤불’이 왕성한 잡초마음이요. 넷째는, ‘좋은 땅’의 옥토 마음입니다.
이것을 C자로 시작하는 영어단어 4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 ① Closed mind(닫힌 마음) ② Casual mind(건성적인 마음) ③ Carnal mind(육욕의 마음) ④ Careful mind(진지한 마음)입니다. 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와 반응’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평가’인 것입니다.
1. 닫힌 마음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다 보면, 씨가 길바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길바닥은 딱딱하기 때문에 씨앗을 품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새들이 와서 그 씨앗을 주워 먹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직선적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아예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귀를 닫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생명을 가진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습니다. 참 불행한 인생이지요!
오늘 비유를 잘 살펴보면, 문제는 ‘씨앗’에 있지 않고 ‘흙’에 있습니다. 길바닥의 흙이 너무 딱딱한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 고집스럽고 굳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 까닭은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닫힌 마음’의 사람에게는 어떤 부작용이 초래되나요? 12절입니다. 눅 8:12 →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네! 마음이 완악해져 있기 때문에, 사탄이 그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 마귀는 먼저 사람의 마음을 굳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깨달음이 없게 하고, 감동이 없게 하고, 은혜가 없게 합니다. 오히려 마음을 더 강퍅하게 만듭니다. 오해가 앞서게 하고, 해석을 왜곡되게 합니다. 그래서 돌이킬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고, 충격을 받아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입니다. 그는 자기의 마음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 ‘사탄’이라는 사실에 놀란 것입니다. 만약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내 삶이 변화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사탄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 아닌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날부터 존 번연은 설교를 듣는 태도부터 달리했습니다.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참된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수 세기 동안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천로역정’의 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듣는 마음, 듣는 귀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 성령님은 우리 심령의 귀를 열어 듣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말씀이 가슴 깊이 들리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얕은 마음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다 보면, 흙이 얕은 너럭바위 같은 곳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밭은, 두꺼운 석회암층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는 밭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므로, 가물 때 쉽게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13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눅 8:13 →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네! 깊은 뿌리가 없는 신앙, 감정적인 신앙, 소위 냄비 신앙인을 말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감동을 받습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기쁨과 희열을 느낍니다. 소망을 갖고 좋아합니다. 결심도 합니다. 굳게 다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오래가질 못합니다. 잠깐뿐입니다. 너무 쉽게 요동하고 넘어집니다. 예배 시간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으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입니다. 은혜를 받자마자 금방 쏟습니다. 열심을 품는 듯 하다가 한 순간에 침체에 빠집니다. 감정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반짝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이런 기분파 신자들이 의외로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밴댕이 속처럼, 깊이가 없는 사람은! 작은 어려움만 만나도 바로 뒤돌아서고, 금세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6절입니다. 눅 8:6 →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 ‘습기가 없어서 말랐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깊이 있게 성장하려면, 눈물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깊이 있는 신앙은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 성공의 3요소로, ‘눈물과 땀과 피’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때로는 피 흘리는 희생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눈물이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 성도들은 냄비 신자가 아니라, 시련과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눈물로 신앙의 뿌리에 습기를 공급하여, 마르지 않는 깊은 영성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잡초 마음입니다.
세 번째 밭은, 곡식과 함께 ‘가시’ 즉 ‘잡초’가 같이 자라므로 열매 맺지 못하는 땅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대로, 곡식보다는 잡초와 가시가 훨씬 빨리 자라고 크게 자랍니다. 이런 잡초와 가시가 자라면서 자양분을 뺏어 먹고, 또한 크게 자라 그늘을 만들어, 곡식을 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곡식은! 겉모양은 갖췄지만, 속이 차지 않은 쭉정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이런 잡초에 휩싸인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나름 괜찮은 신앙인입니다. 그런대로 준수하게 교회도 출석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왜요? 세상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아까운 것이 너무 많은 신앙인! 그런 사람이 바로 잡초에 휩싸인 신앙인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눅 8:14 →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여기서 세 개의 가시를 말합니다. 첫째는 ‘세상의 염려’이고, 둘째는 ‘재물의 유혹’이고, 셋째는 세상의 쾌락에 탐닉하는 ‘향락’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세상의 ‘환란’이나 ‘핍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생활에 대한 염려와, 세상의 향락을 추구하는 잡초마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갈지를 잘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딤후 3:1∼5 →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네, 종말이 가까울수록!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성읍 사람들처럼, 술 취함과 방탕과 음란과 육체적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
네! 우리 성도들도 건전한 장소에서, 적당한 휴식과 오락,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락이 주업이 되고, 쾌락이 목적이 될 때, 그것은 무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즐거움과 세상의 기쁨을 얻기 위해, 신앙과 영적 성실성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분명 가시와 잡초에 묻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영적 기운을 막는 것들은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사실 은혜 받는 길, 열매 맺는 일, 좋은 신앙인이 되는 길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잡초를 뽑아내고, 가시를 잘라 버리면 됩니다. 물론 세상염려를 자르고, 욕심을 뽑고, 잘못된 습관을 제거하고, 정욕을 불살라 버리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잡초에 휩싸인 인생으로 그냥 살면! 결과는 쭉정이 신자가 되고, 추수 때에 아궁이에 던져지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4. 옥토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서 여러 가지 잘못된 밭의 상태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옥토는 어떤 밭입니까? 좋은 땅입니다. 눅 8:15 →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네! 앞서 8절에서는 좋은 땅! 옥토에 씨앗이 떨어지기만 하면 100배의 결실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런 옥토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네! 옥토는 본래부터 있었거나 저절로 만들어진 땅이 아닙니다. 모든 땅은 처음에는 불모지와 같은 험한 땅이었으나, 농부가 끊임없이 땀 흘리며 수고하고 개간하여 옥토가 된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농부의 땀과 수고와 눈물이 있어 옥토가 되듯이, 우리의 마음 밭이 옥토로 변하도록! 참고 인내하며 때론 수고하며 힘쓰고, 어떤 때는 눈물 뿌리며 희생의 피를 기꺼이 흘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실 옥토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설교의 목적은! 네 종류의 마음 상태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좋은 땅,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변화되라는 것입니다. 네! 우리 모두 옥토 성도가 되어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말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사탄의 계락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나요? 이에 대해서 나눠보고 주여! ‘듣는 마음을 주옵소서!’ 기도합시다.
2. 당신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영적 기운을 막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성경의 4가지 마음 밭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 밭은 어디에 가장 가까운지 생각해 보고, 그것을 벗어날 자신의 결심과 계획을 나눠봅시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자녀들을 잘 길러,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키워낸다면,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큰 보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자녀들이 사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큰 인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죄인을 변화시키시고, 제자로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알패오의 아들 레위! 세리 마태입니다. 그는 손가락질받던 세리였습니다. 그런 그가! 후일 위대한 사도가 되고,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울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의미 있게,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울 수 있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지혜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볼 때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어, 그야말로 사람에 치일 정도로 바쁘게 사역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한 사람, 한 영혼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눅 5:27 →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레위를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시고’라는 단어는 → 에이덴(είδεν)인데! 그냥 무심코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의 직업을 보았고, 매국노적인 삶을 보았고,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한 사람!(a man) 레위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레위가 가지고 있는 양심의 갈등을 보셨고, 돈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허무를 보셨습니다. 자신의 직업과 인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보셨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천국 복음을 듣고 있지만, 레위 자신은 고독하게 세관에 앉아 있어야 하는 외로움을 보신 것입니다.
레위는 후일 주님께 새로 받은 이름으로 ‘마태복음’을 쓸 때, 자신의 이전 모습과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 9:36 → “무리를(레위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네! 예수님의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눈과 마음,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과 긍휼의 눈빛이 레위의 인생을 바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는 큰 것, 대단한 것, 많은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많은 군중을 접하면서도 절대로 놓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 한 영혼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세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의 잘못 살아온 과거에 근거한 비판과 선입견의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고, 그저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의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 존재의 내면 깊숙한 곳의 아픔과 외로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변화되었을 때의 가능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대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의 음성으로 다가가세요. 그러면 그때부터 변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 인생의 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변화되고 세워지게 됩니다.
