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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이재영
1일전
조회 83

제목: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경영 (사 26:11~19, 53:6)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어두운 현실 속에서 탄식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사 26:12 →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이 요절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샬롬)’을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모든 일! 즉, 고난, 눈물, 실패까지를 다 포함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가장 유익한 결말이 나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온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어둠과 고난 속에 그냥 방치하지는 않으십니다. 세심한 ‘개인을 향한 거룩한 경영’을 통하여, 우리를 부활의 빛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1. 길 잃은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의 경영'

시력이 지극히 나쁘고 방향 감각이 없는 양은! 목자가 없으면 눈앞의 풀만 좇아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 53:6a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눈앞의 재물, 세상의 편의, 자기 자랑과 헛된 욕망을 따라 제각기 제 길로 살아가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길 잃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진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 53:6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예수님께) 담당시키셨도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경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악과 죽음의 형벌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죽음의 길을 통해 인류가 천국에 이르는 막힌 담을 무너뜨리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 요절인 이사야 26장 12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 26:12a →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여기 ‘평강’이란 말은 →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입니다.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나, 내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안락함을 뜻하지 않습니다.(X) 오히려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풍랑처럼 요동칠지라도, 내 삶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누리는! 근본적인 평안과 담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O)

우리가 성경을 깊이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경영을 위해 선택하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처음에는 ‘버려지거나,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꿈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모세를 보십시오! ▸다윗을 보십시오! 세상의 기준과 눈으로 볼 때, 이들의 인생은 완전히 실패자요, 어둠 속에 내팽개쳐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광야와 절망의 현장에서도 그들을 계속 경영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죽음의 그늘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연단 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구속사의 중심인물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비로운 진리를 이렇게 확증합니다. 롬 8:28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요셉의 구덩이 같고, 모세의 광야 같으며, 다윗의 동굴처럼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샬롬)’을 뿌리내리게 하는 중이며, 여러분의 인격을! 고결하게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경영의 시간’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의 '모든 일'을 유익 되게 이루어 가시는 '섭리의 경영'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과정과 환난까지도 섭리하여 유익하게 결말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힘과 탐욕을 의지하는 세상 세력들이 승승장구하고, 영원히 세상을 호령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가을 추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름내 알곡과 가라지는 한데 엉켜 자라는데, 대부분 가라지가 더 무성하게 자라 알곡을 덮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그 결과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농부는 지혜롭게 가라지를 솎아 내어, 불에 던지고! 알곡은 하나도 흘리지 않고 잘 모아, 곳간으로 거두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개인의 삶을 이끌어가시는 역사도 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삶을 경영하실 때, 그를 거룩한 명품 인생으로 만드시기 위해 ‘고난이라는 연단의 가마’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벧전 4:12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느닷없이 닥쳐온 질병의 고통,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인 문제, 자녀들의 막막한 미래, 캄캄한 터널과 같은 개인의 고난은! 결코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거나’ ‘놓치신 우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성도’라는 명품 인생이 되게 하시려고! 고난이라는 ‘섭리의 가마’를 사용하고 계시고, 도자기를 두 번 굽듯이, 고난이 거듭 반복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겪는 시련과 고난의 진정한 가치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후 4:16~17 →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렇습니다. 고난의 가마 속에서 우리의 겉 사람이 고난을 받으나, 우리의 속사람, 영혼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을 복되게 경영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고난마저도! 마침내 선으로 바꾸어가시는 가장 완벽한 경영자이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침내 부활과 반전을 이루시는 '승리의 경영'

오늘 본문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위대한 승리를 선포합니다. 사 26:19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단한 삶의 무거운 짐 아래서도, 거룩한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결코 죽음의 그늘이나 절망의 구덩이에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확실한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을 때, 그 길의 최종 마침표는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 뒤에 찬란한 부활의 아침이 찾아왔듯이,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간 성도의 삶에, 반드시 ‘부활의 반전’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2:6~7 →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여기 ‘앗사리온’은 어른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1/16에 해당 하는 돈입니다. 그저 몇천 원 정도 되는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값싼 참새의 생명도 깊이 관심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우리를 너무너무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온 우주와 제국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주재(主宰)이신 동시에, 나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온 세계 역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경영해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 한 사람의 인생 역시 가장 완벽하고 거룩하게 경영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이 내 삶을 흔든다 해도,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계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계산과 힘이 무너져 내리는 그때야말로, 오직 하나님만이 내 삶의 참된 구원자이시며 ‘완벽한 경영자’이심을 드러내실 은혜의 시간입니다.

오늘 주신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꼭 새기시길 바랍니다. 사 26:12 →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아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샬롬의 평강’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나온 과거의 상처, 현재의 고통, 미래의 불안! 그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고, 마침내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의 결말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이 거룩한 약속을 붙들고, 염려와 두려움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 드리며, 꺾이지 않는 부활의 소망으로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오늘 요절 말씀(사 26:12)처럼, 내 삶의 크고 작은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이 결국 유익 되게 이루어 가 셨음을 경험했던 일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현재 나의 마음과 삶에서 평강을 빼앗아 가고 있는 가장 큰 염려(건강, 재정, 자녀, 미래 등)는 무엇입니까? 또한, 이를 ‘내 삶의 경영자’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드리는 데 필요한 믿음의 결단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신뢰하며, 불안 대신 감사를 선택하고 실천할 ‘담대한 믿음의 행동’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8-08
조회 138

제목: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영 (사 14:24∼27)


이사야 14장은 세상 권세가 영원할 것처럼 위세를 떨치던 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온 세계에 선포하신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선언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8세기경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세계 질서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앗수르 제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앗수르의 권세는 영원할 것 같았고, 하나님의 약속과 정의는 실종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엄위하신 음성이 선포됩니다. 사 14:24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여기 ‘경영(야아츠/יָעַץ)’은 → 단순한 계획을 넘어,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주권적으로 행사하는 ‘통치 행위’를 의미합니다.

26절은 이 ‘주권의 범위’가, 단지 작은 유다 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사 14:26 →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교회 담장 안이나 개인의 영혼에만 머무는 소극적인 영역이 아닙니다. 열방과 온 세계의 역사를 당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운행하시는 경영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에 이르러서는 절대적인 마침표를 찍습니다. 사 14:27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세상의 정치인이나 제국의 황제가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가지고 역사의 방향을 틀려고 해도, 우주의 통치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번 펴신 손과 작정하신 경영을 막아서거나 돌이킬 수는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강력한 정치지도자나 세속 제국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나온 역사를 깊이 통찰해 보면, 세상의 제국과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세계 경영을 이루기 위한 한낱 도구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분명한 예 중의 하나가 페르시아 초대 황제인 ‘고레스 왕’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사야 선지자는 이 고레스 왕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페르시아라는 나라가 등장하기도 훨씬 전에, 그의 이름을 명확히 거명하며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44:28 →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고레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방 제국의 왕이었고, 자신의 정치적 계산과 제국의 이익을 위해 피정복 민족들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세속적 정치 판단을 사용하셔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와 있던 당신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시고 성전을 재건케 하셨습니다. 세속 역사학자들의 눈에는! 이런 사건이 고레스의 개방된 종교 정책으로 보이지만, 구속사의 눈으로 보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복원을 위해, 이방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의 경영’이었던 것입니다.

