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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김성윤
18시간전
조회 53

말씀으로 새롭게! (왕하 22:8∼11, 23:21∼25)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는! 불과 8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20대 중반부터는 선대왕들과는 달리 말씀으로 나라를 새롭게 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8년이 지난 스물여섯 살 때, 퇴락한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그 말씀을 읽고 영적인 깨달음을 갖고, 그날부터 나라를 새롭게 변화시켜 나갑니다. 이 요시야가 행한 개혁의 특징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어디에 근거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들을 파괴하는 일은, 요시야가 개인적으로 세운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원하심을 요시야가 행한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왕하 23:21 →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네! 요시야의 개혁은 언약책,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시야 왕이 훌륭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요시야의 진심이 오늘 본문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24절입니다. 왕하 23:24 →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둘째, 25절입니다. 왕하 23:25 →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여기 밑줄 친 부분은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쉐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 6:5∼6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실천하려고 힘썼던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2. 자신의 삶과 지경을 넘어서까지 개혁했습니다.

사실 요시야의 개혁은! 자기 자신을 갱신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시야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은 것은, 개혁의 대상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2:11)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새롭게 하려고 하면, 먼저 자신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요시야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시야의 개혁은! 자기 자신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발견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읽어주고, 그들도 다 그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왕하 23:2b∼3 →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그런데 그의 개혁은 자기가 다스리는 ‘유다’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 우상과 산당들까지 불사르고 헐어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왕하 23:15 →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왕하 23:19 → “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네! 이렇게 요시야의 개혁 행보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벧엘이나 사마리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속한 땅입니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정복되어, 그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니 벧엘과 사마리아 지역의 산당과 우상들을 불태우고 제거하는 일은, 자칫 정치적인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유다의 안위와 안전을 생각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몸을 사리지 않았고, 진리 추구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계산하거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했으며, 영적 타락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시야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상황과 여건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한 영혼을 향한 거룩한 사랑을 품고, 어디든 가셨고, 누구든 만나셨습니다. 눅 19:10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가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삭개오의 집에도 들어가셨고, 남편이 다섯이었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도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습니까? 복음의 능력이 어느 한 지역이나 민족에 머물거나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 온 인류에 확산되어,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영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있을 ‘새 생명 전도축제’에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요시야 한 사람의 거룩한 결단으로 인해, 죄와 타락에 빠져 있던 수많은 백성이 진리 안으로 돌아오고, 삶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가 ‘왕’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왕’이기 때문에 더 큰 죄악에 빠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믿는 ‘믿음이 컸기에’ 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의 불씨를 자기 안에서만 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영적인 새로움이 확산하여,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번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한 새로움의 위대한 역사가 여러분으로 인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유월절을 회복시켜, 예배와 감사를 회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요시야가 온 백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도록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여호와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였지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그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간 것! 즉 유월(踰越, Passover)한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바로 왕은 이 열 번째 재앙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절기로, 이 유월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되게 살면서부터, 이 절기와 예배를 서서히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성경 22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왕하 23:22 →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사사시대로부터 통일왕국시대, 분열 왕국시대까지 ‘유월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절기를 지키고 예배드리는 것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시야는 이 잃어버린 유월절을 회복시킴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예배’를 회복시키고, 자신들이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한 것입니다. 왕하 23:23 →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서를 발견한 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도 요시야의 가슴에 불붙었던 ⇨ ‘예배신앙’ ‘감사신앙’ ‘은혜 의식’이 꼭 필요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거룩한 통로이며, 하나님과 기쁨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장입니다. 또한, ▸‘감사’는! 구원의 감격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또한 ▸‘은혜 의식’이 있어야 예배도 감사도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 감사하는 자! 은혜를 아는 자!’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유월절을 회복시킨 요시야의 신앙을 거울삼아,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시야는 단순하고 일관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켰습니다. 요시야는 이렇게 말씀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런 왕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내 삶을 바르게 하고,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감사와 은혜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타락으로 굴곡져 있던 유다의 상황을 타개하고 온전히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요시야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응답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마음의 밭을 열매 맺는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뽑아버리고, 잘라버리고, 뒤집어 엎어야 하는지? 깨달은 것을 나눠봅시다.

 3. 요시야가 누렸던 가장 큰 축복은 그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성취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특히 ‘새생명 전도축제’와 연관하여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10-05
조회 78

제목: 성만찬의 다섯 가지 의미! (고전 11:23∼29)

10월 첫 주일은, 전 세계 모든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 됨을 확인하고, 또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성찬식’을 행하는 ‘세계 성찬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기독교의 두 가지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① ‘세례’는 → 그리스도 안에서 ‘죄 씻음 받음의 표시’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참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성삼위의 이름으로 베푸는 예식으로, 죄는 용서되었고 이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② ‘성찬’은 →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예식을 통하여,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고, 그의 풍성하신 생명에 참여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친히 준비하신 식탁에 초청하십니다. 성찬은 생명을 얻는 식탁입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한 생명,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독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1천 년 넘게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므로, 융성하는 기회를 맞이함과 동시에,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기독교가 313년에 공인을 받고, 392년에는 국교로 발돋움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 너무 커지다 보니, 서기 395년에 제국의 동쪽 콘스탄티노플에 또 하나의 수도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 맡겨 통치케 됩니다.

서·동 로마제국 영역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비교


     

문제는 이때로부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서로 경쟁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점차 ‘정치적’ ‘인종적’ ‘문화적’ 갈등으로 심화 되고, 마침내 종교적 갈등으로 번져 1,054년 가톨릭교회(Catholic)와 동방 정교회(Orthodox)로 분리되어 두 개의 교회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1,517년 부패한 서방 가톨릭교회에 항거하여 개신교회(Protestant)가 또다시 분리되어 나눠지게 됩니다. 이후 교회는 하나 되지 못하고 세 교회로 나눠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갈라진 교회들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기독교 교파 간에 일치 운동(敎會一致運動)을, 영어로는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이라고 합니다.

이런 ‘분열되지 않았던 하나의 교회’ 그 원형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몇 가지 핵심적인 것에 일치를 가져보자는 뜻으로, 1982년 1월 페루의 리마에서 BEM이란 문서를 발간했습니다. ‘세례와 성만찬 그리고 직제’(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라는 이름의 책인데 →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 정교회가 ① 세례와 ② 성만찬 그리고 ③ 직제에 있어서 하나의 합일점을 찾아가기 위해 만든 문서입니다.

