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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이재영
2025-09-20
조회 169

제목: 참된 복을 구하는 지혜! (대하 1:8∼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칭송받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어린 나이에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왕이 된 솔로몬은, 그의 통치 초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바른 지혜, 듣는 마음을 구했기에 위대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바른 것을 구할 줄 아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제사가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대하 1:7 → “그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솔로몬은 그때 무엇을 구했을까요? 우선,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셨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을 잘 다스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이렇게 간구합니다. 대하 1:10 →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솔로몬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정하게 재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지식이 필요함을 직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간구는! 철저히 사명 중심적이었습니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순수한 마음과 간구를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도! 솔로몬처럼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혜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약 1:5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아멘.

 

2) 개인적인 유익보다, 공동체와 사명을 위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11절은 솔로몬이 무엇을 구하지 않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하 1:11 →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유익보다 공동체와 사명을 위한 지혜를 구하는 것이 우선순위였습니다.

만약 솔로몬이!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할 힘이나, 전쟁에서 승리할 군사력, 혹은 개인적인 장수나 부를 구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는! 여느 세상 왕들과 다를 바 없는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사명을 위한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기뻐하신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함과 기도의 제목들이 개인적인 욕심과 세상적인 성공만을 위한 것이 되어선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그리고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지혜와 능력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나를 위한 방향이 아니라,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쪽을 향할 때, 빛을 발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솔로몬의 간절하고 순수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놀라웠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대하 1:12 →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지식’은 물론,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도 함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해, 이런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 6:33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의 약속이 솔로몬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 하나님의 크고 원대한 계획안에서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세워갈 때, 우리는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크게 사용하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받은 지혜를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왕상 3:16∼28)

솔로몬은 ‘백성을 바르게 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는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사적인 욕심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백성을 올바르게 이끄는 데 사용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로 공의를 세웠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간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세상에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신이 친엄마라고 주장하며, 솔로몬에게 재판을 요청한 것입니다. 두 여인은 한집에 살던 창녀들이었는데, 한 여인이 잠을 자다가 실수로 자기 아들을 깔아 죽인 후, 밤중에 다른 여인의 살아있는 아들과 바꿔치길 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두 엄마가 창녀라고 했으니,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아이들이 모두 아버지를 닮아서 얼굴만 가지고는 진짜 엄마를 가려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증인도 없고, 오늘날과 같이 유전자 검사도 없던 시절이니, 진실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여자들은 창녀였으니, 왕이 상대하기조차 거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마음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그 결과, 솔로몬은 지혜로운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이르되 “그대 둘 다,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는구나!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자! 이 칼로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그러자 산 아이의 진짜 엄마 되는 사람은 그 아이를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이시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애원합니다.

그런데 다른 여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기왕에 이렇게 된 바에는, 내 것도 되게 말고 저 사람 것도 되지 말게, 나누는 것이 공평하겠습니다.” 솔로몬은 두 여인의 반응을 통해 누가 진짜 엄마인지를 한눈에 알아차렸습니다. 진정으로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는! 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의 소유권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희생적인 사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재판은! 단순히 솔로몬의 영특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에서 나온 깊은 통찰력과 분별력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인 사랑과 욕심을 꿰뚫어 볼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감쪽같이 위장된 거짓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문은! 온 이스라엘에 퍼졌고, 백성들은 솔로몬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왕상 3:28 →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이런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① 참된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고 경험을 축적한다 해도, 그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겸손히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② 지혜는 공동체와 공의를 위해 사용될 때,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끊임없는 갈등과 불의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가 솔로몬처럼 공동체를 사랑하고, 공의를 추구하며,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혜를 구할 때, 그 지혜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게 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사랑과 희생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별하게 합니다. 두 여인의 재판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결국 참된 어머니의 사랑, 즉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지혜는 단순히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헤아리고, 참된 가치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그 결정이 사랑과 희생을 동반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기심과 욕망을 따르는 것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늘 사랑과 헌신을 지향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내 기도의 중심은 개인적 유익(안전, 성공, 인정)인가요? 아니면 공동체와 사명을 위한 분별인가요? 최근 나의 기도 제목을 떠올려보고, 그것을 공동체 중심의 언어로 다시 써 보고 서로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정답 제시를 넘어 성품(공정함, 긍휼, 절제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번 주 그 성품을 드러낼 ‘작은 실천 항목’을 정해서 나누고, 다음 모임에서 서로 점검해봅시다.