근대 역사에서 히틀러의 몰락 역시, 이 진리를 증명합니다. 히틀러는 독일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유대 인종’을 멸절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600만 명을 학살하는 무자비하고 참혹한 일을 자행합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런 불의한 상황에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라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의 오만과 악행마저도 제어하시며, 끝내 공의로운 심판과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거대한 통치자이십니다. 히틀러의 무모한 동부전선 개척과 소련 침공이라는 결정적인 오판, 그리고 전 세계가 나치에 맞서 연대하게 된 역사적 흐름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천년을 장담했던 제국은 불과 12년 만에 산산조각 났으며, 히틀러 본인은 지하 벙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인간의 ‘오만한 야망’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경영’을 이길 수 없음을 역사가 똑똑히 증언한 것입니다.


2. 절망의 밤에도, 하나님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고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광복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속 하나님의 섭리) 이제 시선을 ‘우리 민족의 역사’로 돌려보겠습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겐 가장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저지른 폭정은! 우리 민족의 존재 자체를 살육하고 말살하려는 광기 그 자체였습니다.

1940년대 초반에 이르자, 국내외 수많은 지식인과 지도자들조차도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제 독립은 불가능하다. 일제는 영원할 것이다.”라며 변절하는 이들이 속출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벽은 너무나 두꺼웠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은! 한낱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하며 탄식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돌리시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만 매여 계시지 않고, 전 세계 역사의 틀을 움직여 일제의 패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군국주의적 오만으로 오판을 내리게 됩니다. 1941년 12월,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지만,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태평양의 전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일본 제국주의는 단번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은! 우리 민족의 자력이나 군사적 힘만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우연히 굴러들어 온 불로소득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잔혹한 압제 속에서도 눈물로 기도했던 수많은 성도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당신이 정한 때에 악한 압제자의 몽둥이를 부러뜨리신 하나님의 정교하고 완벽한 ‘역사 경영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해방은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온 기적”이었지만,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는! 세상을 향한 그분의 ‘공의로운 작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역사의 결실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한국전쟁과 UN 참전, 그리고 오늘의 세계정세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UN군의 참전 역사’는 세속 역사학자들도 선뜻 설명하기 힘든 수많은 ‘역사의 기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50년 6월 25일 당일 소집된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입니다. 당시 소련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기 때문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UN군 파병안을 무산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전 결의안이 투표에 부쳐지던 그 결정적인 순간, 소련 대사 야코프 말리크(Yakov Malik)는 회의장에 참석하지 않아 UN 파병안은 전격적으로 통과되었고, 전 세계 16개국 젊은이들이 이름도 모르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러 달려왔던 것입니다.

이어서 펼쳐진 ‘인천상륙작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추진한 인천상륙작전은!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평가받던 지극히 위험한 작전이었습니다. 낮은 물길, 엄청난 조수간만의 차, 입지적 불리함 등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수두룩했습니다. 그러나 작전 당일의 기상과 조수 간만, 그리고 적군의 방심이 기적적으로 맞물리며!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낙동강 아래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의 운명을 단숨에 뒤바꿔 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모든 역사의 순간들을 단지 ‘운이 좋았던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에서, 전국 각지의 피난처에서, 목 놓아 하나님께 기도했던 이 땅의 성도들과 백성들의 눈물을 보시고, 공산화의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생명을 보존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손길이자 역사의 개입’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사 14:27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히틀러의 나치 제국도, 일본의 군국주의도, 소련의 공산주의도, ‘하나님의 경영’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모두 쓰러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거대한 세계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지금 보잘것없이 흔들리는 ‘나의 작은 삶’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29∼31 →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거대한 우주와 제국의 흥망성쇠를 경영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동시에 나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귀 기울이시는 나의 참 아버지이십니다. 온 세계를 향한 경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핏값으로 사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역시 가장 완벽하고 거룩하게 경영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느닷없이 닥쳐온 질병의 고통,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문제, 자녀들의 막막한 미래, 캄캄한 터널과 같은 개인의 고난도 결코 하나님이 놓치신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고난마저도 마침내 선으로 바꾸어 당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설교 중 소개된 역사적 사건들(일제 패망, UN군 참전 등)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엇 인가요? 평소 세상을 바라볼 때 ‘힘과 권력의 논리’에 마음이 눌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세계 역사의 운전대를 잡고 계신 하나님께 내 삶의 운전대(가정, 건강, 미래, 재정 등)를 온전히 맡겨 드리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불안감’이나 ‘내가 주인이 되려는 욕심’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성도들의 기도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멈추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 할 ‘역사의 현장’과 ‘기도의 제목’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8-01
조회 142

제목: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 - 메시아 (사 11:1~5, 9~10)


오늘 본문 이사야 11장 말씀은 바로 그런 인생의 밤,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소망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한가운데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선언하십니다. - 모든 것이 잘려 나가고 죽은 밑동만 남았느냐? 염려하지 마라. 내가 그 말라 버린 뿌리에서 소망의 새싹을 틔울 것이다! -

오늘 말씀을 통해, 내 힘과 가능성이 모두 끝난 그 자리에서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절망의 그루터기에서 소망의 시작을 만드십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 11:1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기 ‘줄기’(게자, גֵּזַע)라는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는 ‘줄기’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 ‘푸르고 싱싱한 나무줄기’(X)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끼에 잘려 나가고 밑동만 겨우 남은 ‘그루터기’(O)를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 딱 그러했습니다. 한때 솔로몬 시절 울창하고 화려했던 다윗 왕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거대한 숲이 다 불타 버린 뒤, 타다 남은 ‘죽은 나무 밑동’처럼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제로(0) 상태가 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다윗의 줄기’가 아니라 ‘이새의 줄기’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화려하고 찬란한 ‘왕’을 상징한다면, 그의 아버지 이새는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보잘것없는 시골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왜 ‘다윗’이 아닌 ‘이새’를 언급하셨을까요? 인간이 자랑하던 화려함과 특권이 완전히 사라지고, 가장 낮아진 상태, 즉 인간의 가능성이 0%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끝난 바로 그 자리에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오실 메시아를 거대한 나무가 아닌 ‘연약한 한 싹(네체르,נֵצֶר)’으로 표현합니다. 사 11:1a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냥 손만 대어도 상처 입고 꺾일 것 같은 여린 새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세상의 화려한 왕궁이나 막강한 군사력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베들레헴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 연약한 싹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훗날 메시아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사 53:2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래서 세상은! 연약해 보이는 예수를 무시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무덤에 묻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나무와 같은 십자가에서 부활의 생명을 틔워 내셨고, 그 연약한 한 싹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를 이루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은혜는 개인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개인의 삶도 완전히 무너져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그때! 하나님은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십니다. <개그우먼 조혜련 씨에게 찾아와 새롭게 일하게 하신 하나님!> 성도 여러분! 사람의 눈에는 완벽한 종말처럼 보이는 절망의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결코, 절망을 그대로 버려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정이나 건강, 사업과 신앙이! 마치 바싹 말라 버린 그루터기처럼 보이십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그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의 새싹을 틔우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메시아는 정의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만민의 깃발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이새의 뿌리에서 자라난 메시아 예수님은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실까요? 본문 2절부터 5절은 메시아의 다스림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 11:2 →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으로, 지혜와 총명, 모략과 능력,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세상의 권력과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따라갑니까?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가진 돈, 학벌, 지위, 배경, 혹은 사람들의 소문을 따라 판단합니다. 약자의 억울함에는 눈을 감고, 강자의 편에 서기 쉬운 것이 인간 세상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 11:3~4 →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나 귀에 들리는 소문에 속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판단하시고 평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힘없고 가난한 자, 억울한 자를 외면치 않으시고 공의와 사랑으로 그들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힘과 폭력으로 사람을 눌러 다스리지만, 주님은 정의로 허리띠를 띠고 성실함으로 우리를 공평하게 다스리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혹 마음에 억울함이나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이 있으십니까? 낙심치 마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바르게 평가받고, 온전하게 서는 날이 올 것을 믿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 10절에서는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 11:10 →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여기 ‘기치(旗幟)’란 말은 → 전쟁터에서 아군들이 보고 모이는 ‘깃발’(Banner, Flag)을 의미합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군사들은 깃발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깃발이 서 있는 곳으로 모일 때, 살길을 얻고 승리를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높이 달리심으로! 온 인류가 바라보고 찾아와 구원 얻을 영적인 ‘깃발’ 곧 ‘만민의 기치’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절망 속에서 방황하는 세상 모든 죄인들이 바라보아야 할 소망의 깃발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의 깃발 아래로 나오는 자마다, 차별 없이 구원과 참된 안식을 얻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의 다스림을 받느냐? 우리의 삶과 가정이 어떤 깃발 아래 서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가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이라는 깃발을 따라가지 마시고,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만민의 기치,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삶의 중심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의 삶과 가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영화로움을 누리게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메시아의 나라는, 해함이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는 아름다운 ‘평화의 나라’입니다. 본문 6절부터 9절은 메시아의 나라를 한 편의 아름다운 시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 11:6~8 →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성도 여러분! 메시아의 나라는 ‘함께’라는 가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나 혼자만 잘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려하고 용서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늑대와 어린양이 친구가 되어 거닐고, 무서운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누우며,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세상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지고 약육강식의 비극으로 물든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를 통해 완벽하게 회복될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비전입니다.