당시 ‘세리’는 천하의 매국노! 동족의 피를 빠는 수전노로 취급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직업을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물질적인 보장과, 직업의 안정성’이 담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과 정죄와 조롱하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 일을 했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레위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도전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follow me! 눅 5:27 →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것은 인생의 새로운 ‘방향 제시’입니다. 물질 중심적인 삶에서 ⇨ 영적인 삶으로, 죄악의 안락에서 ⇨ 진리의 모험으로, 이기적인 삶에서 ⇨ 공동체적인 삶으로 나오라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음성에 ‘레위’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였을 때, 그는 즉시 응답했습니다. 눅 5:28 →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할렐루야!
여기 ‘모든 것’이란?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왔던 ‘물질적인 풍부, 직업의 안정성, 안락한 생활’을 말합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레위에서 마태로 인생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을 잃었지만,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 그 지방에서 악한 자로 명성을 얻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요, 복음서 저자로 세계적인 인물, 불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현재 시제 명령형’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안정된 삶도 중요하지만 ⇨ 하나님의 사명으로 살고! / 풍부한 수입도 중요하지만 ⇨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추구하고! / 안전도 중요하지만 ⇨ 영적 모험을 향하여 방향을 전환하라는 명령입니다. 문제는 영적 표지판, 방향 표시판이 되어야 할 나의 삶의 모습입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를 따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번 왔다 가는 인생!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데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거룩한 삶으로 도전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보! 신앙생활 이렇게 하는 거 아니잖아요!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겠어요?”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낙담해 있는 남편을 향해서 “여보! 우리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잖아요! 힘을 내세요. 내가 기도로 도울께요!”라고 응원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성육신하는 사랑과 용기의 태도를 가질 때 변화되고 세워집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영혼에 얼마나 큰 기쁨과 자유가 넘쳤는지! 많은 동료 세리들과 죄인 취급받던 사람들을 초청하여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눅 5:29 →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하지만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5:31∼32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사실 ‘누구와 함께’, ‘어디에 앉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당시 주류 세력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금했습니다.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이들로부터 대접을 받거나, 대접을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도무지 함께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할 때, 자신들도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정죄만 있고, 자비와 사랑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 함께 하셔서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레위가 잔치를 벌이고 예수님을 초청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믿음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외면받고, 멸시받던 그들과 함께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요, 용기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은 내용을 보도하는 마가복음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막 2:15b →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네! 많은 다른 세리와 죄인들이 변화를 받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른 사람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으로 보듬은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이름으로 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 명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의 ‘전직’을 밝히지 않으면서, 유독 자기 자신의 이름 앞에는 과거 세리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 10:3 →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마태가 굳이 자랑스럽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 부끄러움을 극복했다는 것이요, 또한 자신이 예수 안에서 얼마나 크게 변화된 사람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리 레위’가 앉았던 자리는 ‘죄악과 탐욕의 자리’였습니다. 민족을 배반하고 양심을 버리고라도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그의 초청으로, 이제 그는 예수님과 함께 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지셨던 이런 ‘용기와 사랑’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럴 때 사람이 변화되고, 세워지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그런 변화의 주인공, 세움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사람을 볼 때 판단하고 평가하는 성향입니까? 아니면 보듬고 감싸는 성향입니까? 사랑과 긍휼로 사람이 변화되고 세워진 간증을 나눠봅시다.
2. 당신은 세속의 필요와 안정의 자리 vs 보람과 헌신의 자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 결심한 고백을 나눠봅시다.
3. 화려하고 부족함 없어 보이는 세상 사람들도 영적 외로움과 갈등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눈과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갑시다.
말씀과 성령의 조화 (눅 24:49∼53, 행 1:1∼9)
오늘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감리교회와 중부연회 소식’을 성도님들과 잠시 공유하고자 합니다.
1. 선교 140주년 기념사업으로 진행되는 ‘평화통일 기도의 집’ 건립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세요. 제가 ‘상임위원장’이 되어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님들께서도 더욱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홍보영상’은 밴드에>
2. 이번 84회 ‘중부연회’에서 우리 교회가 ‘선교 모범상’을 받았고, 박경식 장로님은 근속 20년 상을 받았습니다.
모범상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인데 ① 지난 2011년 이래 4명(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속적으로 후원해 온 공로를 인정한 것입니다. ※ 선교사로 하여금 해당 나라의 국립 혹은 왕립대학의 ‘그 나라 국어과’를 졸업한 후에 시역을 시작케 한 정책 - 선교사가 해당 나라의 고급 언어를 익히게 되고, 또한 같이 공부한 학우들과의 인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장기적으로는 안정된 선교 기반을 다지게 한 점입니다.
② 아프리카 ‘토고’ 감리교회의 목회자 자녀들 70여 명에게, 지속적으로 학비와 기숙사비를 지원하여 임지를 떠나지 않고 안정적인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도운 점입니다.
수도 ‘로메’ 이외의, 지방에 세워진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목회지를 떠나는 일이 많다는 ‘토고 감리교회’의 고민을 듣고, 우리 교회는 수도인 ‘로메’에 세워진 기숙사 학교인 ‘존 웨슬리 중고등학교’에 지방 목회자들의 자녀가 입학하여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전액 장학금’으로 후원해 왔습니다.
3. ‘환경선교위원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중보기도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번 연회에서 ‘환경선교위원장’이 되어서, 앞으로 연회의 관련 사업들을 계획하고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 기도도 해주시고, 적극적인 협력도 부탁드립니다.
오늘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요지는,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의 3년간 ‘말씀의 기반’이 다져진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 이렇게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룬 신앙이라야, ‘건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1.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참 이해 안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두 제자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 몇 명 안되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나왔고, 마지막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가 다 도망갔으니! 예수님의 목회는 과연 성공한 목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엔 제자들의 측면에서 보겠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스승이 보통 분이셨습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탁월한 스승인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들었고, 그의 사역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일상생활을 늘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배신자도 나왔고,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다들 목숨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버렸던 그물을 챙겨 들고, 다시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들은 많이 들었고, 많이 보았고, 많이 깨닫기도 했고,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무기력했을까요?
그것은! 생각으론 알았고, 마음으론 절대 부인하지 않고, 떠나지 않으리라 결심도 했지만!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닥쳤을 때, 그렇게 할 실천의 능력, 삶의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뻔히 답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능력이 안 따라 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집에 냉장고도 갖다 놓고 에어컨도 설치해 놓았습니다. 온갖 가전제품을 다 들여놓았지만, 막상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처럼! 제자로서 외면적 모습은 다 갖추었지만, 내적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많이 아는 것도, 오래 믿은 것도, 직분이 높은 것으로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무기력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이 180˚ 바뀌었습니다. 언제부터 달라졌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약속하신 성령이 강력하게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비겁했던 제자들에게 신령한 용기가 넘쳐났습니다. 하나님 외에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도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주의의 전통도, 협소했던 민족주의도 그들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함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역사가 강력하게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제자들의 사역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4:12 →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네! 껍데기 같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지자! 능력을 행하는 제자들로 변했습니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들도 성령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조화
자,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실패했고, 성령님의 사역만 성공한 것이란 말입니까? 말씀 사역은 필요가 없고, 성령 사역만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복음서는 의미 없고, 사도행전만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눅 24장의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 1장의 첫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똑같은 내용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의사 누가’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인데, 사실 두 책은! 한 권의 책인데 너무 두꺼워서 ‘전편과 후편으로 나눠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전편인 누가복음에서는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 ▸그분의 가르치심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후편인 사도행전에서는 → ▸성령의 임하심과 ▸교회의 탄생 그리고 ▸성령께서 교회와 사역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어떻게 펼쳐 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반드시 완성되고야 말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흔히 ‘말씀 운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오직 말씀’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오직 말씀으로! sola scriptura!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외침은, 성령은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성경 지식은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껍데기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는, ‘체험이나 기적’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면 운행할 수 없듯이, 성령은 말씀을 벗어나서 역사할 수 없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신앙은 ⇨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 사역의 조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균형 ▸말씀과 성령의 일치, 나아가 ▸부활절과 오순절의 바른 관계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의 조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부활절로 문을 닫고, 사도행전은 오순절로 문을 엽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나 부활절로 끝나는 종교가 아니라, 오순절의 성령께서 새롭게 시작하고 역사를 펼쳐가시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부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부활절은 오순절로 새로운 부활 운동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바른 신앙은 ⇨ 균형과 조화입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메마른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은 신비주의로 그치고 말게 됩니다. 바른 신앙은 ⇨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이 함께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성도들이 살아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말씀 운동’과 ‘성령 운동’을 병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진수요 핵심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당당히 역사하실 수 있도록 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성령님! 환영합니다. 인정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내가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이 살고! 성령이 역사하면! 한국교회가 살고, 이 민족이 삽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고, 사모하여, 말씀에 바탕한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 영적으로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하나님의 자녀들! 무기력하고 자꾸 넘어지는 성도가 아니라, 능력을 행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산상수훈의 결론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초가 부실한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날 때 무너짐이 심한 것처럼, 말씀의 기초가 부실한 신앙은 쉽게 흔들립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전기가 연결되지 않은 가전제품의 무기력함과 성령충만하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비교해서,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바른 신앙은 균형과 조화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이 함께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눠봅시다.