 

3.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더해 주신 선물(예상치 못한 도움, 관계의 회복, 길 열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있었다면 그때, 내가 먼저 내려놓아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함께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5-09-13
조회 218

제목: 선한 일엔 낙심이 없습니다. (살후 3:13, 갈 6:9)


오늘은 살후 3:13 →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계명’ 즉 ‘선행’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②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①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선행’ 즉 ‘예배’가 최우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 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입니다.

둘째, ②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선행’을 말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 외로운 가정을 돌보는 일, 우리나라를 찾아온 탈북민, 이주노동자나 그 자녀들을 돕는 일, 환자들을 찾아 위문하고 기도해 주는 일, 낙심한 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돌보는 일 등, 수많은 ‘사회적인 선’이 있습니다.

→ 이런 ‘하나님을 향한 선’과 ‘이웃을 향한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을 향한 일이든, 세상과 이웃을 향한 일이든! 하다 보면! 힘들고, 어렵고, 짜증 나고, 때로는 하기 싫고, 이 정도면 충분히 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거기다가, 알아주거나 칭찬은 고사하고!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되면, 낙심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낙심 한다’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을 하다가 ‘할 마음을 내려놓는 것’, 무슨 일을 하다가 자신의 힘으로서는 그 일을 해나갈 수 없다고 단정 짓고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도! 그냥 개인적으로 신심이 깊고 높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손길과 섬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배를 위해 수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수고와 섬김이 있었고, 또한 있기에, 우리가 편안하고 은혜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봉사는 사람 자신에게, 자칫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나만 바보인가 봐! 도대체 왜 나만 이런 일을 하지? 나만 희생하고 피해 보는 것 아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아닙니다. 바보나 어리석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물론 성도들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상급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랑과 섬김의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다가도, 불현듯 속상한 생각이 들고,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고, 심지어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저런 사람을 위해 내가 수고해야 하나? 나도 재미있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이렇게 애써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자연히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되는 이유로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① 게으르고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들 함께 일하는데 거기에 동참치는 않고 말거리만 만들거나, 어쩌다 동참하면 참견만 하려 드는 사람을 일러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선을 행하는데 큰 방해꾼입니다.

② 악한 마음을 가지고 비방하는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게 됩니다. 자기가 리더가 아니라고, 앞장서서 일하는 리더를 향해서 끊임없이 비방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죽하면 2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살후 3:2 →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말려들어 가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항상! 성도들을 낙심케 하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않으려면!


1. 이미 행한 선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미 행한 선을 헛되게 하는 시험에 말려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의 말씀입니다. 계 2:25 →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 말씀은! 앞으로 더 선한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이미 행한 선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다가 옛 친구를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비교적 우리 교회에 새 가족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교회에서는 새 가족이 등록하고, 새 식구가 늘어나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새 가족을 위해서 많이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가족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같이 신앙생활 해 오면서 꿈마을엘림교회에 적을 둔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있는 성도들이 든든하고 너그러운 품을 가지고 있어야, 새 가족도 잘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존 성도들이! 나는 이제 별로 중요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질 못해! 새로운 사람, 젊은 사람들에게만 모든 관심이 다 가 있어! 이런 생각이 든다면! 교회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존 성도들이 이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이런 일에 담임목사를 비롯해 장로님들! 주요 임직자들은 신경 써 주시길 바랍니다.


2. 악한 의도는 없어도, 부정적인 말로 의기소침하게 하는 자들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야, 너 참 바보 같다. 너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니?”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마귀의 입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엇이라 비판하거나 평가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왕에게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도 상관없이! 다윗은 아버지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반역에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우리는 악한 자들의 악한 행동에 말려들지 아니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우리가 섬기는 일에 대한 보상과 칭찬이 반드시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은! 영적인 삶, 거룩하고 선한 일을 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힘든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씨앗은! 땅속에서 움이 트고 뿌리 내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성장이 ‘보이지 않게’ 일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이 시간이 길수록 뿌리는 깊어집니다. 그래서 메마른 건기에도, 추위에도 버텨냅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의 선행도 ‘보이지 않는 때’를 통과합니다.