이어지는 9절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 11:9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선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무한 경쟁 속에서 남을 짓밟아야 내가 사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때로는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분열합니다. 각자의 이기심이 부딪쳐 불협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가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가만히 보면! 어딜 가나 트러블메이커(Troublemaker)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님께 받은 그 크신 사랑과 용서로, 내가 속한 가정과 직장, 교회 안에서 남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버리고, 화평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갈 때,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우리의 삶 현장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내 삶에서 마치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처럼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았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소망의 싹을 틔워 주셨는지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2. 예수님은 외모나 소문이 아닌 우리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최근 누군가를 내 기준이나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했던 모습을 돌아보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결단한 바를 나누어 봅시다.


3.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직장, 교회)에서 ‘해함과 상함’을 줄이고 평화를 만드는 ‘피스메이커’가 되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언행이나 당장 실천할 행동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이재영
2026-07-25
조회 155

제목: 거룩한 하나님, 거룩하지 못한 백성! (사 6:1~13)


1.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 우리 영혼의 선명한 거울이자 진단서

오늘 본문은! 남 왕국 유다를 경제적·군사적 번영으로 이끌었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로 시작됩니다. 웃시야는 무려 52년 동안 통치했던 강력한 왕입니다. 그는 유다를 역사상 가장 힘 있는 나라가 되도록 이끌었던 왕이었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에게 웃시야 왕은 국가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태산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었습니다. 순간,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혼란의 그림자가 온 유다 땅에 드리워졌습니다.

바로 그런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영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눈을 들어 바라본 것은, 웃시야 왕의 죽음으로 비어 있는 세상 왕의 보좌가 아니라, 하늘의 ‘높은 보좌’에 앉으신 진짜 왕, 만군의 여호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땅의 보좌는 언제든지 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사람, 믿었던 환경, 든든했던 물질의 버팀목은! 언제든 무너지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바뀌고 흔들릴지라도,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눈을 들어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웅장한 찬양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스랍 천사들’이 부르는 찬양이었습니다. 사 6:3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3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을 찬양하는 노랫소리를 들은 이사야 선지자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기뻐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의 탄식을 쏟아냅니다. 사 6:5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가 ‘망하게 되었다’고 외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직접 본 인간은 살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 때문입니다. 출 33:20 →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한 순간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는 오히려 백성의 죄를 꾸짖던 선지자였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인 이사야 5장에서도, 여러 번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며 백성들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하는 소리를 듣자, 이제는 다른 사람을 향했던 “화 있을진저”가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으로 바뀝니다. 즉,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시고, 자신은 너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한순간에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는 인간의 상대적인 의로움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 영혼의 진단서이자 선명한 거울입니다. 우리가 세상 기준이나, 나보다 못한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는 “내가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착하게 살았는데 이만하면 됐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온전하신 거룩하심의 빛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은! → 인간의 죄를 드러내지만,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은혜로 정결하게 하시고, 자신의 사명을 맡기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깨달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단호한 수술칼 -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아픈 사랑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멸망을 직면한 이사야, 그리고 그 시대 유다 백성들의 진짜 문제는 ‘영적인 무감각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사 6:9∼10a →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깨우치라는 것이 아니라, 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일부러 망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지금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이미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도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할 만큼,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다는 ‘역설적인 탄식’입니다. 흔한 당뇨지만, 무서운 이유 중의 하나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말초신경의 마비’입니다. 그래서 발에 상처가 나고 썩어 들어가는데도 정작 환자는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난리냐”라며 방치하다 보면, 썩은 부위가 온몸으로 퍼져 결국 패혈증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때 환자의 생명을 책임진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호하게 수술칼을 들어 부패한 부위를 도려냅니다. 칼이, 살을 찢고 뼈를 단절하는 순간은 고통스럽고 비참하지만, 그 도려내는 수술만이 환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외세의 침략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포로로 끌려가는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썩어버린 죄의 부위, 우상숭배와 교만의 부위를 잘라내지 않으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영원히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살려내기 위해 ‘심판’이라는 아픈 수술칼을 빼 드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결코 우리를 향한 포기나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내시려는 주님의 단호하고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도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풀무불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그것은! 영적 패혈증으로 죽어가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교만과 탐욕의 덩어리를 도려내신 하나님의 은혜의 수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방치하지 않으시고, 아픈 정화를 통해서 정결하게 만드시는, 참된 영혼의 의사이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정화의 고통을 통과한 자 - 거룩한 씨앗과 사명의 재발견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여 망하게 되었다고 절망하던 이사야에게,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천사 중 하나가 하늘 제단에서 부젓가락으로 붉게 불타는 숯을 집어 가지고 날아옵니다. 그리고 그 벌건 숯을 이사야의 떨리는 입술에 대며 선포합니다. 사 6:7 →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1,000도가 넘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이가, 연약하고 민감한 입술에 닿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뜨겁고 끔찍한 고통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불을 통해서 부정함이 태워지는 거룩한 정화(Purification)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제단 숯불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이라는 뜨거운 용광로를 통과함으로써, 우상숭배의 묵은 때가 벗겨지고 정결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환상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픈 정화 과정을 통과하여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는, 비로소! 이전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과 음성이 들려오게 됩니다. 사 6:8a →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두려워 떨며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치던 이사야가, 죄 사함의 감격 속에서 뭐라고 응답합니까? 사 6:8b →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부정한 인간이, 하나님의 정화 수술을 거친 후! 담대히 시대의 사명자로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13절은! 심판의 결과로 온 땅이 황폐해지는 절망적인 모습으로 끝을 맺는 듯합니다. 사 6:13a →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울창했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도끼에 찍혀 다 넘어지고, 그루터기만 황량하게 남은 벌목장의 모습처럼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완전한 비극이요, 끝장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질 않았습니다. 위대한 소망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사 6:13b →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산은 그야말로 더 이상 어떤 생명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봄비가 내릴 때, 그 남은 그루터기 한구석에서 연둣빛 작은 ‘새싹’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내밀고 돋아납니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 작은 새싹이 자라, 다시 푸른 숲을 이루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쓰러진 절망의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거룩한 씨’로! 다시 새순을 돋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픈 연단의 과정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그 그루터기를 통해, 하나님은 정결한 새 역사를 다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스러운 연단과 영적 정화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의 ‘그루터기’로 만들어가시는 거룩한 과정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박혀있던 교만과 부패, 세상 탐욕을 잘라내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단 숯불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이 어두운 시대 속에서 ‘거룩한 씨앗’으로 세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했을 때,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며 탄식했습니다. 최근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배를 통해 내 안의 숨겨진 교만이나 영적 부패함을 선명하게 발견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할 때 당시는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보니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모든 것이 베어지고 황폐해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거룩한 씨인 ‘그루터기’를 남겨두어 소망의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 이 시대 속에서 내가 거룩한 그루터기(씨앗)의 사명자가 되기 위해, 실천할 구체적인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7-18
조회 160