이 BEM 문서를 기반으로 만든 예식서가 바로 ‘리마 예식서’(Lima Liturgy)인데, 이 ‘리마 예식서’에서 밝힌 “성만찬의 다섯 가지 의미”를 소개해 드림으로써, 성만찬의 뜻을 좀 더 폭넓고 깊게 이해하고, 오늘의 성찬을 받길 원합니다. <성만찬을 행하는 ‘중심적인 5가지 이유’>


1. 'LOOK UP' -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받게 될 때! 눈을 들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찬은 아무나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만 초대되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즉, 성찬의 식탁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식탁입니다.


2. 'LOOK BACK' -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기억’하며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믿음과 신앙고백이 서지 않은 사람은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당신의 죽으심을 기억하여 ‘기념’ (Anamnesis)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쉽게 은혜를 잊어버리는 ‘망각의 존재’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각종 기념일을 정해서 주기적으로 행사를 갖는 이유도, 두고두고 기억해서 그 역사적 사건의 중요성과 의미를 가슴에 간직하라는 취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통하여,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잊지 말고, 우리들의 가슴에 새길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만찬을 함께 나눌 때,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살을 ‘기억’하고,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눈을 뒤로 돌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LOOK IN' -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나눌 때,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 심령 안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실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이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순간, 이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과 동행하며 여러 말을 주고받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밝아진 눈은 ‘믿음의 눈’ ‘신령한 눈’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 들어가심으로 열려진 눈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성령이 그 심령 속에 임재하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찬을 나눌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의심과 불신을 소멸해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러운 죄와 세속적인 욕망들로 가득 찬 마음이라면, 먼저 회개함으로 속사람을 깨끗이 씻어내고, 그 마음의 빈자리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히 채워지도록, 은혜를 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임재와 충만함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LOOK AROUND' -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성만찬은 언제나 집단으로 행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거동이 불편한 환자나, 임종을 앞둔 분은 목회자가 찾아가 성찬을 베푸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만찬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성만찬이 ‘성도의 교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받을 때는, 반드시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됨을 상징할 뿐 아니라, 성찬을 받는 성도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됨을 상징하는 공동체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간에 ‘다툼과 분쟁, 용서하지 못한 미움의 마음’을 가지고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의 주변을 둘러봐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영적인 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자가 되며, 사랑을 나누는 자가 되리라! 이런 다짐을 가지며 이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LOOK FORWARD' - 천국에서 나눌 음식을 ‘미리 맛보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세 가지 식탁교제(table fellowship)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을 나누는 ‘일상적인 식탁’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 식탁’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나누게 될 ‘천국의 식탁’입니다.

이 세 번째, 천국의 식탁은! 어떤 모습 어떤 모양의 식탁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천국 잔치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앞을 내다봐야 합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할 소망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그날에 나누게 될 식탁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보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예수님이 제정하셨고 행하라고 명하신 두 가지 예전은 ‘세례’와 ‘성찬’입니다. 기독교회(가톨릭, 정교회, 개신교회)가 이 두 가지만이라도, 같은 예문으로 행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눠봅시다.


2. 갈라진 교회들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임을 확인하고자 노력하는 것과 같이, 남북의 평화적 통일, 계층간의 갈등 극복, 가정의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주님과 하나됨의 자리로 초청해야 할 사람을 정하셨다면,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이재영
2024-09-28
조회 90

제목: ‘예비신자’ 영향 주고 데려오자! (행 13:46∼49)


지난 ‘금요기도회’에서 제가 → “영적 고지를 점령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먼저 그 말씀을 잠깐 요약정리한 후에,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지형적인 고지(高地)를 점령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투에서 전략상 요충지인 고지를 먼저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지를 점령하면! 시야가 360° 확보되기 때문에! 전략을 짜는 데 유리하고, 실제 전투에서도 고지에 구축된 진지에서 적을 내려다보면서 싸우기 때문에, 1/3의 병력만으로도 방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요충지인 고지를 점령하고, 거기에 진지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승리의 요건입니다.


2. 정신적인 면의 고지도 있습니다.

지리·지형적인 면에서만 고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면의 고지도 있습니다. 바로 신체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머리’! 이 머리는 모든 ‘생각의 근원’입니다. ⇨ 사람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지배하고 있느냐에 따라 → 인생의 불행과 행복이 결정되게 되어있다. 그렇습니다. ‘생각’은! → 내 삶을 승리하게도 하고, 패하게도 하는 ‘고지’입니다.

잠 23:7에 →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살고, 또 그렇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전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전도할 수 있지, 생각부터 나는 못 한다! 하면 정말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잘 지키는”(잠 4:23)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그러면 영적 고지 점령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 “우리의 생각과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령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고,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하시려고! 마음에 ‘소원’ 즉 ‘생각’을 주셔서 행하게 하십니다. 빌 2:13입니다.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아멘. 그런데 문제는! 사단 마귀도 사람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기 위하여, 마음속에 마귀의 생각을 넣어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사탄·마귀의 공격 목표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사탄은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목표를 바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사탄이 노리고 있는 목표는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전도는 안 된다. 나는 전도할 수 없다’는 생각을 넣어주어 좌절시키려고 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에 이런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으로 가득 차면! 우리는 영적 고지를 마귀에게 내어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전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말 해야’ 하고, ‘전도 현장에 나가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하자!’는 믿음을 가집시다. 사탄·마귀가 심어준 ‘전도는 안 된다.’ ‘할 수 없다’ ‘못한다’라는 생각의 진을 파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비신자! 어떻게 정할 것인가?

여기 예비신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 “구원을 목적해서 전도자가 마음에 품은 사람, 앞으로 신자가 될 예비자” 즉, 사랑하는 나의 친구, 가족, 친척, 동료, 이웃 중에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내가 영향을 끼쳐 전도하고자 하는 잠재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이 예비신자는 다른 말로 영적으로 내가 임신했다 해서 ‘태신자’라고도 합니다.