말씀과 성찬 (눅 24:27∼35)
오늘의 말씀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로 알려진 이들입니다. 이들은 그동안 꿈꿔왔던 기대와 소망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꿈꿔왔던 소망이 무엇입니까? 21절에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희망을 실현시켜 주실 분으로 믿고 기대를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커녕,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참혹한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이 가졌던 희망의 종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겐 실망과 좌절감이 밀물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허탈한 마음으로 이틀을 보냈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저들은 자신들의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기 위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숨 섞인 탄식의 대화! 수심이 짙게 드리워진 슬픈 얼굴! 장차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모습은! 2천 년 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듣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1997년에 시작되었던 I.M.F 때도 어려웠지만, 지금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훨씬 더 어렵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는 탄식과 우려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고, 꿈도 희망도 다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아픔의 대화들이, 나라 구석구석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삶의 현장, 바로 여기도! 엠마오인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높은 지역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로 가는 길은 끝없이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치적으로도 엠마오는 예루살렘 서쪽에 있으므로, 엠마오를 향하여 가는 길은! 해가 저무는 쪽을 바라보며 가는 서향길입니다.
즉, 엠마오로 향하는 길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 길입니다. 땅거미가 찾아들 듯이 온갖 암울함과 낙담이 스며드는 길입니다. 얼굴엔 수심에 차고, 마음엔 절망이 일고, 몸은 피곤해지는 길이 바로 엠마오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들 곁에 한 사람이 따라붙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두 제자와는 달리, 가볍고 힘찼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지만! 두 제자는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심령이 싸늘하게 식어있고, 낙담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뜻하지 않은 이 동행자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벌써 날이 저물어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두 제자가 강권하여 그 동행자도 함께 여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행자가 베푸는 성찬을 받게 됩니다.
그때,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서 그가 바로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눅 24:30∼31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자, 성도 여러분! 두 제자가 ‘다시 마음이 뜨거워지고, 닫혔던 심령의 눈이 뜨여지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 하나는 성경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우리가 은혜받고 심령이 뜨거워지는 통로, 수단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예시하셨습니다. ‘은혜의 통로(수단)’ ⇨ ‘말씀’ ‘성찬’ ‘찬양’ ‘기도’ ‘금식’ ‘영적교제’ ‘전도’ ‘선행’ 등입니다. 그런데 지금 두 제자는 은혜의 통로 ‘2가지’에 접촉했습니다. 주님과 ‘말씀의 교제’를 했고, 또한 ‘성찬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제자의 마음과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이 부활주일 아침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찬을 받는 가운데 ▸찬양을 부르고 듣는 가운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심령도 뜨거워지는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짧게 은혜의 통로, 은혜의 수단 가운데 두 가지 ‘말씀’과 ‘성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
진정한 영적 회복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지금 두 제자는 주님께서 풀어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눅 24:27 →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에 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두 제자가 어떤 것은 믿지 못하고, 또 어떤 말씀에 대해서는 잘못된 기대를 가졌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바르고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오늘날 목사의 사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도들이 바르게 알고 깨닫도록 해설하고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사도행전의 베뢰아교회 성도들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행 17:11∼12a →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믿는 사람이 많고!”
두 제자가 그 동행자,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성경 말씀을 귀담아들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눅 24:32 →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고, 또한 배우기를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 있었습니까?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눅 22:61∼62 →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바른 신앙의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찬
그리고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성찬’을 받았습니다. 눅 24:30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이렇게 ‘성찬을 받은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눅 24:31a →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할렐루야! 네! 성찬을 받을 때, 두 제자의 영의 눈이 뜨여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꼭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신 예식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6:53∼5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그렇습니다. 성찬을 받는 것은 구원과 영생에 직결되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 받을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참여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영적인 눈이 열리고, 마음의 뜨거움을 회복하게 되고, 결국에는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눔과 묵상
1.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뜨거울 때와 식었을 때, 신앙생활이 어떻게 달랐었는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은혜의 통로에는 ‘말씀’ ‘성찬’ ‘찬양’ ‘기도’ ‘금식’ ‘영적교제’ ‘전도’ ‘선행’ 등이 있습니다.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사순절 특별히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내며, 가장 크게 은혜받은 예배나 기도회 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 (눅 20:9∼18)
오늘 비유는! 일반적으로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라고 불리는데, 저는 이 비유를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도 이 농부들의 모습 즉,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비슷한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이 말씀을 거울삼아서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세 가지 잘못된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 착각!
9절을 보면 이렇게 비유가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네! 포도원 주인이 농부에게 소작을 맡기기 전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막 12장에도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에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막 12:1 →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네! 그저 포도나무 몇 그루 심고 끝낸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도 치고, 포도즙을 짤 틀도 만들고, 경계를 위해서 망대까지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맡기실 때, 먼저 정성을 다해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주어 관리하게 했지만, 포도를 수확하려면 여러 해가 걸립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과일나무를 심으면! 첫 3년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 먹을 수가 없었고, 또한 4년째 열매는 하나님께 감사 예물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5년째가 돼서야 마침내 주인이 과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레 19:23∼25 →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결국, 포도원 주인은 4년 동안 기다리면서 농부들의 생활비를 보조해 주어야 했고, 포도원을 가꾸고 돌보는데 필요한 비용을 주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5년째 되는 수확의 계절에, 포도원 주인은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나오는 농부들은 감사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정성껏 마련해 놓은 좋은 포도원 덕분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인 주인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서 일한다는 ‘청지기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맡아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한 청지기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주인이 아니고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도록 맡겼더니, 마치 자기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양 은사와 달란트를 맡겨 주시고, 인생의 열매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노력과 능력과 기술로 얻은 것을 왜 하나님께 드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받은 월급을 아내에게 주면서 당신이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야 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전부 내 힘으로 하는 것 같지만!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이나, 대형 산불 앞에서 얼마나 미약한 인간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경험했습니다. 겸손함으로 본분을 망각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탐욕!
본문을 보면, 주인이 세 차례 종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눅 20:10 →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마땅히 농부들은 주인에게 소출의 일정 부분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계약의 의무입니다.