제목: 살아가요, 하나님 나라! (막 1:14~15)


서론: 사탄의 살라미 전술과 우리의 세속화

매년 여름이 되면 교회학교는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로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올해 우리 교회학교와 수련회의 전체 주제는 오늘 설교 제목과 똑같은 “살아가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를 배울 때, 교회의 어른이자 부모인 장년들 역시 동일한 말씀의 고백 위에 서서 삶의 방향을 맞추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선명하게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혹시 '살라미 전술(Salami Tactics)'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살라미는 워낙 딱딱하고 짜서 한 번에 통째로 먹기 어렵기 때문에 아주 얇게 썰어 한 조각씩 먹는 이탈리아식 소시지입니다. 이를 빗대어 정치나 외교, 심리전에서는 '목표를 미세한 단계로 나누어,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야금야금 쟁취하는 전략'을 뜻합니다. 심리학의 '문전 걸치기 기법'처럼, 일단 열린 현관문 틈 사이로 한쪽 발을 밀어 넣는 데 성공하면, 안방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은 훨씬 쉬워진다는 원리입니다.

저는 사탄이 쓰는 이 전술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물들어가는 '세속화의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당장 하나님을 버리라고 정면으로 도전해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얇고 사소해 보이는 조각 하나를 삶의 틈바구니로 넌지시 내밉니다. “이번 주 딱 한 번만, 예배보다 자녀의 학원 스케줄을 따라가 볼까?”, “다들 거짓말을 하는 비즈니스 상황에서 이번 한 번만 살짝 타협해 볼까?” 하는 속삭임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장 이 작은 조각 하나를 수락한다고 해서 내 신앙이 당장 무너지지는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여전히 주일에 교회에 가고 있고 직분을 유지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얇은 조각들이 우리 삶에 하나씩 쌓이기 시작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얇게 썰려 나가는 소시지처럼 우리의 거룩함이 조금씩 썰려 나가고, 슬며시 문틈에 들어온 세상의 발 한쪽이 결국에는 우리 영혼의 안방까지 통째로 차지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선포하신 첫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가치관과 태도를 새롭게 고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사후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우리의 일상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까요? 세 가지 영적 진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영토'가 아니라 '왕의 다스림'입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는 눈에 보이는 영토나 국경선이라기보다 '왕의 다스림, 통치, 주권'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을 믿는 우리의 근본적인 소속과 정체성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완전히 바꾸라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나의 삶 전체에 새로운 왕의 통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거액의 몸값을 치르고 노예시장에서 구출해 내며 자유를 주자, 평생 그의 백성이 되어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흑인 소녀의 일화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의 목숨값이라는 가장 값비싼 대가를 내어주시고 우리를 사서 존귀한 자녀이자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매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는 주님을 왕이라 고백하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내 인생의 왕좌에 다시 나 자신을 올려놓을 때가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월요일 아침 치열한 삶의 전쟁터인 일터로 출근하실 때 눈을 감고 선포하십시오. “주님, 오늘 이 일터에 주님의 다스림이 임하게 하옵소서.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정직과 사랑으로 대하게 하옵소서.”

가정에서 갈등이 찾아올 때도 내 감정이 아닌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선택하십시오.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곳에서 왕의 다스림을 인정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시작은 '나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회개'입니다.

왕의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요구하신 첫 번째 반응은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라고 하면 내가 지은 잘못을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인 후회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 즉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노ια)'는 단순한 후회를 넘어서 생각의 방향을 완전히 돌이키며 삶의 궤도를 수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반역의 자리를 떠나 왕께로 귀순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내 생각, 내 경험, 내 욕심을 기준으로 이끌어오던 '내 나라'를 스스로 폐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기준이 되는 '하나님 나라'로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이양하는 영적인 전향입니다.

이런 회개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질서를 멈추고 바꾸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안전하다고 믿었던 세상의 성공 신화,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교만해지거나 스스로를 괴롭혔던 마음, 물질이 내 삶을 책임져 줄 것이라 믿었던 물질만능주의의 태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삶의 운전대를 주님께 기꺼이 내어드려야 합니다. 나의 재정 관리, 자녀 교육의 방식, 배우자를 대하는 언어 습관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가치관을 바꾸고 왕 앞에 엎드릴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과 안식이 시작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힘은 '복음을 믿는 백성의 정체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에 이어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복음’, 즉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당시 로마 세계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이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나라가 평화를 찾았다는 국가적인 선언에 쓰이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복음을 믿으라 하신 것은, 이제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은 완전히 힘을 잃었고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왕으로 즉위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공식적인 승전보'를 믿으라는 뜻입니다.

왕이 바뀌면 그 나라에 속한 백성들의 신분과 정체성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불안해하고,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에 종노릇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영광스러운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인 지식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이 새로운 정체성에 걸맞게 왕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신뢰할 때, 우리는 세상이 흔들려도 굳건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서도, 건강의 위기 앞에서도, 자녀 문제로 속이 상할 때에도 "나의 왕이신 주님이 이 상황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절망 대신 소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특권이자 믿음의 힘입니다.

결론: 온 세대가 함께 고백하는 “살아가요, 하나님 나라!”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론에서 경고했던 사탄의 교활한 살라미 전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탄이 아주 얇은 소시지 한 조각 같은 타협안을 내밀며 우리의 거룩함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려 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대응 전략은 선명해야 합니다. 내 삶의 아주 작은 영역,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매 순간 하나님의 통치를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교회의 어른이자 부모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내어준 삶의 작은 조각들은 단순히 나 한 사람의 영적인 침체나 연약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세속적인 방식과 성공주의에 조금씩 문을 열어줄 때, 우리의 등 뒤를 보고 자라는 다음 세대들은 그 열린 문 틈새로 무섭게 들이치는 세상의 거센 파도를 아무런 방어벽 없이 온몸으로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앞의 스케줄 때문에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모습을 한 번 보여주면, 우리 자녀들은 커서 아예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버리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세속화의 거센 물결이 우리의 가치관을 집어삼키려 밀려올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온 교회를 향해 손을 맞잡고 당당하게 외쳐야 합니다. “살아가요, 하나님 나라!” 이 선포는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내 사랑하는 자녀와 다음 세대를 거룩하게 지켜내겠다는 우리의 '영적인 결기'이자 '신앙적 약속'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풍요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좁은 길을 선택하고 묵묵히 살아내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등대를 보여줄 때,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백성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정과 온 교회 위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원 포인트 설교’의 취지와 관련하여, 우리 자녀들이 가정에서 나의 어떤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배울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영토’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입니다. 현재 내 일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잘 임하고 있는 영역과, 반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내가 주인 된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우리의 다음 세대(자녀 혹은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세상의 거센 가치관이 들이치지 않도록, 내가 어른으 로서 가정과 교회에서 보여주어야 할 ‘거룩한 좁은 길의 모습’은 무엇인지 한 가지씩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6-07-11
조회 175