이 예비신자는 내가 늘 만날 수 있어서 영향을 줄 수 있고, 마침내 교회로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예비신자를 정하는 것과, 예비신자에게 영적인 영향을 주는 일입니다. 먼저 대상자를 선정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① 일차적으로는, 나와 관계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② 다음으로는, 지금 익숙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인 접촉 시도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비신자로 정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는 정한 사람에게 영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인데, 아주 신중하고도 친절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너 나랑 교회 가자! 예수 믿어야 돼! 안 믿으면 지옥 가!” 이런 식으로 해서는 그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2.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움이 있습니다. “혹시 나를 광신자로 보지는 않을까?”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그런 두려움은 현실이 아니며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물론 전도하다가 정말로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지레짐작으로 “내가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하면, 그 사람은 싫어할 거야! 나도 핍박을 받을 거야!” 지레 겁먹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용기를 갖고 실제로 한 번 전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8절 말씀입니다. 행 13:48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네! 복음을 전했더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란 누구를 말할까요? 네! 이 사람들이 바로 ‘예비신자’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믿더라.” 즉 ‘예비신자’가 → 믿고 ‘초신자’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네! 우리는 미리 겁먹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인 ‘전하는 사명’만 감당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3. 우리의 사명을 재인식하자!

오늘 성경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 같이 47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행 13:47 →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이 사명을 감당할 주체는 누굽니까? 바로 “너”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입니다. ▸사명을 선포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방인”입니다. 여기 이방인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영적인 이방인입니다. ▸사명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땅끝’입니다. “땅끝은 지리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모든 곳”을 말합니다. 내 가정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여러분이 가야 할 땅끝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그가 바로 땅끝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제’를 목적해서 세운 기관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사귐의 장소’를 위해 세운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아멘! 이것이 바로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피 값 주고 세우신 우리 교회가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영혼 구원에 총력을 기울이는 성도와 교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첫 부분인 46절을 보겠습니다. 행 13:46 →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유대인들)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네! 사도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처음에 의도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바울 일행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예수 잘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오히려 더 냉소적이고, 대적하여 나올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나는 구원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 구원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전도할 때! 교인확보 차원이 아닌, 그 영혼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만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히려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나오고,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회당이 꽉 차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습니다. 전도의 결과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나눔과 묵상


1.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고지 점령’이 왜 중요한지 나눠봅시다.


2. 나를 통해 전도 받은 사람이 바로 나의 면류관이며, 나의 자랑이며, 영광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예비신자(태신자)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그가 누구인지 서로 나눠봅시다.


3. 교회 안에서 행하는 어떤 봉사나 섬김보다 전도가 왜 가장 중요한 사명인지 나눠봅시다. 그리고 새 생명 전도 축제에 승리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전도 전략을 짜고 기도합시다.

이재영
2024-09-21
조회 104

제목: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왕하 8:1∼6)


본문의 사건은 열왕기하 4장과 연결되는 사건입니다. 이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던 수넴 여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수넴 여인의 신앙과 인품이 얼마나 훌륭했던지, 그를 소개하는 수식어가 대단합니다. 8절입니다. 왕하 4:8 →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단어는 신분상 높은 지위에 있는 ‘귀부인’이라는 뜻이지만, 본문 내용으로 볼 때, 현숙한 여인, 존귀한 여인, 리더십이 있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고, 몇 년 후엔 그 아들이 일사병으로 죽었는데, 엘리사가 기도하여 살려낸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적 사건이 있은 후, 이스라엘은 7년 동안 가뭄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이 수넴 여인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였습니다. 네! 그는 주는 자였기에 복을 받았습니다. 본인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서 가정이 함께 복을 받았습니다. 행 20:35 →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성경에 나타난 엘리사의 사역을 보면!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을 순회하면서 사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수넴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오늘의 주인공 여인이 선지자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엘리사 선지자를 더 잘 섬길 수 있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제안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음식을 먹은 후에 한숨 자고 가시거나, 하룻밤을 자고 갈 방을 하나 만들어 드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와 사환 게하시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바깥쪽 담 위에다가 방을 만들어서, 꼭 집안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 습니다. 그리고, 방에는 침대와 책상과 의자와 등불까지 준비해서 엘리사 선지자가 불편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이런 수넴 여인의 섬김에 감동을 받은 엘리사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4:13b →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그랬더니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하 4:13c →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평안하고, 아무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네! 수넴 여인은 ‘은혜 의식’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엘리사 선지자는 왠지 뭔가 돕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사환 게하시에게 이 가정의 어려운 사정이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가정엔 자식이 없습니다. 게다가 남편도 이제 나이가 많아 아이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는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했고, 정말 1년 뒤엔 아들을 낳았습니다. 왕하 4:17 →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엘리사가 여인에게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자식이 없던 가정에 생명 잉태의 기적, 아들을 낳는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참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기적이 이 가정에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서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이 일사병으로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머리야! 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수넴 여인은 25km나 떨어진 사마리아의 갈멜산까지 단숨에 달려가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엘리사 선지자가 여인의 집으로 가서 죽은 아이를 기도하여 살려냈습니다. 믿음 장인 히 11장엘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히 11:35 → “(믿음으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네! 이 여자들 중에 한 사람은 바로 수넴 여인일 것입니다.

이로써 엘리사를 잘 섬겼던 수넴 여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상급은 넉넉하게 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수넴 여인의 가정을 끝까지 돌봐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기근이 지속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7년 동안 기근이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는 수넴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8:1 →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나님은 수넴 여인과 그 가정에 7년 기근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은혜가 그 가정에 임했던 것입니까? 그것은 이 가정이 ‘베푸는 자요, 주는 것을 기뻐하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받는 자가 되기보다는, 주는 자가 되십시다.


2.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합니다.

엘리사가 가족들과 함께 기근을 피할 만한 다른 땅으로 가서 지내라는 말에 여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왕하 8:2 →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칠 년을 우거하다가…” 네!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과연 이 기근이 선지자의 말대로 앞으로 7년 동안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1년 만에 끝날지 모를 일입니다. 또, 이제 막 기근이 시작된 상황이라! 아직은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고향의 집과 가재도구와 땅을 그대로 둔 채, 7년이나 외국에 가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7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자신들의 집과 땅이 남의 손으로 넘어가서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일 일은 내일 일이요, 당장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순종하였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7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 큰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의 가족은 거뜬히 그 기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순종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수넴 여인처럼 즉각 순종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불순종하다가 큰 화를 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불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넴 여인처럼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려놓고, 버려두고, 떠나야 할 때는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오히려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마 19:29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수넴 여인과 그의 가족들은 이스라엘 고향 땅을 떠나서 블레셋 땅에서 7년을 지냈습니다. 그들은 비록 블레셋에 가서 7년을 지냈지만, 그곳에 정착하지는 않았습니다. 기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우려했던 대로 문제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집과 땅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경작하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쉽게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수넴 여인은 집과 땅을 되찾기 위해서 왕에게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이 왕을 찾아갔을 때, 왕이 앞서 만나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였습니다. 왕이 게하시를 불러 엘리사 선지자가 그 동안 행하였던 큰 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게하시는 엘리사 선지자가 베푼 여러 이적들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수넴 여인에게 행했던 기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아들이 없던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생기도록 한 것과, 그 아들이 몇 해 만에 죽었으나 엘리사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바로 그때! 수넴 여인이 왕에게 찾아와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고, 땅을 되찾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게하시는 즉시 수넴 여인을 알아보고는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8:5b →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의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기적의 주인공들이 왕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왕은 직접 수넴 여인을 불러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조처합니다. 왕하 8:6 →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설명한지라. 왕이 그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이르되, 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 하였더라.”