주인이 많은 것을 원한 것도 아닙니다. 소출의 얼마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는 주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첫 번째 종을 잡아서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얼마든지 법적 조치를 할 수 있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두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인내심과 관용을 가지고 기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번째 종 역시, 마찬가지로 대우했습니다. 눅 20:11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마가복음에는 이를 좀 더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2:4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여기서 우리가 관심해 봐야 할 구절은 ‘머리에 상처를 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머리를 때리는 것은! 명예를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명예는! 목숨처럼 귀하게 생각하는 가치였는데, 종의 머리를 때려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단지 그 종의 명예를 모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를 보낸 주인의 명예를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주인은 또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눅 20:12 →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여러 차례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더 완악해지기만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주인의 생각에는! 종들과는 달리 아들은 존중해 줄 것으로 알고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일뿐이었습니다. 눅 20:13∼15 →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주인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농부들은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한 마디로 ‘욕심’ ‘탐욕’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출 20장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열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출 20:17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런 계명을 주신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탐욕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 4:22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욕심에 사로잡혀 살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그는 십계명을 어기는 자요,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는 욕심이 내 마음에 깊이 터 잡고 있지는 않은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3. 완악함!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인이, 때가 돼서 소작료를 받아오라고 보낸 종들을 농부들은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주인은 세 번까지 참았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자기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나가도 한참 더 나갔습니다. 아들을 죽이면! 상속자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니, 포도원을 자기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고,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은 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농부들의 행동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① 그 ‘악함이 반복되었다는 점’입니다. 같은 죄를 네 번이나 반복해서 저질렀습니다. 도중에 자기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깨닫고’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② 그 ‘악함이 점점 더 심해졌다는 점’입니다. 처음보다 점점 더 그 죄질이 나빠졌습니다. 종을 때려서 내쫓았다가, 머리를 쳐서 능욕하고, 마지막에는 아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태도를 ‘완악하다’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마 13:15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렇게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마음이 단단히 굳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콘크리트가 일단 굳어지면!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딱딱하게 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삐뚤어진 채 굳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임에도, 미움이나 시기로 마음이 굳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당연히 불쌍하게 여기고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함에도, 마음은 돌처럼 차갑게 굳어진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 우리도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점점 더 죄가 커지고 죄질이 나빠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완악해진 마음은 반드시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굳어진 마음은 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심령이 은혜의 단비로 흠뻑 적셔져야 합니다. 은혜를 깨달아 말랐던 눈물이 다시 흘러야 하고, 작은 죄에도 애통해할 수 있는 예민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간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은혜를 힘입는 ‘고난주간’입니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핑계만 대지 마시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고난과 부활로 이어지는 이 한 주간조차도 주님께 드릴 수 없다면! 과연 그런 나를 주님의 아들이라고 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결심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농부가 아니라, 선한 청지기로 다시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착각, 탐욕, 완악함! 이 세 가지 가운데, 자기의 마음과 삶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단어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농부들은 선한 청지기로 살지 않고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들 가운데, 내가 주인 행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눅 19:1∼10)
1. 예수님은 위대한 상담자이시다.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예언한 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 9:6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① 기묘자라 모사라 ②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③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④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내용 중에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서 볼 말은 ‘기묘자라 모사라’라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말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고, 또한 느낌상 그렇게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질 않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영어로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아주 명쾌합니다. → “And he will be called ① Wonderful Counselor, ② Mighty God, ③ Everlasting Father, ④ Prince of Peace.” (NIV) 네! 이렇게 영어 성경은 ‘기묘자라 모사라’는 말을 → ‘Wonderful Counselor’ 즉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함으로써, 훨씬 더 명확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시고,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와의 만남’입니다. 삭개오는! 비록 세리장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에 평안과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의 직업에서 비롯된 ‘사회적 따돌림과 소외’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돌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 아래에 멈춰서서 삭개오를 쳐다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① “삭개오야!” -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 / 예수님이 길에서 처음 본 사람에게 ‘이름을 불러주신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외였습니다. “삭개오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삭개오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주셨을까요? 사실 그 이유는! 상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담의 본질이! 먼저 내담자의 마음을 공감해 주는 것이라면, 이웃들에게 비난받고 따돌림받아 ‘외로운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애송하는 시 가운데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는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싯구를 좀 보겠습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 시에서 표현된 대로, 삭개오도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지금까지 이웃들에게 소외된 채로 비난받고 무시당하며 외롭게 지내는,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아름답고 기쁜 꽃으로 다가왔습니다.
삭개오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가 세리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해줬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긴 훈계나 설득, 또는 비난으로도 열 수 없었던 삭개오의 마음이! 놀랍게도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을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② “속히 내려오라” - 마음을 전하시는 예수님 /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하신 두 번째 말씀은, “속히 내려오라(Come down immediately)”입니다. 상담자에게 꼭 있어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상담자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내담자에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두 번째 말씀에는! 삭개오를 빨리 만나고 싶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속히(immediately)’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삭개오를 가까이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위대한 상담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소외된 자들, 어려움 가운데 외로운 사람들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서는 마음과 행동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③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 속마음을 읽고,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예수님 / ‘위대한 상담자’로서의 예수님이 제일 잘 드러나는 대화가 바로 이 세 번째 말씀입니다. 진정한 상담자는 내담자가 이야기하지 않는 속마음까지도 읽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신 이 말씀은 ‘오늘 너의 집에서 먹고 자고 가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따돌림당해 외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삭개오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고, 행동으로 공감해 주시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삭개오와 가까이 있는 것조차 꺼리는 상황에서 ‘그 집에 가서 먹고 자겠다’고 하시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나 비난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나는 네 편에 서주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가시자,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습니다. 눅 19:7 →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만일 이런 반응을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바라보면서, 그저 말로 “나는 너의 친구다. 나는 너를 다른 사람들처럼 비난하지 않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예정된 길을 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삭개오의 마음이나 삶은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마음과 삶이 변한 것은! ‘말’만이 아니라, 다른 이웃들의 비난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을 삭개오의 집에서 묵으시는 ‘행동’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예수님의 용기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2. 삭개오의 변화와 구원
상담의 효과는 내담자의 변화로 검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삭개오가 예수님과 만난 후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①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감정의 변화입니다. / 예수님께 상담을 받은 후 삭개오가 제일 달라진 것은 “즐거워졌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자에게, 쉼을 얻게 하는 것”이 상담의 목적이라면, 삭개오의 이런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즐겁지 못하고 괴로운 것은! 마음속에 해결하지 못한 무거운 짐을 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상담자’이신 예수님께서 그 짐을 덜어주시면, 당연히 우리는 즐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②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행동의 변화입니다. / 예수님과 만난 후 삭개오는 감정만 변한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까지도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세리장으로서 이웃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모아온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삭개오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가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동포들의 충고와 설득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리장이라는 직책을 포기하지 않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삭개오가 깨달은 것은! 재산이나 지위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삭개오는, 진정한 행복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평안과 쉼을 얻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삭개오에게 사회적 지위나 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맛본 삭개오는! 이제 예전의 삭개오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결과 삭개오는! 지금까지 중요하게 생각해오던 재산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③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영적인 변화와 구원입니다. / 삭개오는 처음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who Jesus was) 알아보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실 그는 아직도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스승 중의 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만나고 난 후, 삭개오는 영적인 변화를 겪으며 예수님께 “주여(Lord)”라고 고백합니다. 눅 19:8 →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한 번도 언급하신 적이 없지만, 삭개오는 단지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그가 구세주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놀라운 영적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삭개오의 변화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는 말씀으로 축복해주셨습니다. 눅 19:9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삭개오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눅 19:10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멘! 우리도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외적인 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그런 눈과 마음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고 다가서는 자들이 되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세상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길임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부자가 되려고 하기보다, 나누는 부자, 섬기는 부자, 사랑하는 부자가 되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어야 할 전도대상자는 누구인지? 서로 나누고 함께 그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합시다.
제목: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눅 15:25∼32)
1. 편애하지 맙시다.