사람을 향하신 주님 (시 8: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잡하고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8편은 ‘다윗의 시’라고 표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도! 우리가 겪는 그런 ‘영적 침체와 영혼의 밤’을 지나면서 이 시를 쓴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 시를 통하여 아주 분명하고 확신에 찬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

다윗은 이 시에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나 사람의 연약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1절에서 보듯이 다윗은 먼저! 자신의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8:1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리고 이어서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8:3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은 캄캄한 광야와 같은 상황 속에 있었지만! 오히려 밤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그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며 가슴 벅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이 거대하고 경이로운 우주를 만드신 분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구나!” 다윗은 스스로 자신을 생각하면 미약하고 초라했지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주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보다 크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크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확신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광대한 우주와, 위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던 다윗은! 시선을 돌려 자신과 인간을 바라보며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4절입니다. 시 8:4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 질문은! 인간이 얼마나 대단하고 뛰어난 존재인지를 뽐내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 이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사람은 그저 작은 먼지 만한 존재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보잘것없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마음에 두십니까?”라는 감탄사인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다시 보면 ‘생각하시며’와 ‘돌보시나이까’라는 단어가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시 8:4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 말 속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시며’는 단순히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관심을 두고 마음에 품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돌보시나이까’는 ‘찾아오시고, 살피시고, 돌보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사람의 삶 속에 찾아오셔서, 함께하시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8편 4절은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구절이 아니라, 인간을 끝까지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다윗의 감탄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토록 크신 하나님께서, 왜 작고 보잘것없는 나를 기억하실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사람을 존귀하게 지으셨습니다.

5절에서 다윗은 좀 더 깊은 은혜로 나아갑니다. 시 8:5 → “그를(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이 말은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 중에 오직 사람에게만 특별한 영광과 존엄성을 부여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만물을 말씀만으로 지으셨지만, 새와 짐승들은 흙으로 빚어 지으셨습니다. 창 2:19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각종 새를 지으시고…” 재료로만 보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이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짐승과 구별되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창 2:7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성품과 영을 닮은’ 고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진정한 가치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기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고 건강을 잃어 세상 기준으로는 쓸모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의 가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치는 나를 만드신 최고의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형상’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품이다”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자긍심을 가지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4.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존귀하게 여기시는 이유는! 단순히 대접만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특권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시 8:6 →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하나님은 존귀한 인간에게, 당신의 창조 세계를 돌보고 가꾸는 거룩한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 세계 위에 높이 세우시면서, 동시에 청지기의 책임도 함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전’하는 사람이며,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그렇습니다. 6절의 ‘다스린다’는 말은!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마음대로 파괴하고 착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돌보고, 보호하며, 아름답게 관리하라는 ‘청지기적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날마다 ‘기후 재앙’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후 변화, 산림 훼손, 해양 오염, 생물 다양성 감소와 같은 문제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상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창조 세계를 잘 보존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잘 보전할 때, 창조 세계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의 탐욕으로 창조 세계가 훼손될 때, 하나님은 탄식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 세계를 잘 돌보는 일은! ‘환경 운동’ 이전에 ‘예배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상을 사랑과 책임으로 관리하는 것이 곧,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사명을 저와 여러분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감당하도록 맡기셨습니다.

 

5.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위로와 힘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가치는! ▸ 내가 나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 또한, 타인들의 나를 향한 냉정한 평가나 세상의 평판에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느냐가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면서, 스스로가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 낙심한 분이 계십니까? 세월의 무게 앞에 건강을 잃고 예전 같지 않은 육신 때문에 서글퍼하고 계십니까? 풀리지 않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가슴이 옥죄어 오고 위축되어 있습니까? 혹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받아, 내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부정당한 것 같은 깊은 절망 속에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 상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온 여러분을 향해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세상이 너를 모른다 해도, 나는 너를 분명히 기억한다. 세상은 너의 능력을 보지만, 나는 너의 존재 자체를 존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내가 너를 통해 이룰 거룩한 사명이 아직 남아 있단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거절할 수 없는 이런 사랑은, 2천 년 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 우주 앞에 가장 분명하게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언가 의롭고 존귀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가 아니라, 여전히 연약하고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하고 절대적인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실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주해야 할 세상은 여전히 여러분을 작게 취급할지 모릅니다. 때로는 밀려오는 염려와 피로 속에서 여러분 스스로도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며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 한복판에서 영적 전쟁을 치를 때, 어떤 낙심되는 상황 속에서도, 이 한 문장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 기억된 사람이며, 예수짜리 가치를 지닌 존귀한 사람이다!” 이 굳건한 믿음이! 흔들리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용기를 주며, 슬픔 대신 감사와 찬양으로 당당히 살아내게 할 힘이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복잡하고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영적 침체를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서로 나눠봅시다. 그리고 그때 나를 위로해 주었던 하나님의 말씀이나 은혜는 무엇이었나요?

 

2. 내가 건강을 잃거나 세상에서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이자 ‘최고의 걸작품’이기에 나의 가치가 변함없다는 사실이 오늘 나에게 어떤 위로와 용기를 주는지 나눠봅시다.

 

3.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고백하기로 결단한 문장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 기억된 사람이며, 예수짜리 가치를 지닌 존귀한 사람이다!”를 속도원들과 함께 크게 외쳐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을 가집시다.

김성윤
2026-07-04
조회 166

시편 1편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 (시 1:1~6)

 

1. 행복은 어디서 오나? ⇨ 소유인가? 관계인가?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소유’에서 찾으려고 평생을 숨 가쁘게 달립니다. 그러나 소유는! 결코 행복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소유는 늘 상대적입니다. 누구와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만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만족은 그 수명이 너무나도 짧습니다. 전도서 1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 1:8b →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현대 심리학에는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아무리 넓은 집을 소유해도, 인간은 금방 그 상황에 적응하여 더 큰 소유를 원하며, 더 새로운 것을 찾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끊임없이 달려간다는 이론’입니다. 그렇습니다. 쳇바퀴는 빠르게 돌기는 하지만!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진 못하고 제자리에서 돌뿐입니다. 소유의 행복은! 바로 이 ‘쾌락의 쳇바퀴’와 같습니다. 열심히 뛰어서 뭔가를 가졌는데, 조금 지나면 또 목이 마른 것입니다. 소유에서 얻는 행복은! 이처럼 수명이 짧은 ‘가짜 행복’입니다.

이제, 행복을 ‘소유’에서 찾으려 했던 시도는 내려놓고, 진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오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소유’가 아니라 ‘관계’를 잘 맺는 사람입니다.

 

2.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시편 1편은 우리가 맺어야 할 ‘두 가지 차원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먼저 ‘피해야 할 관계’(끊어야 할 관계)입니다.