이 얼마나 절묘한 시점입니까? 하나님은 수넴 여인이 왕을 찾아올 때를 맞춰서, 왕이 게하시를 불러 엘리사가 행한 기적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했고, 엘리사가 행한 수많은 기적 중에서 수넴 여인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때 마침 그 주인공 수넴 여인을 딱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걸 두고 성경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이라고 합니다. 히 4:16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렘 5:24 →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성도 여러분! 이런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항상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 누리는 길은! 당장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때를 따라서 돕는 은혜를 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을 주실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복되다” 하신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이나 사례를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순종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순종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수넴여인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9-14
조회 57

제목: 치유의 길! (왕하 5:1∼14)


1. 다 가진 완벽한 사람도 불치병에 걸리면 똑같아진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대단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는 ① 아람제국의 군대 장관이었고 ②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으며 ③ 백전백승의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람 나라 왕의 총애와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아만에 대한 이런 화려한 평가들 맨 마지막에, 이렇게 한마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왕하 5:1c →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여기 ∼‘이나’라는 말은, ‘그러나’란 뜻입니다. 이 ‘그러나’는, 앞의 말을 180° 뒤집는 말입니다. 그는 큰 용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었지만, 그는 나병 - 한센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병환자더라”는 말은, 모든 삶의 희망을 꺾어 버리는 심각한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입니다. 불치병에 걸리고 나면! 돈이 있으면 뭐하고, 권력이 있으면 뭐하고, 왕의 총애를 받으면 뭐합니까? 그런 것들은 불치병을 치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병에 걸리면! 다 똑같아집니다. 세상의 타이틀은 의미가 없어지고, 다만 불치병환자라는 명찰을 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아만 장군뿐만 아니라, 인생은 모두 ‘그러나의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은 다른 병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있는 병’ ‘내 속에 있는 병’입니다. 현대인들 대부분! 신앙적으로 볼 때, 영적 감각과 예민함을 잃어버린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런 가운데서 살아날 길은 무엇일까요? 치유와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2. 그에게 치유의 길을 알려 준 한 작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집에 포로로 잡혀 와서 집안일을 돕고 있던 작은 하인 소녀가 있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왕하 5:3 →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소녀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아만 장군은 자초지종을 물어봤고, 마침내 아람 나라의 왕을 만나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엘리사는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하라고 처방합니다. 나아만은 그 말대로 순종하여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자!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해준 한 작은 소녀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람 제국의 국방장관을 복음화시키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5절과 17절 말씀을 보면, 병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이 다시 엘리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5:15b →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왕하 5:17 →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 성경은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요나서를 통하여 나아만 장군이 아람 나라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람나라의 수도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사실 요나는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별 성의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 심지어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한 여자아이의 소개로 복음의 씨가 나아만 장군에게 심어졌고, 그를 통해 아람 나라 백성들의 마음 밭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명의 한 소녀였지만! 위대한 전도자요 선교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3. 우리는 어떻게 소녀처럼 사람들을 치유와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①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여자아이는!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면! 나병도 거뜬히 나을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그는 비록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가 가진 신앙은 포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확실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하려면! 먼저 나 자신부터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말이 길지 않아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감동시킵니다. 이런 확신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신임받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10월 셋째 주일(20일)을 → ‘새 생명 전도축제일’로 삼고, 전도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데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바로 서로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 가족, 친척, 동료, 이웃들이야말로 내가 책임져야 할 전도대상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태신자 전도’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은 → ‘관계전도’입니다. 물론 노방전도도 필요하고, 전도지도 열심히 나눠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토양을 가꾸는 일이지, 그것을 통해서 실제적인 열매를 거두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관계전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전도’의 기초는 → ‘신임받는데’ 있습니다. 평상시의 ‘신뢰도’가 결정적인 순간에 → ‘설득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신임받는 삶을 살아야!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성이 없이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전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가정의 복음화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신뢰도에서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 소망을 심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아람 제국의 참모총장이요 국방장관이라 하더라도, 그가 나병에 걸린 이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격리, 추방,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 하녀 아이가 놀라운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면! 그분은 얼마든지 주인님의 나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3절) 절망 속에 있는 그에게 놀라운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이 문제들 속에서 실의와 좌절로 살아가고 있고, 무엇보다도 원초적인 ‘죄’의 문제로 인해 심판과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축복과 치유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 소녀가 입을 다물고 잠잠했다면! 어떻게 나아만이 고침 받고 구원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한 달여 뒤에 있을 ‘새생명 전도축제일’에 나는 누구를 초청할 수 있을까? 그 누구를 떠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 생각되셨습니까? 그렇다면! 한 달여 동안, 그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열심과 정성을 다해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뭣이 중한데!

나아만은 환자로서 의사인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료의 처방을 받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밖으로 나와서 나아만을 영접하거나 환대하지 않고, 그저 사환을 시켜 처방전을 전달했습니다. 왕하 5:10 →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이러한 처사에 나아만 장군은 확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에게는 지혜로운 부하가 있었습니다. 왕하 5:13(의역) → “장군님! 선지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해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저 강에 내려가 씻으면 깨끗해진다는데,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내세우고 높여야 할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글자 하나 차이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자존심’(Pride)은 →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자존감’(Self-esteem)은 → 누구와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 교만한 사람은 쓰시지도 않고 은혜도 못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사람이 겸손하여, 낮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은혜를 받게 되고 기적을 체험케 된다는 것입니다. 왕하 5:14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여기 ‘내려가서’란 말과 ‘말대로’, ‘말씀대로’란 말이 중요합니다. 나아만이 높은 자존심을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여 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된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겸손과 순종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내 생각’과 vs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씨름입니다.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교만’과 ‘자존심’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성경 인물 가운데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찾아보고, 서로 한 명씩 소개해 봅시다.