우선 저는 부모들이 자식을 키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으로 ‘편애하면 안 된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편애는! 사랑을 받는 편에서는 좋을지 모르나, 사랑받지 못하는 편에서는 그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되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경을 보아도! 부모의 편애 때문에 형제들 간에 문제가 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가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큰아들 ‘에서’보다 작은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고, 훗날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 편애 때문에, 형제들 간에 그야말로 살인이 일어날 정도로 갈등이 심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애는 결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편애는 한마디로 부모의 지혜 없음의 극치입니다. 물론 자식들을 똑같은 무게로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슨 이유이든 마음이 더 쓰이는 자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세심하고 표시 나지 않게 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몫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식들 가운데 더 마음 가는 정도가 심하게 느껴지신다면! 하나님께 잘 처신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2. 섭섭함을 토로하는 큰아들
오늘 본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둘째 아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옴으로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혀주고, 가락지를 끼워주며, 새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은 백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 있는 큰아들의 마음을 좀 더 세심하게 살폈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러면! 큰아들은 뭘 하고 있다가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습니까? 25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눅 15:25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즉 동생이 재산을 챙겨서 먼 나라로 떠나 허랑방탕하게 지내면서 재산을 낭비할 동안, 형은 집에서 성실하게 밭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무슨 날도 아닌데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종을 불러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종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눅 15:27 →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집을 나갔던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주고 있다고 하니,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고, 나중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큰아들은 이렇게 행동합니다. 눅 15:28 → “그가 노하여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이런 형의 행동을 ‘참 속 좁은 형이다!’ 이렇게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지혜로운 아버지란 말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잔치를 벌이기 전에, 아버지는 먼저! 밭에 나가 일하고 있는 큰아들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큰아들의 의견을 물어서 잔치를 벌였으면 좋았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작은아들을 사랑하는 것이야 아버지의 절대주권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준 큰아들의 공로와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 역시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큰아들의 모습에서, 왠지 성실함으로 말없이 일했던 노동의 설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생각해 보세요! 큰아들이 자기 동생처럼 유산을 앞당겨서 받아, 큰돈을 만져봤습니까? 아니면, 먼 나라로 여행 한번 가봤습니까? 그렇다고 원 없이 돈을 써봤습니까? 그냥 시골에 묻혀서 밭일이나 하고 있었으니, 그 마음에 얼마나 설움이 쌓였겠습니까? 오죽했으면 큰아들이 이렇게 말합니까? 눅 15:29 →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동안 쌓인 감정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상시에 큰아들의 마음을 더 살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너무 표나게 작은아들만 그리워하면서, 밥도 제대로 안 잡수시고, 문밖에 나가서 온종일 동구 밖만 쳐다보면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보는 큰아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도대체 집에 남아 있는 나는 뭔가?” 이런 생각으로 가슴에 멍이 들었을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그 마음에 응어리가 쌓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서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지혜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들 즐거움으로 봉사의 일을 나눠 맡아서 잘하고 계시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대개 “일하는 사람만 일을 합니다.” 즉 일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 기쁨으로, 자원해서, 믿음으로 봉사하면 별문제가 없지만, 혹 떠밀려서, 할 사람이 없어서, 엉겁결에 맡았기에 할 수 없이 일하게 되면, 그 마음에 불만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불만과 억울함을 쏟아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도 자기 동생의 허물을 들춰내고 있습니다. 즉 동생에 대해서 독설을 내뱉고 있습니다. 눅 15:30a →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 그동안 큰아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몰라서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니요, 바보 같아서 참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동생에 대한 미움과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으로, 마음의 칼을 갈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의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큰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 15:29∼30 →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①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②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③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④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말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①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하며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고 ② “내게 염소 새끼라도 잡아 주었느냐?”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으며 ③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까?”라며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고 ④ 더 나아가 “왜 동생을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으셨습니까?”라며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버지는 큰아들이 속으로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눈치 없는 아버지는 큰아들의 항의에 속으로 뜨끔했을 것입니다.
3. 따뜻함으로 문제를 풀어내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동생이 보기 싫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큰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집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건넵니다. 눅 15:28 →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여기 ‘권한대’라는 말은 → “곁에 서서 다정히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는 큰아들의 마음 상함을 알고 있었기에, 어찌 보면 작은아들에게보다 더 다정하고, 더 친절하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는 근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이든 작은아들이든!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눅 15:31 →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지금 큰아들이 가진 불만의 저변에는, 재산에 대한 문제가 깔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큰아들의 마음을 아버지는 알았기에 “나와 함께”라는 ⇨ ‘심리적인 안정’과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 ‘물질적인 안정’에 대해서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아가서 아버지는! ▸ 큰아들에게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32절) 동생을 불쌍히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간의 화목을 위한 열쇠는 결국 큰아들이 갖고 있기에, 큰아들에게 동생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와 용서는! 연장자가 할 때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32절)라고 말하면서, 이 아비의 심정도 알아달라고 큰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눅 15:32b →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우리’라는 말로 ‘가족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동생은 남이 아니요 가족이며, 동생이 돌아오므로 깨진 가족 공동체가 마침내 회복되었고, 그래서 다시 ‘우리’가 되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은! 섭섭해하고 미워하며, 등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마땅히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때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에 이 가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사랑으로 화해하고 다시금 화목한 가정으로 하나를 이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 부모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이 있으면 회개함으로 돌아가시고, 형제자매간에 등 돌린 이가 있으면 사랑으로 화해해서, 하나님 안에서 반석 위에 든든히 선 복된 가정을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편애(偏愛)의 문제점에 대해서 나눠보고, 감정을 넘어 지혜롭게 처신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아버지의 설득으로 큰아들은 마음을 풀고 집으로 들어가 기쁨으로 그 잔치에 참석할 수도 있고, 반대로 동생 이 했던 것처럼 집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큰아들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하고 나눠봅시다.
3. 탕자가 고백한 말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런 고백이 있으면 모두가 새로워지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나는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회개의 고백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 실천하십시오.
제목: 겨자씨 한 알 같은 천국 (눅 13:18∼19)
1. 작디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 천국을 보신 예수님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공관 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오는 말씀입니다.(마 13:31∼31; 막 4:30∼32; 눅 13:18∼19) 수십 개가 넘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공관 복음서에 다 나오는 비유는 다섯 개 정도인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겨자씨 비유’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경인 도마복음에도 이 비유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도 아주 중요한 비유였기 때문에 ‘겨자씨 비유’가 이렇게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말씀까지 세밀하게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본문보다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막 4:30∼32 →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성도 여러분! 이 짧은 비유의 요점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중의 온갖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큰 가지를 가진 나무’로 자라나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씨의 대명사가 ‘좁쌀’이지만, 유대인들은 겨자씨를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으로 여깁니다. 겨자씨는 길이가 1∼2cm 정도 되는 꼬투리에 들어가 있는 아주 작은 씨앗들인데, 지름이 겨우 1mm 정도밖에 안 되는 흑갈색 씨앗입니다.
이 겨자씨는 매우면서도 향기가 있어서, 조미료나 약용으로 쓰이는 씨입니다. 겨자는 1년 초 혹은 2년 초 식물인데, 최고 2m까지 자라납니다. 이렇게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서 여러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셨던 것입니다.
2. 겨자씨 비유의 비밀 3가지 - ① ‘대조’ ② ‘성장’ ③ ‘포용’
그렇다면 이 ‘겨자씨’와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겨자씨 비유’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조’ ‘성장’ 그리고 ‘포용’입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① 대조 : 무엇과 무엇의 대조입니까?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 한 알’ vs ‘공중의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 한마디로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큰 것으로 성장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겨자씨가 땅에 심겨지기 전과 후를 대조해 봅시다. 겨자씨는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심긴 후에는 ‘모든 나물보다 크게 자라고, 심지어 가지를 내어서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즉,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는 것! 이렇게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달라진 모습 속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쉽게 ‘하나님 나라!’ 하면! 그 나라는 엄청난 힘과 크기를 가진 나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 로마 제국이나, 엄청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오늘의 미국과 같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나라로 연상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경쟁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그 힘의 크기에서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적의 나라, 군사 · 경제적인 제국, 이런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씨앗, 막 4:31의 말씀대로 한다면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작은 씨” 즉, ‘겨자씨 한 알’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보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소리 없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것 하나를 소홀히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일 속에 사랑과 생명이 있으면! 그것은 크게 자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또 지역사회에서! 작은 봉사 하나, 작은 사랑 하나를 실천하게 될 때, 바로 거기에서부터 커다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됨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성장 : 여기에는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즉, ‘썩어짐으로 자라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생을 통하여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역시 마가복음 본문입니다. 막 4:32 →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동사들이 있습니다. ⇨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라는 말입니다. 모두 성장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장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씨가 심겨지고 썩어 없어질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희생을 통하여 성장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2: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은 <‘희생’이 ‘성장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은! 자신이 썩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희생’에 의해서 ‘성장’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성장이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희생의 댓가를 치른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50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특별히 3번의 성전건축과 리모델링을 하면서 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쾌적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희생과 헌신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점점 자라나고 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미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 그것은 반드시 성장하고 확산케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썩어져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성장 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봉사, 작은 희생으로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포용 :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을 품을 만큼 넉넉한 나라’입니다. <작은 씨앗이었는데! 많은 새들이 깃들일 만큼 넉넉한 가지를 가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9절 후반부를 보겠습니다. 눅 13:19b →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는 ‘가지에 깃들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새들의 은신처 혹은 쉼의 터전을, 한 작은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로 자라나서 그것을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들과 것들을 ‘포용’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시겠지만, 요즘 들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사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참 고마운 나라였습니다. 식량 원조로 세계를 먹여 살리고, 무상 의약품을 공급해 수많은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이 예방접종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고,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무역 항로를 지켜줘서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게 했고, 때론 무력으로 개입해서라도 불의한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역할을 포기했습니다. 민주주의나 자유무역 경제체제, 과거의 형제애나 동맹의 가치! 이런 것들은 다 필요 없고, 미국의 이익에 우선하는 정책을 펼쳐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온 세계가 뒤숭숭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현실에 당혹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의와 공정, 약자에 대한 돌봄과 배려, 선한 가치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헌신짝처럼 내 던지고, 그저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면서! 말을 안 들으면 힘으로 관세로 밀어붙이겠다는 작금의 태도는! 그동안 쌓아왔던 신뢰와 고마운 마음을 한꺼번에 잃게 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제국도 물리적인 힘만 세다고 해서 그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발적으로 따르고 함께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힘이 있어야 제국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힘을 학문적으로는 ‘헤게모니’라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힘이 센 자 많이 가진 자가 솔선하여 겸손하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희생의 십자가를 지신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런 ‘겸손과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지배하는 강압적인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이 지배하는 평화의 나라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순절기를 지내고 있는 성도님들! 겸손과 낮아지심, 희생과 헌신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나도 따르리라!’ 마음먹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가는 선한 일꾼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작은 사랑, 섬김, 헌신이 큰 결과를 만들어낸 경험이 있다면 나눠보고,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나 자신과, 우리 가정,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나라는 포용성 측면에서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눠보고, 포용성을 높일 수 있는 마음과 역할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오늘 말씀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차이점이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제목: 네 대답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라. (눅 10:25∼37)
1. 영생의 문제로 예수님과 율법 교사 사이에 오고 갔던 질문과 대답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렇게 질문합니다. 눅 10:25b →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질문을 던지십니다. 눅 10:26b →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를 되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라는 질문 다음에, 하나의 질문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생 얻는 방법을 묻는 율법교사에게 대답 대신, 결이 다른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특별히 두 번째 질문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첫째는, ‘율법에 쓰여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 율법을 너는 어떻게 읽고 있느냐?’ 즉,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율법교사는 신명기와 레위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해서 아주 능숙하게 대답합니다. ① 신 6:5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어 ② 레 19:19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수직적 계명과,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계명까지 대답했으니, 그의 대답은 백 점 만점입니다.