본문 1절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시 1:1 → “복 있는 사람은! ①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Walk) 아니하며 ② 죄인들의 길에 서지(Stand) 아니하며 ③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Sit) 아니하고!” 여기 나오는 ‘따르다(Walk) ­ 서다(Stand) ­ 앉다(Sit)’라는 동사의 흐름을 보십시오. 이것은 악과의 관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깊어지고 동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답부터 말씀드리면! 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 있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친구나 이웃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 내가 누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내가 고스란히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보는 TV, 인터넷 그리고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 속에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과 오만한 자들의 문화가 가득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사탄은 오늘날 사람을 타락하고 병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이 ‘알고리즘’을 장악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미디어 소비 패턴을 이 알고리즘과 대입시켜 보면 → 시편의 ‘따르다 ­ 서다 ­ 앉다’라는 ‘점진적 오염’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세상의 자극적인 뉴스나 비교하는 글, 음란한 콘텐츠를 ‘따라 걷다 보면(Walk)’ ⇨ 어느새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Stand)’ 보게 되고 ⇨ 결국에는, 하나님 없는 세상의 방식이 내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Sit)’ 버리게 됩니다. 알고리즘의 꾀가! 나를 망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권면과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엡 5:8 →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고후 6:14b →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렇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끊어야 할 것을 끊고, 정리해야 할 것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빛의 자녀로 새로워지는 단호한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다음으로 ‘힘써 맺어야 할 관계’입니다.

그것은 바로 →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즐거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 세상이 말하는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즐거움, 즉 ‘엔조이’(Enjoy)입니다. 이 세상의 재미는! 갈증이 날 때 마시는 톡 쏘는 차가운 콜라 한 잔과 같습니다. 마시는 순간에는 짜릿하고 목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내 입안이 텁텁하고 더 심한 갈증을 유발합니다. 계속 마시다 보면! 당뇨를 일으키고 몸을 망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존재론적 기쁨, 바로 ‘딜라이트’(Delight)입니다. 본문 2절의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에서 이 ‘즐거움’이 바로 ‘Delight’입니다. 이것은 깊은 산속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천연 암반수’와 같습니다. 첫맛은 콜라처럼 짜릿하지 않을지 몰라도, 마실수록 속이 시원해지고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줘서,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고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깊은 내면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 단지 머리로만 기억하는 ‘독서’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깊이 새기고 ▸입으로 고백하며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유행가 가사처럼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뿐이고, 그 사랑이 결국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이며, ‘영원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피해야 할 관계는 단호히 끊고, 맺어야 할 관계는 힘써 증진 시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행복한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좋은 인생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어 ‘철을 따라 좋은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되고 ▸가뭄이 찾아오고 세상이 메말라도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나무처럼 ‘번성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결과!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세상 속에서 이웃과 타인에게도 시원한 그늘과 생명의 복을 흘려보내는 ‘형통의 통로’가 됩니다.

요즘 제 설교에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그는 18∼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신앙인이자 정치가로서 평생을 고독하게, 아프리카 흑인들의 노예해방과 사회 개혁을 위해 싸워, 마침내 ‘노예무역’을 입법으로 폐지 시킨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윌리엄 윌버포스’도 젊은 시절에는, 세상의 즐거움(Enjoy)인 사교계와 권력, 도박에 빠져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25살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그는 매일 아침 몇 시간씩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Delight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격무와 가혹한 정치적인 음해 속에서도, 그는 결코 지치거나 그가 품은 뜻은 시들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시냇가에 깊이 뿌린 내린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그 영적인 힘으로, 당시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노예무역 폐지’라는 거대한 열매를 맺어, 영국 전체와 인류를 살리는 위대한 ‘형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입니다. 수 1:8 →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는 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자신도 형통하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나안 땅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다윗 왕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도 이와 같습니다. 열왕기상 2장 3절입니다. 왕상 2:3 →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의 뿌리를 내리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일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악인들은! 결국 불행한 열매를 맺고 맙니다. 그들은 추수 때 바람에 쉽게 날아가 버리는 쭉정이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맙니다. 결국, 악인들은! 의인들이 받는 축복의 자리에 결코 동참할 수 없고, 농부가 쭉정이를 모아 불태워버리듯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당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알곡과,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 쭉정이를 반드시 구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최종 판결은 명확합니다. 의인들의 길은 인정해 주시고 영원한 상을 주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결국 망하게 하십니다. 잠언 4장 18~19절은 선포합니다. 잠 4:18~19 →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짜 행복한 사람은 → ‘소유의 많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악한 미디어의 알고리즘을 거룩하게 끊어내고, ‘말씀을 즐거워하며(Delight)’ 살아가는 진짜 복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소유에서 얻는 행복은 수명이 짧은 가짜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간절히 원해서 소유했지만, 만족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경험이 있나요? 요즘 나의 삶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방해하는 세상의 기준은 무엇 인지 나눠봅시다.

 

2. 요즘 나의 영적 건강과 믿음을 흐리게 만드는 ‘스마트폰, 미디어 콘텐츠, 혹은 끊어내야 할 친구나 습관’이 있다면 무엇인지 솔직하게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줍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delight)과 세상의 재미를 즐기는 것(enjoy)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최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영혼 깊은 곳에서 느꼈던 은혜나 기쁨의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6-27
조회 175

제목: 한 성령, 다양한 은사! (고전 12:1~12)


오늘 편지의 수신 교회인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다양한 은사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신령한 지혜와 지식, 방언과 예언, 병 고침과 같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가 뚜렷하게 나타났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린도 교회는! 그 풍성한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분쟁과 다툼’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은사의 참된 영적 진리’를 제대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세 가지 영적 진리’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여! 건강한 믿음의 사람 그리고 교회를 더욱 아름답게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은사의 출발점은, 오직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선포하는 ‘첫 번째 영적 진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은사와 직분의 출발점은 오직 한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고전 12:4~6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바울은 ‘여러 가지’라는 단어와 ‘같다’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은사도, 직분도, 사역의 형태는 여러 가지고 다양하지만, 그 모든 것을 주시고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선언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범했던 가장 큰 실수는! 은사의 핵심을 → ‘무엇을 받았는가?(What)’라는 ‘기능과 외형’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은사의 본질은 → ‘누가 주셨는가?(Who)’라는 ‘기원’에 있습니다. 즉, 내가 무슨 능력과 재주를 가졌는가 보다, 그것을 누가 주셨는가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은사’를 → ‘카리스마(χάρισμα)’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σ)’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즉, 은사는 내 노력이나 자격으로 쟁취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한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듯,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자체가 내 지혜가 아닌 성령의 역사이듯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모든 선한 은사와 직분은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은사도 ‘자랑의 제목’이 될 수 없고, 어떤 직분도 ‘열등감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는 그 모양도 다르고, 내는 소리의 크기도 다르고, 연주하는 방법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수많은 악기가 저마다의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완벽한 하나의 하모니를 완성할 수 있는 비결은 단 하나입니다. 모든 연주자의 시선이 무대 중앙에 서 있는 ‘한 명의 지휘자’ 그의 손끝을 향해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휘자의 사인에 따라 연주될 때, 교향곡은 천상의 음악으로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직분과 기능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혹은 교사나 찬양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내는 소리는 다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지휘하시고 우리에게 그 자리를 맡기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직분의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지휘자이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불필요한 비교 의식이나 교만에서 벗어나,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축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두 번째 진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고전 12:7 →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말하는 ‘유익’은 개인의 사적인 이익이나 명예, 혹은 한 개인의 영적 우월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유익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내 소유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 맡겨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다만 청지기일 뿐이라는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문제는! 주님이 주신 은사를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과시용 도구’로 오용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방언을 하면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았고,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다른 이들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은사가 많아질수록 교회는 더 시끄러워졌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령의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재능과 영적 자산을 결코 자기만을 위해 쓰지 않습니다. 참된 은사는! 내 곁에 있는 성도들의 연약함을 채워주고, 슬퍼하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교회를 더욱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로 가꾸어가는 일에 밀알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흘러갈 때, 그 은사는 비로소 영적인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19세기 아프리카 선교의 거장이신 데이빗 리빙스턴(D. Livingstone) 선교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이 리빙스턴 선교사님에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말씀의 은사’가 있었고, 또한 한 번만 가 봐도 그 지형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지도를 그릴 수 있는 탁월한 ‘지리 감각의 은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칠고 위험한 아프리카 땅에서 사역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신실한 현지인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리빙스턴 선교사님의 ‘위대한 은사’와 + 이름 없는 현지인 동역자들의 ‘신실한 봉사’가 아름답게 어우러질 때 =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남다른 은사를 주셨습니까?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나 혼자 잘 살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있는 연약한 지체들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라고 나에게 맡겨주신 청지기적인 선물인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선물을 아낌없이 흘려보냄으로써, 다른 이들을 살리는 복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다양함 속의 일치야말로, 그리스도 몸 된 교회의 신비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진리는! 주님은 성도들의 ‘다양함’을 깨뜨리지 않으시면서도, 성령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고전 12:12 →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교회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의 몸’이라는 가장 직관적이고 완벽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다르게 생겼고, 다르게 기능한다는 것은 ‘틀린 것’이나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그 존재 자체로 꼭 필요하고, ‘상호 보완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가 단 한 가지 색깔, 단 한 가지 목소리로 가득 찬, 획일적인 집단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교회에 기획력이 뛰어난 행정가들만 가득하다면, 그 교회는 차가운 행정 조직처럼 변할 것입니다. 반대로, 뜨겁게 부르짖는 감성적인 기도의 은사자들만 가득하다면,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각자가 가진 삶의 배경, 성품, 은사의 다양성이 성령 안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다양함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 이것이 바로 교회의 위대한 신비입니다.