2.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뢰도’를 높이는 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신뢰도가 떨어진 이유와 회복의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들은 ‘천국과 영생’이라는 너무나 값진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영혼 구원’을 위해! 당신이 하려는 결심과 계획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9-07
조회 109

제목: 영성을 조율하고 회개하라! (왕하 3:9∼20)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죽고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자, 모압 나라는 매년 어린 양의 털과, 큰 양의 털을 각각 10만 마리의 분량씩 조공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보내던 것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재정 수입이 중단되었고, 체면도 손상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람 왕은 남 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서 함께 모압을 치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남방에 있는 에돔 왕과도 함께하기로 합니다. 드디어 북 왕국 이스라엘, 남 왕국 유다, 가장 아래쪽 에돔! 세 나라가 동맹을 맺고 모압을 치려고 출정합니다.

모압을 치기 위해서 북쪽에서 쳐내려오기보다는, 동맹을 맺은 에돔 쪽으로 내려가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쳐 올라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출정한 지 일주일이 되어 준비된 물은 다 떨어졌는데! 모압 경계까지 왔는데, 군인들과 군마와 수레를 끄는 짐승들이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전쟁 중에! 광야 한복판에서 물이 떨어지니,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탄식합니다. 왕하 3:10 → “이스라엘 왕(여호람)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릴 죽이려고 작정하셨구나.” 한탄하면서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은 신앙적인 해결방법을 찾습니다. 11절입니다. 왕하 3:11 →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즉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만한 선지자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두 왕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를 만나 한탄하고 원망함으로 그 문제를 잘 해결해 본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원망이나 불평에는 문제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반면에 유다 왕 여호사밧은, 문제를 만나자! 곧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습니다. 그는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의논하며 그의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역사의 운행자시오,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를 찾는 여호사밧 왕에게 한 병사가 이 근처에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 왕은 직접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왕의 위치는 신하를 시켜서 엘리사를 불러올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의 내방을 받은 엘리사 선지자는 무어라 말합니까? 왕하 3:15 →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조금은 엉뚱하고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의 말씀과 악기를 연결해서 말씀한 곳은 신구약 성경 가운데 이곳 한 군데밖에 없는데, 여기에는 신령한 뜻이 있습니다.

‘거문고’는 어떤 악기입니까? 거문고는 현악기입니다. 줄을 튕김으로 소리가 나는 악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문고의 생명은 그 줄에 있습니다. 줄이 끊어지면 소리가 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믿었던 줄들이 끊어지고 터져 나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믿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합니다. 인간관계의 줄이 끊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업의 줄이 끊어집니다. 물질의 줄이 끊어집니다. 건강의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줄이 끊어져 버린다 해도, 우리 성도들에겐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한 가닥 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버리시지 않는 ‘사랑의 줄’입니다. 실은 우리 인생의 줄들이 다 끊어져 버린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의 줄! 이 줄이 우리에게 남아있기만 하면! 우리 인생은 멋지게 연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흐가 작곡한 여러 위대한 음악 가운데 ‘G 선상의 아리아’는 바이올린의 G선 즉 ‘솔’! 그 한 줄만을 가지고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줄이 다 끊어져도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힘있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한 줄이 남아있다 해도, 조율이 잘 되어있어야만! 바른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나 자신의 거문고 줄은 팽팽하게 조율되어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바른 위치에 서 계십니까? 찬송의 줄이 풀려있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습니까? 말씀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습니까? 멋진 음을 내야 할, 당신의 거문고 줄은 제대로 조율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조율하는 것입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사이클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나도 기뻐하고 ▸그분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기보다 먼저! 나의 영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율하고, 인생의 사이클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행여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실 때, 헝클어진 삶의 자세로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과 조율된 삶, 사이클이 맞추어진 삶으로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찬송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하는 일은! 언제나 삐꺽거리는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먼저 나의 풀어진 영성의 악기를 다듬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실패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느슨했어도 괜찮습니다. 잘못 살았어도 괜찮습니다. 만일!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과의 인생조율을 제대로 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 전쟁 중에 물이 없어 고통 중에 있게 된 이 상황은, 그저 우연히 만난 상황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어져 버린 사람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우선 왕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졌고, 백성들도 게으르고 나태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헝클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찾아온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모압과의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 왕들의 문제요, 지도자의 문제요, 백성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 경우! 외부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가 진짜 문제입니다. 심령의 문제이며 영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드디어 엘리사 앞에 거문고를 타는 연주자가 불려 왔습니다. 조율을 마쳤습니다. 이제 엘리사는 거문고 타는 사람에게 ‘찬송’을 연주하게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던 이스라엘 왕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자던 여호사밧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장수들과 병사들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찾아오셨고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엘리사를 감동하시고 영감이 임했습니다. 여기에 깊고 신령한 뜻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메마른 에돔 골짜기에 샘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왕과 군사들의 가슴에 은혜의 샘이 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 축복의 샘물이 터지기 전에, 먼저 내 심령의 골짜기에 믿음의 샘물이 터지고, 기도의 샘이 터지고, 눈물의 샘이 터지고, 찬송의 샘이 터져야 인생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엘리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16절입니다. 왕하 3:16 →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이 말은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메마른 인생의 골짜기에 회개의 개천을 깊이 파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 10:12 →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잡초 우거진 묵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에게 “개천을 파라. 그리고 깊이 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율되고, 우리의 심령이 준비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보증하십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꿈꾸고, 기도하는 일에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 전쟁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잘 조율된 악기는 아름다운 음악, 멋진 승리를 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순종의 결과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왕하 3:20 →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아침 소제 드릴 때! 즉 온 백성이 일어나 아침 기도하는 그 시간,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른 아침! 골짜기에 흘러넘치는 물에 아침 해가 비취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아침,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햇살이 비쳐 붉게 물든 물을 본 ‘모압’의 군인들은! 엉뚱한 판단을 합니다. 이스라엘 연합군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피를 흘려 저렇게 만히 고였구나! 네! 물이 없던 곳에 붉게 물든 물이 생겼으니, 그렇게 판단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노략질하러 다가옵니다. 그때 3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모압’은 크게 패하고 도주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여러분을 괴롭히려고 찾아왔던 인생의 문제 또한 악한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헝클어진 영성을 조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히 회개하며 심령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의 생수로 가득 채워 주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이, 승리를 연주하는 멋진 인생으로 바뀌는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문제를 만났을 때, 한탄하면서 원망하는 북왕국 여호람 왕과, 신앙적인 해결방법을 찾았던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의 모습 중,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오늘 말씀을 통해 회복되고 조율되어야 할 내 신앙의 느슨함이나 부족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나누어 보십시다.