하지만, 이 율법교사의 대답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을 들으시고는 “네 대답이 옳다”라고 답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영생을 얻기 위한 율법의 가르침을 ‘네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도 네 말에 동의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율법교사로부터 듣지 못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이 직접 알려 주셨습니다. → “(네 대답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라.”
그런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는 “네 대답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라.”는 이 두 문장이 서로 붙어 있습니다. 눅 10: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하지만! 이 두 문장, 두 말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원하심인지? 그 정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 말씀이 성경 어디에 쓰여 있는지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요청 앞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적절히 행하라’ 또는 ‘요령껏 행하라’가 아니라, “그대로 행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네가 잘 알고 있구나!’ 그러니 ‘그대로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 자체로 매우 큰 부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다음 문장을 듣게 되면, 그 부담은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눅 10: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해야만 산다’고 하시니! 참으로 막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생을 구하는 율법교사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난데없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또 다른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는 말씀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어야 했습니다. ⇨ “네 주님!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엉뚱하게도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무언가 많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등장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평가를 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에겐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이들에 대해서 단순하게 윤리적인 평가 또는 신학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쉽지 않은 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없었지만,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있었던 것, 달랐던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자마자 사마리아인에게 들었던 ‘감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눅 10:33b →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불쌍히’ 여깁니다. 측은지심이 든 것입니다.
여기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는 단어와 표현은 같은 누가복음 안에서 먼저 7장 13절에 등장합니다. 눅 7:13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인 성의 한 과부가 죽은 아들 곁에서 슬피 우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5장에서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며 달려 나온 아버지를 묘사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눅 15:20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러니까 누가복음에서 ‘불쌍히 여기다’ 혹은 ‘측은히 여기다’라는 표현은! 실의와 절망에 빠진 인간에 대한 ‘애끓는 감정’을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없었던 이 마음,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긍휼의 마음에 충실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34절과 35절에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 ① 가까이 다가가서 ②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씻고 싸맸습니다. 그리고 ③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④ 일단 비용을 지불하고, 나중에 비용이 더 들면 추가로 지불 할 용의가 있음을 여관 주인에게 밝힙니다. 비유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3. 누가 내 이웃인가? vs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한번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눅 10:36b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앞서 29절에서 율법교사가 한 질문과 짝을 이룹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눅 10:29b →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기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말과 vs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는 말은! ⇨ 아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말입니다. 전자의 질문, 다시 말해 율법교사의 의도는! 내 이웃의 범위를 한정 짓겠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내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내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치 않고, 나와 입장을 달리하더라도, 내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이웃 섬김에는 제한도 없고 범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의 마음에도 어떤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자비를 베푼 사람이니이다.”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답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율법교사에게 반복하여 당부하십니다. 눅 10:37b →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여라.” 이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순서대로 죽 살펴보면 이렇게 됩니다. 눅 10: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① 네 대답이 옳도다. ② 이를 행하라. ③ 그러면 살리라.” 이것을 좀 쉽게 풀어서 말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 “그래! ▸ 네가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잘 알고 있구나!’ 그러니 ▸ ‘그대로 행하라.’ ▸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기 위한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도,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고, 또한 그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렇게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거 중요하지!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이런 생각과 판단이 거의 진리처럼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사랑의 방법을 친절히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다면 불쌍히 여기고,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가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라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거나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냥 필요를 채워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었음에도, 못내 이웃을 돕는 일에 썩 나서게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비유 속에서 우리 자신이! 지나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를 만나서 매 맞고, 빼앗기고, 쓰러져, 거반 죽게 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누군가의 즉각적인 도움이 없다면, 곧 죽을 사람이 바로 나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제발 누군가가 나의 그런 형편을 보고 가까이 다가와 불쌍히 여겨 상처를 닦고 싸매고, 업든지 자동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옮겨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 아닙니까?
이렇게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너무나 당연하고 쉽습니다. 냉혹한 현실 인식과 이기주의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가졌던!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기의 것을 기꺼이 소모하며 구조하려고 애썼던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인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네 대답이 옳다.(앎) ▸그대로 행하여라.(행함) ▸그러면 살 것이다.(영생) ⇨ 이 말씀 중 어디에서 나는 주저하게 되고 막히는지 나눠봅시다.
2. 당신에게 ‘하나님 사랑’이라는 수직적 계명과,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계명 중 어떤 계명이 더 어려운지? 왜 그런지? 나눠봅시다.
3. 우리는 이웃을 고르려고 하고, 사랑을 베푸는 정도와 수준도 적절히 조절하려고 합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순절 기간동안‘차별 없는 사랑의 실천’ 계획을 나눠봅시다.
제목: 남을 먹이는 인생으로 살아라! (눅 9:10∼17)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오늘 본문은 열두 제자들이 현장으로 나가 전도하고 돌아와 그 결과를 예수님께 보고한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버나움 건너편, 벳새다에 있는 한적한 빈들로 가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었지만! 막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피곤한 것을 아셨기에, 그들을 좀 쉬게 하고자 빈들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벳새다 광야에 도착해보니,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엄청난 인파가 그리로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33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리리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도보로 그곳으로 달려와, 오히려 그들보다도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은! 마실 물과 먹을 꼴과 쉴 안식처로 인도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목자 없는 양은! 살았으나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를 오늘의 말로 바꾸어 보면,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엄밀히 말해서 지금 광야의 무리는! 자기들이 제 발로 걸어서 거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제자들이 초청한 것도 아니요, 그들을 강권하여 억지로 데려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그 무리에게 먹을 것을 대접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나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을, 나더러 먹이라고 하시는가? ▸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눈감고 모르는 척할 수 없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빚을 졌는가? ▸왜 주님은! 우리더러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나는 나의 제자들이 ‘남을 먹이는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 못 먹어 끼니를 굶는 사람들을 ‘너희가 좀 먹여 살릴 수는 없겠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더 깊은 뜻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거기 모인 사람들이 불쌍해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너희가 주라!” 하신 점도 있겠지만, 장차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남을 먹이는 인생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명하신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2. 남을 먹이려는 인생이 되려면!