스페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설계자 ‘가우디’가 40년 동안 성당을 지어가면서, 또 하나의 작품을 바르셀로나에 남겼는데, 바로 ‘구엘 공원’에 만들어 놓은 여러 모자이크 작품들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도마뱀’ 모자이크입니다. 멀리서 보면! 참으로 멋있습니다. 그러나 모자이크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서 낱개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조각들의 모양은! 네모난 것, 세모난 것, 오각형, 삐뚤어지고 거친 것 등 제각각입니다. 색깔도! 파란색, 주황색, 칙칙한 회색, 진녹색 등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깨지고 금이 간 돌멩이도 있습니다.그러나 위대한 예술가의 정교한 설계에 따라, 그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조각들이 다 각각 제자리에 배치되고, 단단한 시멘트 반죽으로 서로의 경계를 맞대며 결합할 때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 최고의 예술가이신 하나님이, 주님의 교회라는 거대한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택하여 부르신 ‘소중한 한 조각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모양이 저 사람과 다르다고 해서 스스로를 쓸모없는 조각이라 낙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저 사람의 색깔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밀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를 낮추어 주님의 ‘사랑이라는 접착제’로 굳건히 연결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진 재능이나 직분이 작아 보인다고 해서 결코 과소평가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또한, 내가 조금 더 드러나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교만해지거나, 다른 지체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가장 건강하고 유익하게 세우시기 위해,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제 후로, 청지기적인 자세로 다양함 속에서도 온전한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하나님께 최고의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바울이 강조한 은사의 본질은 ‘무엇(what)을 받았는가(기능)?’가 아니라 ‘누가(who) 주셨는가(기원)?’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이 나의 직분이나 봉사를 대하는 태도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지 나눠봅시다.


2. ‘오케스트라와’와 ‘모자이크’ 예화처럼, 우리 속회나 교회 안에서 나와는 다른 기질이나 은사를 가졌지만, 공동체에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고마운 사람에 대한 칭찬과 축복의 말들을 나눠봅시다.


3.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사를 맡기신 목적은 ‘공동체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진 은사와 마음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흘려보낼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6-20
조회 212

제목: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예로부터 몸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몸을 주신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

바울이 선포한 첫 번째 진리는,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 즉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고전 6:19a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선언은 구약의 성전 신학을 완전히 뒤흔드는 영적 혁명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전은 철저하게 ‘장소적인 개념’이었고 또한, ‘분리된 공간’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 헤롯이 지은 성전처럼! 성전은 눈에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었고, 특별히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지성소’는 대제사장조차도 일 년에 단 한 번, 양의 피를 가지고만 들어갈 수 있는 두렵고 떨리는 구별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벽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제 돌이나 벽돌로 지은 건물에 갇혀 계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을 처소 삼아 친히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신학적 무게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거룩한 장소를 찾아 헤매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그곳이 곧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체는! 단순히 썩어 흙으로 돌아갈 ‘물질’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가장 영광스러운 ‘영적인 공간’인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실천적 삶’에 있어서 엄중한 ‘거룩함을 요구’합니다. ‘거룩함’이란 말의 핵심은 ‘구별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신 우리는! 우리 몸을 함부로 다루거나, 죄의 자리에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육체적 활동의 자리에 성령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의 육신을! 거룩하게 관리하고, 죄와 영적 무기력으로 인해 성전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늘 깨어 보살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하고 사신, 우리의 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 존재의 ‘소유권’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고전 6:19b∼20a →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한마디로 “우리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근대 이후 인류가 외쳐온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몸의 주인은 나!”라는 ‘개인주의적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값으로 샀다’라는 표현은! →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 누구나 잘 알고 있던 ‘노예 시장의 대가 지불(아고라조, ἀγοράζω)’이라는 법적·상업적 개념에서 온 단어입니다. 당시 노예가 자유를 얻거나 새로운 주인에게 속하게 되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몸값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죄로 인하여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죄의 삯을 지불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대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에 대해서 분명히 말합니다. 벧전 1:18∼19 → “너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 말씀은 ‘소유권의 이동’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아들의 생명’이라는 가장 고귀한 값을 지불하시고, 사탄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완전히 사 오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생명, 우리의 건강,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은 내 임의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 뜻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먼저 물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니까 내 마음대로, 밤을 새워 유흥을 즐겨도 된다.”, “내 돈이니까 내 만족을 위해 맘대로 쓰겠다.” 이런 태도는, 주인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영적인 횡령’과도 같은 것입니다. 나의 건강을 돌보는 것도, 나의 재능을 계발하는 것도,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 6:20b →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 바울은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앞의 모든 ‘신학적 배경’을 ‘실천적인 명령’으로 연결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고, 핏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남은 삶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관념적인 ‘마음’이나 ‘영혼’만을 말하지 않고, 구체적인 ‘몸(Soma)’을 강조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 사상에서 몸은 영혼의 감옥에 불과했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몸’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향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거룩한 실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예배당 안에서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는 입술의 고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발이 닿는 곳, 우리의 손이 일하는 일터, 우리의 눈이 머무는 일상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반사하여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어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의 무기로 드릴 때 비로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실천적으로 이 개념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나의 일터에서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육체의 수고, 가정에서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밥을 짓고 청소를 하는 손길, 이웃의 아픔을 보고 찾아가 위로하는 발걸음, 그리고 무엇보다 내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고 순결함을 지켜내는 모든 노력이 바로 ‘몸으로 돌리는 영광’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곧, 하나님이 받으실 가장 거룩한 예배의 처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였던 데이빗 리빙스턴(D. Livingstone)은 평생을 아프리카 대륙을 걸으며, 복음을 전하고, 노예매매 근절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바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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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 ‘스코틀랜드’의 지폐 초상>        <그가 사역했던 곳 중의 하나인 ‘보츠와나’ 우표>


그의 노년은 질병과 쇠약함으로 가득 찼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1873년,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 “나의 예수님, 나의 왕이시여!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으니, 제 몸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위해 걷게 하소서.” 그리고 얼마 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시신을 고국인 영국으로 운구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하려고 할 때, 아프리카의 현지인 제자들과 주민들이 간곡히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리빙스턴 목사님의 영국 안장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심장’만큼은 결코 보낼 수 없습니다. 그분의 심장은 평생 아프리카를 사랑하셨으니, 이 아프리카 땅에 묻혀야 합니다.” 결국 그들은 리빙스턴의 심장을 꺼내 아프리카의 커다란 바오밥 나무 아래 묻었고, 나머지 몸만을 영국으로 보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심장과 발,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육체의 자세까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우리의 육체가 움직이는 모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통로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내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존감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나눠 봅시다.