 

3. 대부분의 인생 문제가 외부적인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변하기를 기도하기보다, 나 자신이 하나님과 조율된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관리자
2024-08-31
조회 104

제목: 야 곱! (창 48:1∼10a)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야곱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단 1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히 11:21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게 답니다.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야곱에 대해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할 얘기가 많았을 텐데! 히브리서는 창세기 48장에 나오는 내용을 딱 반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기억해야 할 내용이라고 여겼을까요? ‘영적인 유산을 계승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유산’을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2가지 중요한 교훈’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양자의 특권’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8장을 이해해야! 그다음에 나오는 다른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창 48:1 →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48장은 ‘이 일 후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일’이라는 것은! 바로 앞 장인 창세기 47장의 ‘마지막 사건’을 말합니다. 여기를 보면, ‘야곱’이 애굽의 총리로 있는 아들 ‘요셉’을 부릅니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야곱은 요셉에게 ‘유언적인 부탁’을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의 묘지인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 후에 야곱이 정말 죽을 날이 임박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요셉은! 즉시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찾아뵙기 위해서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노환으로 기력이 쇠해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일어나 앉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창 48:3∼4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고 나서 오늘의 요절이며,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 5절의 이야기를 합니다. 창 48:5 →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성도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특이한 구절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손자인데, 그 손자들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입양해서 야곱의 첫째 아들인 르우벤과, 둘째 아들인 시므온의 서열을 뒤집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첫째와 둘째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자식으로 입양하는 얘기를 들어보셨나요? 성경 여기서 한 번 나오고,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내용을 잘 이해하셔야! 나중에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에 가서, 왜 ‘요셉’이 안 나오고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나오는지? 즉, 열두지파에 ‘요셉’의 이름은 없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게 됐는지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5절 말씀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겠다는 야곱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7절에는 라헬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들로 삼았으니, 결국 그들은 ‘라헬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성경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야곱은 ‘레아’의 첫째와 둘째 아들인 ‘르우벤’이나 ‘시므온’ 보다도, ‘라헬’의 아들인 ‘요셉’을 장자로 여겼습니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혔던 이유도! 야곱에게 있어서는 요셉이 ‘상속자 1순위’였기 때문이고, 이제 요셉의 두 아들을 아들로 삼음으로써 그것을 확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화’와 ‘상속법’을 알게 되면! 이게 무슨 소린지 알게 됩니다. 상속권은! 모든 아들들에게 주어지지만, 장자에게는 ‘두 몫’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맏아들에게 주는 ‘장자권의 특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로 ‘더블 포션(double portion)’ 갑절, 곱빼기라고 합니다. 맏아들에게는 두 몫을 주고,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한몫씩 주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 장자권 쟁탈전이 벌어졌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 가다 보면,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기록이 여호수아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이 ‘요셉’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양자로 입양했기 때문에, 아들이 열세 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땅을 13등분 해서 나눠 가져야 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제사장 지파가 된 ‘레위’지파 에게는 땅을 주지 않고, 대신 12지파로부터 십일조를 받아서 살도록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에브라임’이 한몫, ‘므낫세’가 한 몫! 그래서 요셉이 받을 ‘두 몫’을 장자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일까요? 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이 사건은! → 복음을 예표해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God has no grandchildren. “하나님에게는 손주가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롬 8:14∼17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상속자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똑같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창 48장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자식으로 입양하는 굉장히 특이하고 이상한 구절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야곱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이어받을 상속의 특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나 상속권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지만! 신앙의 부모로서 이것만큼은 꼭 물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천국을 상속하는 축복!


2. ‘과분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창 48:10 →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과거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눈이 어두워서 앞을 보지 못했는데! 지금 48장에서는 야곱이 자기 아버지처럼 앞을 잘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후손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 ‘이스라엘’이 뜻밖의 자세를 취하여 축복합니다. 창 48:14 →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야곱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냥 팔을 쭉 뻗어서 축복하면 되는데, 어떻게 한 거예요? 팔을 X자로 엇바꾸어 머리에 손을 얹은 것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시죠?

성도 여러분! 야곱이 왜 그랬을까요? → 이 역시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건을 동생 ‘에브라임’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형 ‘므낫세’에게 할아버지가 오른손을 얹어야 하는데, 자기에게 오른손을 얹어서 축복하며 기도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것이 오늘 두 번째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과분한 은혜” “넘치는 은혜”입니다. → 이 축복은! 형이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내가 이 축복을 받았을까? → “자격 없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나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요,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을 희생시켜 이루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엡 2:4∼5 / 8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잘나고 내가 잘해서 자격을 얻고,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 그 놀랍고 큰 은혜를 가슴에 되새겨야 합니다. ‘그래요, 주님! 주님의 은혜로! 자격 없는 나이지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었고! 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감사와 감격의 마음을 늘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이, 세상에 속한 것들로 인해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녀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자녀들! 그 능력을 힘입어 세상의 유혹과 욕심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이끌 수 있는 부모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과,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상속권자가 된 은혜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이번 부흥회(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에 받은 은혜와, 갖게 된 결심에 대해서 서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8-24
조회 150

제목: 바벨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렘 51:54∼64)

이스라엘의 주변국들 중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주었던 큰 나라들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애굽(이집트)만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모두 망해버렸지만, 바벨론은 유독 하나님의 멸망 예언을 받은 나라입니다. 이는 바벨론이 가장 악해서라기보다 유다 민족을 실제로 멸망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은 최후 심판을 받을 절대 악의 상징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 곧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치욕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속에서 ‘바벨론’은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나라였습니다. 앗수르는 과거 520년 이상 근동 아시아의 주인이었지만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했던 바벨론 역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정말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B.C 484~B.C 425)가 직접 현장을 답사하면서 쓴 전쟁사인 ‘역사’를 보면, 바벨론 성은 광활한 평야 가운데 세워진 대도시로, 성의 한쪽 길이가 22.5km, 둘레 전체를 합치면 90km나 됐습니다. 외벽 밖으로는 넓은 해자(물길)를 두어서 적이 쉽게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성벽은 이중벽으로 쌓았고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공간을 두었습니다.