① 계산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계산을 하다 보면, 언제나 우리 가정을 꾸려가기에도 충분치 않습니다.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사람들은 항상 돈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계산하기 시작하면, 절대로 ‘남을 먹이는 인생’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숫자’가 더 많아서, 전쟁에 승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기드온의 3백 용사들이 ‘숫자’가 많아서 미디안 10만 대군을 물리쳤습니까? 절대로 ‘숫자’를 가지고 승리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주님의 일을 ‘숫자’를 가지고 하려고 하는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보시고,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렙돈’은 어른의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1/128입니다. 그만큼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액수나 숫자로 따지지 않으시고 과부가 가장 많은 돈을 헌금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작은 것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남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해서, 계산에 밝은 사람이 아니라, 그래! ‘나는 남을 먹이는 인생이 되리라!’ 이렇게 마음먹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② 남을 먹이면 나도 산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3년 6개월 가뭄 가운데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줌과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아들과 먹고 죽으려 했던 사렙다 과부!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그 떡을 만들어 자기에게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사실, 지금 사렙다 과부는 남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도우니까 기적이 일어나서,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먹을 것을 찾으신다고 하니, 한 아이가 5병 2어 자기 도시락을 기꺼이 제자 안드레에게 드렸습니다. 만일 이 아이가! 못 들은 척하고 그냥 혼자 먹었다면! 아니면 그걸 받은 안드레가 먹어버렸다면! 한 명이 먹기에도 충분한 분량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남을 돕는 마음으로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니, 남도 살리고 자기들도 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물론! 남을 돕다 보면, 자기가 못 먹을 때도 ‘잠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자기의 배가 부른 것 같은 행복과 정신적인 포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그런 영적 배부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통해 그녀를 구원하셨습니다. 마침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 4:31∼34 →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네! 이렇게 남을 살리고 구원하여 누리게 되는 ‘영적 배부름’을 사모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선진국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함
오병이어로 장정만 5천 명! 그러니 최소 1만 명 이상을 배부르게 먹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먹고 남은 조각을 다 거둬 모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았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1인분의 양식으로 5천 명, 1만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이, ‘남은 것을 다 모으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쩨쩨하게 보이십니까? 아니면 비효율로 보이십니까?
성도 여러분! 필요하면 얼마든지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예수님이! 남은 것을 다 거두라고 하시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네! 그것은 ‘욕심부리지 말아라. 낭비하지 말아라! 절약해라!’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각성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연구 조사에 의하면 선진국 사람들은 ⇨ 인간이 기본적으로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 에너지의 ‘4백 배’나 더 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니, 2~3백 배를 쓴다고 봐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화장실을 사용하고 아무 생각 없이 변기의 물을 내리지만,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 분량의 물이면 하루 종일 사용하는 분량입니다. 아니, 그 분량만큼의 물도 못 쓰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 외 우리는 전기, 음식, 육류, 옷, 종이 등 모든 자원을,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보다 수백 배나 더 쓴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많이 부유해지고, 많이 소비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과거보다 더 행복해졌습니까? 우리가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은! 결코 소득이 높은 순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죄’에 대한 ‘개념’과 그 ‘범위’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개인이나 민족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죄’에 대한 가치관과 관점이 약간씩은 다르지만, 근자에 환경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자원의 무분별한 낭비,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행위’를 큰 죄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고 남용하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산화탄소의 대량 배출, 환경오염, 무분별한 자원 낭비’ 같은 행동을! 사기, 간음, 살인과 같은 큰 죄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토크쇼의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결심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땀 흘려 번 돈을 가지고, 자기의 구두, 옷 그리고 가족이 먹을 것을 사고 구매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삽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번 돈으로, 내 옷과 구두를 사는 즐거움과 행복! 그 이상의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프라 윈프리는 ‘그 이상의 무엇을 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아동들을 위해서 학교와 체육관을 지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능한 많은 돈으로, 누군가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축복받아서 잘살게 되었다고, 많이 먹고, 많이 쓰면서 나는 행복하다고 자기를 과시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5천 명이 먹을 분량을 모았다”라고 자랑하지 말고 ⇨ 대신,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쓰는 에너지가 가난한 사람들의 3~4백 배 이상이라면, 그것을 절약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어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한번 자신을 평가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내가 번 돈으로, 내 옷과 구두를 사는 정도로 만족하며 사는 인생인가? 아니면, 주님의 명령을 따라 ‘남을 먹이는 인생’으로 살려고 힘쓰는가? 우리 교회가 수백, 수천 명 모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가 수천 명을 먹이는 그것을 자랑하게 되는 교회로 성장 성숙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왜 주님은! 우리더러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시는가에 대해서 자신들의 생각이나, 마음먹은 것을 나눠봅시다.
2. 선진국 사람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 에너지의 ‘4백 배’나 더 쓴다는 결과에 대해서 당신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을 듣고 ‘사순절’에 실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제목: 네 가지 마음의 밭! (눅 8:4∼15)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 상태를 아주 명확하게 분석해주셨습니다. → 첫째는, ‘길가’와 같은 굳은 마음이요. 둘째는, ‘돌짝 밭’과 같이 깊이가 없는 마음이요. 셋째는, ‘가시덤불’이 왕성한 잡초마음이요. 넷째는, ‘좋은 땅’의 옥토 마음입니다.
이것을 C자로 시작하는 영어단어 4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 ① Closed mind(닫힌 마음) ② Casual mind(건성적인 마음) ③ Carnal mind(육욕의 마음) ④ Careful mind(진지한 마음)입니다. 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와 반응’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평가’인 것입니다.
1. 닫힌 마음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다 보면, 씨가 길바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길바닥은 딱딱하기 때문에 씨앗을 품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새들이 와서 그 씨앗을 주워 먹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직선적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아예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귀를 닫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생명을 가진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습니다. 참 불행한 인생이지요!
오늘 비유를 잘 살펴보면, 문제는 ‘씨앗’에 있지 않고 ‘흙’에 있습니다. 길바닥의 흙이 너무 딱딱한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 고집스럽고 굳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 까닭은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닫힌 마음’의 사람에게는 어떤 부작용이 초래되나요? 12절입니다. 눅 8:12 →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네! 마음이 완악해져 있기 때문에, 사탄이 그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 마귀는 먼저 사람의 마음을 굳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깨달음이 없게 하고, 감동이 없게 하고, 은혜가 없게 합니다. 오히려 마음을 더 강퍅하게 만듭니다. 오해가 앞서게 하고, 해석을 왜곡되게 합니다. 그래서 돌이킬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고, 충격을 받아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입니다. 그는 자기의 마음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 ‘사탄’이라는 사실에 놀란 것입니다. 만약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내 삶이 변화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사탄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 아닌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날부터 존 번연은 설교를 듣는 태도부터 달리했습니다.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참된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수 세기 동안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천로역정’의 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듣는 마음, 듣는 귀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 성령님은 우리 심령의 귀를 열어 듣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말씀이 가슴 깊이 들리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얕은 마음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다 보면, 흙이 얕은 너럭바위 같은 곳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밭은, 두꺼운 석회암층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는 밭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므로, 가물 때 쉽게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13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눅 8:13 →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네! 깊은 뿌리가 없는 신앙, 감정적인 신앙, 소위 냄비 신앙인을 말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감동을 받습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기쁨과 희열을 느낍니다. 소망을 갖고 좋아합니다. 결심도 합니다. 굳게 다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오래가질 못합니다. 잠깐뿐입니다. 너무 쉽게 요동하고 넘어집니다. 예배 시간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으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입니다. 은혜를 받자마자 금방 쏟습니다. 열심을 품는 듯 하다가 한 순간에 침체에 빠집니다. 감정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반짝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이런 기분파 신자들이 의외로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밴댕이 속처럼, 깊이가 없는 사람은! 작은 어려움만 만나도 바로 뒤돌아서고, 금세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6절입니다. 눅 8:6 →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 ‘습기가 없어서 말랐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깊이 있게 성장하려면, 눈물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깊이 있는 신앙은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 성공의 3요소로, ‘눈물과 땀과 피’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때로는 피 흘리는 희생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눈물이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 성도들은 냄비 신자가 아니라, 시련과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눈물로 신앙의 뿌리에 습기를 공급하여, 마르지 않는 깊은 영성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잡초 마음입니다.