2. 하나님이 나를 사시기 위해 ‘십자가의 핏값’을 지불하셨다는 사실이, 일상의 유혹을 이겨내는 데 어떤 힘이 되는지? 서로의 경험을 나눠 봅시다.

3. 나의 구체적인 행동(말, 행동거지, 생활 습관 등)을 통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나눠 봅시다.

김성윤
20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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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시 104:14~30)

 

오늘 본문인 시편 104편은 흔히 ‘창조의 찬가’라고 불립니다. 시편 기자는 눈을 들어 광활한 하늘과 깊은 바다, 산과 골짜기,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생명체를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시 104:24 →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오늘은 ‘환경선교주일’을 맞아, 시편 104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분이 지으신 동산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사명과 책임’은 무엇인지? 세 가지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창조의 신비 - 지혜와 조화로 가득 찬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첫 번째 특징은 ‘완전한 지혜’와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대충 혹은 우연히 만드신 것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신적인 지혜로 지으셨다고 선포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하늘의 구름, 땅의 샘물, 각종 들짐승, 공중의 새들, 바다의 크고 작은 생물들은! 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창조 세계에는, 독불장군처럼 홀로 존재하는 생물이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조화를 이룹니다. 샘물이 솟아나 골짜기에 흐르면! 들짐승이 마시고, 나귀가 갈증을 해소합니다. 공중의 새들은 그 물가에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가축을 위한 풀이 자라고, 인간의 노동을 통해 채소가 자라며, 포도주와 기름과 양식이 인간의 마음을 기쁘고 윤택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설계하신 세상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얕은 지식으로는 이 거대한 연결고리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완벽한 지혜로 만물을 조화롭게 지으셨습니다.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예>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만을 위해 지구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바위산은 들 염소를 위해, 거대한 레바논 백향목은 새들의 둥지를 위해 만드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존재 목적이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는 고유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 세계가 하나님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그분의 작품이기 때문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생명의 의존성 - 모든 생물을 기르시고 호흡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진리는, 모든 피조물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104:27∼29 →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편 기자는 동물들이 사냥을 하거나, 새들이 먹이를 찾는 행위 이면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음을 영적인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펴서 공급하시면 온 세상이 풍성함을 누리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당신의 낯을 숨기시면 만물은 즉시 공포에 떨고 맙니다.

그리고 3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 104:30 →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기 ‘영’은 히브리어로 → ‘루아흐(רוּחַ)’ 즉 ‘호흡’이자 ‘생기’입니다. 하나님이 호흡을 거두시면 생명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속적인 ‘공급과 돌보심’, 즉 ‘보존하시는 은혜’ 덕분에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태학에서 말하는 ‘상호 의존성’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생명체들의 의존성’입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과, 남미 아마존 열대우림의 예>

생명의 의존성은!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왔으며, 하나님의 숨결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마시는 물, 들이쉬는 공기! 이 모두 하나님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밥상을 통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탐욕에 눈이 멀어, 이 공급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상에 독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만물이 주님을 바라보며 만족함을 얻듯, 우리 역시 교만을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의 공급하심 앞에 겸손히 엎드릴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간의 청지기 사명 - 창조 세계를 보존하고 새롭게 하는 책임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이 거대한 계획 속에서, 우리 인간에게 맡기신 독특한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30절에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노래한 직후, 33절과 34절에서 인간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시 104:33∼34 →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여기서 인간의 독특한 지위가 드러납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인간은 ‘의지’와 ‘언어’와 ‘인격’을 가지고 창조주의 위대함을 의식적으로 찬양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을 돌보는 대리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군림하고 파괴하라”는 폭군의 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왕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피조물들이 각자의 생명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섬기고, 돌보고, 지키는 ‘청지기(Steward)의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환경 위기의 주범은, 다름 아닌 인간의 탐욕입니다. 35절 상반절에서 시편 기자는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시 104:35a →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창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죄인과 악인의 멸망을 간구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질서를 깨뜨리고, 착취하며, 조화를 파괴하는 자들이 바로 죄인이요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경을 회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신앙적인 책임입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기반하여,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한 청지기적 삶의 좋은 본보기가 있습니다. 2004년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케냐의 ‘왕가리 마타이(Wangari Maathai)’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왕가리 마타이는 미국의 상원 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의 지원 덕분에 1960년 9월 미국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열심히 공부한 그녀는! 케냐는 물론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여성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녀가 고향 케냐로 돌아왔을 때, 소수의 권력자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무분별한 벌목으로 숲이 사라지고, 땅이 황폐해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후가 변해 시냇물이 마르고, 농작물이 자라지 않자,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가난한 시골의 여성들과 아이들이었습니다.

마타이 박사는 환경의 파괴가 곧 인간 삶의 파괴이며, 하나님의 창조 동산을 회복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여성들과 함께 마당에 묘목을 심는 ‘그린벨트 운동(Green Belt Movement)’을 시작했습니다. 당국은 이를 방해하고 그녀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그녀는 → “나무를 심는 것은! 내일의 희망을 심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를 보존하는 일”이라며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케냐와 아프리카 전역에 무려 5,000만 그루 이상의 나무가 심어졌습니다. 무너졌던 숲이 살아나자! 마른 시냇물에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새와 짐승이 돌아왔으며, 주민들은 풍성한 작물을 수확하여 빈곤에서 벗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청지기적 결단과 헌신이 파괴된 지구를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창한 구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작은 자리에서부터 청지기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아끼고 보존하는 작은 실천들이 모일 때, 성령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가 새롭게 되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시편 104편은 마지막 35절에서 다음과 같은 찬송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시 104:35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은, 주님의 지혜로 가득 차 있으며, 매 순간 그분의 손길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은혜의 터전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창조의 동산을 우리에게 맡기시며, 이를 잘 돌보고 보존하라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 우리의 영적 교만과 탐욕을 회개하고, 그분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신앙의 본질적 돌이킴입니다.

먼저 깨달은 우리들이 삶의 현장에서 환경선교의 사명을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소비 습관을 절제하는 작은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또 하나의 노래가 되고, 무너져가는 지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소개된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늑대 이야기나, 아마존-사하라 사막의 연결 고리처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정교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어떤 감동이나 영적 깨달음이 있었는지 나눠봅시다.

 

2. 환경 문제는 본질적으로 과학이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 즉, 신앙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환경 보호를 ‘신앙생활의 일부’로 바라보는 관점이 나에겐 얼마나 익숙하거나 낯설게 다가오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아끼고 보존하기 위해 이번 한 주간 나의 일상(예: 일회용품 줄이기, 에너지 절약, 소비 습관 절제 등)에서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작은 불편’ 한 가지씩을 정하고 서로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