  <바벨론 성과 이어지는 도시>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바벨론의 경제력은! 전 세계의 3분의 1에 해당할 만큼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철옹성과 같은 바벨론 성!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멸망하기 전날 밤의 기록이 ‘다니엘서’ 5장에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를 읽어보면! 바벨론이 왜 망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 교만함으로 망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왕

좀 길지만! ‘다니엘서 5장’을 읽어 가면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때로는 목사의 설명보다, 성경 본문 그 자체가 더 명확하고 힘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용을 보신대로 ‘느부갓네살’ 왕이나, 그의 아들이자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왕 역시 교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성전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기물들을 탈취하였고, 벨사살은 전제를 붓던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짓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교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교만하면 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따라 진실과 성실로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사는 겸손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교만과 우상숭배로 인해! 느부갓네살 왕이 영원하기를 꿈꿨던 바벨론 제국은 바사(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이후 ‘바벨론’과 ‘메데’를 정복하여 페르시아 연합 왕국을 일으킨 초대왕 ‘고레스’는 시작부터 새로운 정책으로 제국을 이끌어 가게 됩니다.


2.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고레스 왕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인 1879년, 지금의 이라크, 옛 페르시아의 신전에서 원통 모양의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설형문자로 글이 적혀 있었는데! 문자를 해독해 보니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페르시아의 ‘인권선언문’이었습니다.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레스 실린더’>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 “본인은 제국에 속한 여러 나라들의 전통과 관습과 종교를 존중할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노예제는 금지한다.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에게는 합당한 급여를 지급해야 함을 천명하는 바이다.”

네! 내용은 ⇨ ‘시민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노동의 가치’를 문서와 법령으로 분명하게 적시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고레스가 이런 생각과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 자신이 똑똑하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린더에 적은 내용보다도 더 명확하게, 고레스의 고백이 역대하 3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하 36:22∼23 →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어떻습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네! 이런 ‘은혜의식’이 있는 고레스 왕 까닭에, 바벨론으로 잡혀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만에 해방되어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던지! 시편 126편에서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126:1∼2 →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미국 내 모든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설문 투표를 했습니다. →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지도자들 중에 가장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지도자, 왕은 누구였는가?” 여러분! 이 설문 투표에 과연 누가 1등으로 선정되었을까요? 놀랍게도 바사 제국의 초대 왕 ‘고레스’가 차지했습니다.

그러면 이 고레스 왕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1등 지도자로 뽑혔을까요? 그것은 그의 ‘포용정책’과 ‘지방분권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생각의 근본부터 달랐습니다. 제국으로 끌려와 포로생활 하던 사람들을 오히려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고, 고국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을 지킬 수 있게 허용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번성하면, 세금을 거둬들여 제국 전체의 경제를 일으키는 전략을 활용했던 지도자입니다. 이전의 다른 제국들과는 달리 고레스 왕은 이렇게 선정을 베풀어서, 식민지 백성들도 그를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고레스’보다 200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고레스’ 왕이 나타나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 45:13 → “내가 공의로 그(고레스)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고레스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게도 기도 제목이 생겼죠!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정치를 욕하고, 정치인들을 향하여 핏대를 높여 비판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장차 이 나라의 정치를 주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갈등과 분열로 갈라진 백성들의 마음을 치유하며,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을 이뤄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세워지게 하옵소서.” 네!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바탕 위에 선, 바른 지도자들과 대통령이 세워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금요일부터 열리는 ‘부흥회’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흥회 ‘주제’가 무엇입니까? ⇨ “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이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믿음의 계승’이라는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이 네 명의 삶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자칭 메시아와 예수님이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이죠!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고레스’와 같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쓰시는 지도자들은 반드시 많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번 부흥회가 여러분의 가정들이 믿음의 가문으로 우뚝 서고, 교회적으로는 다음 세대들이 굳건한 신앙으로 세워져 위대한 지도자들이 배출되는 계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자만심과 교만,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징계와 패망의 원인임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 제국들이 썼던 식민지 정책과 vs 바사(페르시아)가 썼던 식민지 정책이 어떻게 달랐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나눠봅시다.


3. 이번 부흥회(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에 어떤 기대와 기도제목을 가지고 참여할 것인지? 서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8-17
조회 107

제목: 다시 돌아가게 하리라! (렘 50:17~20)

 

오늘 본문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50:17 →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패망하였고,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은 3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1차로 주전 606년 여호야김 왕 때, 2차로 9년 뒤인 597년 여호야긴 왕 때, 3차로 11년 뒤인 586년 시드기야 왕 때 끌려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깨우치고 돌이켜 미래에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차면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며 용서하시며 회복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징계의 도구로 쓰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유다를 징벌하는 권한을 주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렘 50:11에서 바벨론을 일러 → “나의 소유를 노략하는 자여!”라고 하십니다. 즉, 성전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기물들을 탈취하였고, 전제를 붓던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짓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것은! 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권위가 주어졌을 때는 그에 따른 책임도 있음을 생각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하나님의 소유인 ‘유다’에 도를 넘는 짓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누군가의 막대기와 채찍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중에 ‘부모’라고 하는 위치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징계하고 훈육하고 때로는 때리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내 자녀이지만, 그 자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을 대해야 하고, 그들을 징계할 때도,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조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자녀가 나의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월권이고 선을 넘는 것입니다.

이제 선을 넘은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파사(페르시아)라는 막대기를 통해 징계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렘 50:19 →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렇습니다. 유다는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첫째, 포로생활 70년은! ⇨ 안식과 정화의 기간이었습니다.