세 번째 밭은, 곡식과 함께 ‘가시’ 즉 ‘잡초’가 같이 자라므로 열매 맺지 못하는 땅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대로, 곡식보다는 잡초와 가시가 훨씬 빨리 자라고 크게 자랍니다. 이런 잡초와 가시가 자라면서 자양분을 뺏어 먹고, 또한 크게 자라 그늘을 만들어, 곡식을 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곡식은! 겉모양은 갖췄지만, 속이 차지 않은 쭉정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이런 잡초에 휩싸인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나름 괜찮은 신앙인입니다. 그런대로 준수하게 교회도 출석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왜요? 세상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아까운 것이 너무 많은 신앙인! 그런 사람이 바로 잡초에 휩싸인 신앙인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눅 8:14 →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여기서 세 개의 가시를 말합니다. 첫째는 ‘세상의 염려’이고, 둘째는 ‘재물의 유혹’이고, 셋째는 세상의 쾌락에 탐닉하는 ‘향락’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세상의 ‘환란’이나 ‘핍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생활에 대한 염려와, 세상의 향락을 추구하는 잡초마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갈지를 잘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딤후 3:1∼5 →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네, 종말이 가까울수록!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성읍 사람들처럼, 술 취함과 방탕과 음란과 육체적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
네! 우리 성도들도 건전한 장소에서, 적당한 휴식과 오락,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락이 주업이 되고, 쾌락이 목적이 될 때, 그것은 무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즐거움과 세상의 기쁨을 얻기 위해, 신앙과 영적 성실성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분명 가시와 잡초에 묻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영적 기운을 막는 것들은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사실 은혜 받는 길, 열매 맺는 일, 좋은 신앙인이 되는 길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잡초를 뽑아내고, 가시를 잘라 버리면 됩니다. 물론 세상염려를 자르고, 욕심을 뽑고, 잘못된 습관을 제거하고, 정욕을 불살라 버리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잡초에 휩싸인 인생으로 그냥 살면! 결과는 쭉정이 신자가 되고, 추수 때에 아궁이에 던져지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4. 옥토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서 여러 가지 잘못된 밭의 상태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옥토는 어떤 밭입니까? 좋은 땅입니다. 눅 8:15 →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네! 앞서 8절에서는 좋은 땅! 옥토에 씨앗이 떨어지기만 하면 100배의 결실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런 옥토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네! 옥토는 본래부터 있었거나 저절로 만들어진 땅이 아닙니다. 모든 땅은 처음에는 불모지와 같은 험한 땅이었으나, 농부가 끊임없이 땀 흘리며 수고하고 개간하여 옥토가 된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농부의 땀과 수고와 눈물이 있어 옥토가 되듯이, 우리의 마음 밭이 옥토로 변하도록! 참고 인내하며 때론 수고하며 힘쓰고, 어떤 때는 눈물 뿌리며 희생의 피를 기꺼이 흘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실 옥토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설교의 목적은! 네 종류의 마음 상태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좋은 땅,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변화되라는 것입니다. 네! 우리 모두 옥토 성도가 되어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말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사탄의 계락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나요? 이에 대해서 나눠보고 주여! ‘듣는 마음을 주옵소서!’ 기도합시다.
2. 당신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영적 기운을 막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성경의 4가지 마음 밭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 밭은 어디에 가장 가까운지 생각해 보고, 그것을 벗어날 자신의 결심과 계획을 나눠봅시다.
제목: 죄인을 불러 제자로 세우시는 예수님! (눅 5:27∼32)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자녀들을 잘 길러,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키워낸다면,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큰 보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자녀들이 사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큰 인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죄인을 변화시키시고, 제자로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알패오의 아들 레위! 세리 마태입니다. 그는 손가락질받던 세리였습니다. 그런 그가! 후일 위대한 사도가 되고,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울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의미 있게,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울 수 있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지혜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볼 때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어, 그야말로 사람에 치일 정도로 바쁘게 사역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한 사람, 한 영혼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눅 5:27 →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레위를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시고’라는 단어는 → 에이덴(είδεν)인데! 그냥 무심코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의 직업을 보았고, 매국노적인 삶을 보았고,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한 사람!(a man) 레위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레위가 가지고 있는 양심의 갈등을 보셨고, 돈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허무를 보셨습니다. 자신의 직업과 인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보셨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천국 복음을 듣고 있지만, 레위 자신은 고독하게 세관에 앉아 있어야 하는 외로움을 보신 것입니다.
레위는 후일 주님께 새로 받은 이름으로 ‘마태복음’을 쓸 때, 자신의 이전 모습과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 9:36 → “무리를(레위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네! 예수님의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눈과 마음,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과 긍휼의 눈빛이 레위의 인생을 바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는 큰 것, 대단한 것, 많은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많은 군중을 접하면서도 절대로 놓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 한 영혼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세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의 잘못 살아온 과거에 근거한 비판과 선입견의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고, 그저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의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 존재의 내면 깊숙한 곳의 아픔과 외로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변화되었을 때의 가능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대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의 음성으로 다가가세요. 그러면 그때부터 변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 인생의 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변화되고 세워지게 됩니다.
당시 ‘세리’는 천하의 매국노! 동족의 피를 빠는 수전노로 취급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직업을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물질적인 보장과, 직업의 안정성’이 담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과 정죄와 조롱하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 일을 했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레위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도전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follow me! 눅 5:27 →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것은 인생의 새로운 ‘방향 제시’입니다. 물질 중심적인 삶에서 ⇨ 영적인 삶으로, 죄악의 안락에서 ⇨ 진리의 모험으로, 이기적인 삶에서 ⇨ 공동체적인 삶으로 나오라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음성에 ‘레위’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였을 때, 그는 즉시 응답했습니다. 눅 5:28 →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할렐루야!
여기 ‘모든 것’이란?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왔던 ‘물질적인 풍부, 직업의 안정성, 안락한 생활’을 말합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레위에서 마태로 인생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을 잃었지만,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 그 지방에서 악한 자로 명성을 얻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요, 복음서 저자로 세계적인 인물, 불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현재 시제 명령형’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안정된 삶도 중요하지만 ⇨ 하나님의 사명으로 살고! / 풍부한 수입도 중요하지만 ⇨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추구하고! / 안전도 중요하지만 ⇨ 영적 모험을 향하여 방향을 전환하라는 명령입니다. 문제는 영적 표지판, 방향 표시판이 되어야 할 나의 삶의 모습입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를 따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번 왔다 가는 인생!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데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거룩한 삶으로 도전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보! 신앙생활 이렇게 하는 거 아니잖아요!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겠어요?”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낙담해 있는 남편을 향해서 “여보! 우리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잖아요! 힘을 내세요. 내가 기도로 도울께요!”라고 응원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성육신하는 사랑과 용기의 태도를 가질 때 변화되고 세워집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영혼에 얼마나 큰 기쁨과 자유가 넘쳤는지! 많은 동료 세리들과 죄인 취급받던 사람들을 초청하여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눅 5:29 →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하지만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5:31∼32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사실 ‘누구와 함께’, ‘어디에 앉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당시 주류 세력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금했습니다.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이들로부터 대접을 받거나, 대접을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도무지 함께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할 때, 자신들도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정죄만 있고, 자비와 사랑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 함께 하셔서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레위가 잔치를 벌이고 예수님을 초청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믿음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외면받고, 멸시받던 그들과 함께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요, 용기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은 내용을 보도하는 마가복음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막 2:15b →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네! 많은 다른 세리와 죄인들이 변화를 받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른 사람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으로 보듬은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이름으로 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 명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의 ‘전직’을 밝히지 않으면서, 유독 자기 자신의 이름 앞에는 과거 세리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 10:3 →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마태가 굳이 자랑스럽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 부끄러움을 극복했다는 것이요, 또한 자신이 예수 안에서 얼마나 크게 변화된 사람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리 레위’가 앉았던 자리는 ‘죄악과 탐욕의 자리’였습니다. 민족을 배반하고 양심을 버리고라도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그의 초청으로, 이제 그는 예수님과 함께 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지셨던 이런 ‘용기와 사랑’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럴 때 사람이 변화되고, 세워지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그런 변화의 주인공, 세움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사람을 볼 때 판단하고 평가하는 성향입니까? 아니면 보듬고 감싸는 성향입니까? 사랑과 긍휼로 사람이 변화되고 세워진 간증을 나눠봅시다.
2. 당신은 세속의 필요와 안정의 자리 vs 보람과 헌신의 자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 결심한 고백을 나눠봅시다.
3. 화려하고 부족함 없어 보이는 세상 사람들도 영적 외로움과 갈등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눈과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