먼저, 역대하 36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대하 36:21 →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포로 생활 70년은! 죄악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 땅에 안식을 주었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렘 33:5b∼8 →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지만, 죄를 정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을 70년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70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같이 바벨론을 무찌르고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파사 제국’의 ‘고레스’ 왕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주전 538년! 고레스는 바벨론 시절 강제로 끌려온 자들에게 자신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포합니다. 그 후 2년간의 준비 끝에, 성경의 예언대로 70년이 꽉 찬 주전 536년, 유다 왕 여호야긴의 손자인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그러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렘 29:12∼14 →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더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을 보겠습니다. 겔 36:37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약속)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70년이 차면 유다를 다시 돌아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위해서, 다니엘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 9:2∼3 →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네!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한 것을 알고 나서, 그때부터 금식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에스겔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가정을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오직 믿음으로 남은 자들만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70년이 차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됩니다. → 1차로 주전 536년 스룹바벨의 인도로 49,897명이 귀환합니다. 그리고 2차는 78년이 지난 458년 에스라의 인도로 1,754명이, 3차는 다시 14년이 지난 444년 느헤미야의 인도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정확하게 그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6만 명 정도였습니다.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는 인원이지만!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이스라엘로 귀환한 것입니다.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구약성경 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주제인 → ‘남은 자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를 택하셨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킨 자만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들을 보겠습니다. 사 10:22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 되었음이라.”그렇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고 잘살고 있었기에, 오직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명의 빛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모든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 1:11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오직 믿고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대신 지셔서, 나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은혜 의식’이 있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렘 50:20 → “그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아 구원받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기도합시다. 이 땅의 모든 백성! 특별히 내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님을 통해서 죄로부터 구원받고,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면! 다니엘처럼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가족들이 다 예수 믿어 인가귀도 되어, 한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며 영광 돌리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바벨론이 심판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도를 넘어 과도하게 유다를 다뤘고, 스스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부지불식간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교만과 주인의식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부모 - 내 자식, 나 - 물질)

 

2. 하나님은 자기 백성 유다를 징계하시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갖고 계신 계획에 대해 나눠봅시다. (자녀교육의 도)

 

3. 해방이 선포됐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남은 자’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다짐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8-10
조회 130

제목: 애굽이여! 망하였도다. (렘 46:25∼28)


오는 목요일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민족 말살을 꾀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지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주권 회복과 광복은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식민지 잔재와 민족분단, 전쟁으로 얼룩진 아픔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자유와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뜻과 원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시도록 살자!

예레미야서는 45장까지로 유다를 향한 예언은 끝나고, 46장부터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제일 먼저 ‘애굽’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이 애굽에 대한 예언의 골자는 → “네가 아무리 강성해도, 하나님이 네 편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망한다.”라는 것입니다.

3절 이하를 보면, 애굽의 강성한 모습이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은 작은 방패, 큰 방패, 말, 투구, 창, 갑옷 등 ‘장비를 잘 갖췄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용을 주고 이웃 나라들로부터 산 ‘용병부대도 동원’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자신만만했습니다. 렘 46:8 → “애굽은! 나일강이 불어남 같고, 강물이 출렁임 같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주민을 멸할 것이라.” 호언장담합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북쪽 ‘갈그마스’로 진격합니다. 렘 46:9 → “(애굽 군인들을 향하여!)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 (용병들을 향하여!)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동원된 말과 병거들, 수많은 용사들! 그리고 용병부대! 한마디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은 “하거니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대단했지만! 결국, 바로 느고는 패하고 말리라는 것입니다. 주전 605년에 유브라데 강가 ‘갈그마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애굽’은 패배합니다.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그 패배의 모습입니다. → “애굽이여! 네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향(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도다. 그들이 그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수치와 상처를 입었고, 전사자들은 겹겹이 쌓였습니다. 마침내 세계의 패권은 애굽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바로 느고가 엄청난 전력을 동원했음에도 패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더 많은 군대와 무기를 동원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렘 46:13, 14b∼15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애굽 땅을 칠 일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 네(애굽)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그가(하나님)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매,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네! 애굽이 패한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이 애굽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이 여기에 대항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는 쪽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업도 그렇고, 입시도 그렇고, 취업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준비가 아무리 완벽해도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모쪼록! 하나님이 함께하실만한 일이어서, 성공하고 형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자!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렘 46:17 → “그들이 그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 여기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라는 말은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렸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레미야 당시의 ‘바로 느고’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세 당시의 애굽 왕 ‘바로’(람세스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게도 깨달을 기회가 많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가도록 허락하라”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십니다. 그러나 그 깨달을 기회들을 다 잃어버린 결과, 모든 짐승의 초 태생과 가정의 장자들이 죽은 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재난을 앞두고는 피할 기회를 주시고, 심판을 앞두고는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를 주시지도 않고 재난과 심판을 내리시는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기회를 깨닫지 못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만 있었겠습니까? 방주는 왜 만드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곧 임하니 준비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제가 그냥 상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 2:5 →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義)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무시하는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네! 노아는 전파하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회를 잘 활용한 사람은 삭개오입니다. 반면에,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는 무엇입니까? 그 기회를 잘 붙잡아서 버림과 망함이 아니라, 회복과 승리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오늘 말씀의 끝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시고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징계도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절인 28절부터 읽는 것이 이해에 빠릅니다. 렘 46:28 →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죄를 짓고 범죄 하면, 공의의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소망의 약속이 바로 앞 절인 27절에 있습니다. 렘 46:27 → “내 종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을 넘어 ‘축복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애굽과 바벨론에게는 결코 이런 종류의 약속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종 야곱’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아들에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 바벨론과 애굽은, 단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요,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지만, 그는 아들이 아니라 종입니다. 반면에, 심판받아 포로로 잡혀갔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과 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종’은 그냥 부려도 되고, 호의를 베풀어서 품삯을 주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매번 일했다고 해서 대가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비록 아들이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말썽을 펴도, 아들은 상속자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말을 아무리 잘 듣고 100% 순종해도, 종은 종일뿐입니다. 즉 바벨론과 애굽은 종이니까 일을 시키지만, 이스라엘은 아들이니까 징계를 해도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과 종의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행패를 부립니다. 결국,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몫을 떼어 줍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간 순간부터, 아버지는 그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만약 그가 ‘종’이었는데도 아버지가 그토록 기다렸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들’이기에 대문을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대단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면!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애통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업으로 받아야 할 ‘천국’의 상속권을 잃어버리고 지옥 유황불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는 애굽을 구원의 동아줄로 알고 붙잡았으나, 애굽마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예루살렘처럼 망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굳게 믿고 의지한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도리어 해가 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때는 도피가 아니라 회개가 답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인 줄 깨닫고 회개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잃어버린 자의 서러움이 훨씬 더 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