오늘의 본문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갈 6:9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성도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우리의 삶에도 반드시 장애물이 있습니다. 방해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장애물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복을 누리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도밍고 가르시아’가 수도원 입학을 거절당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수없이 많은 수도사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평범한 수도사로 살다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입학 거부’라는 장애물을 만났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삶을 선택했고, 그래서 마침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그것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나를 연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한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에 수고한 만큼 열매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1791년 2월 14일 숨을 거두기 6일 전에, 영국의 ‘노예제도’에 대항했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 법안’을 계속 발의했지만, 노예로 인해 이익을 보고 있던 반대 세력들의 끊임없는 방해로 법안은 번번이 부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격려하기 위해 웨슬리가 편지를 쓴 것입니다. →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과 사단의 공격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면! 과연 누가 그대와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오늘 본문 9절 말씀을 덧붙여 편지를 보냈습니다. 갈 6:9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편지는 ‘월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에게 큰 용기와 힘을 주었고, 포기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1807년 영국 의회는 마침내 ‘노예매매제도’를 폐지키로 결정했습니다.

이후 또 26년 뒤인 1833년에는 대영제국 내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이는 인권신장의 전환점을 이루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윌버포스는 병상에서 마침내 ‘노예 해방법’까지 통과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소천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기독 정치인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흑인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고,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발걸음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선한 일에 끝까지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여러분은 언제 선을 멈추고 싶으셨습니까? 그리고 지금 똑같은 상황을 만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나눠 봅시다.


2. 선을 행할수록 낙심의 이유가 많습니다. 오해와 냉소, 즉각적 열매 없음, 악의 번성처럼 보이는 현실, 공동체 내 불평등한 수고 분배 등. 이때 나의 반응은 어떤 쪽인지 나눠봅시다. (①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때다. ② 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지 않나? 해서 낙심과 좌절)


3. ‘도밍고 가르시아’나 ‘윌리엄 윌버포스’를 통해 깨닫고 결심케 된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5-09-06
조회 159

제목: 표어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살전 4:1∼3a, 고전 14:40)

 

성도 여러분! 작년 2024년도 우리교회의 표어를 기억하십니까? 네! “품위 있고 질서 있게!”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들이 믿음 안에서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사람이 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성경 구절은 고전 14:40 말씀이었습니다. →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살전 4:1b, 3a →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본질적으로는 같은 권면의 말씀입니다.

 

1. 품위 있게 살라!

품위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정의는! “사람이 그 지위와 위치에 따라 갖추어야 할 성품이나 교양”을 품위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유스케모노스(eujschmovnw")로서 → “어울리게, 적당하게, 교양 있게, 단정하게, 예의 바르게, 점잖게, 정직하게”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지위와 위치에 따라서 어떤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충족되었을 때, 그를 존중하게 되고 신뢰하게 되고,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대한 품위가 없을 때 혹은 잃게 될 때, 신뢰가 무너지고 존중감이 사라져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품위’하면 얼른 떠오르는 생각은! ‘옷을 잘 입고, 젠틀하게 행동하는 것’을 품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에서 ‘품위가 있다’는 말은! → ‘그에게서 그리스도인 다운 구별됨 즉 거룩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위는!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곧, ‘품위 있는 삶’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사회에서 ‘품위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추락하는 모습도 함께 지켜보게 됩니다. 책임 있는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품위를 잃어버리고 행동할 때, 비난받을 수밖에 없고, 주어진 자리나 신분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한 사람의 ‘품위 없음’으로 인해서, 그가 속한 조직과 공동체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품위가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존중감과 신뢰가 가고, 호감이 갑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적대감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교’로 취급받는 것은! 기독교 자체와 성경의 권위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아, 성도다운 ‘품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품위는 어떻게 드러나게 됩니까? → 그것은! 우리가 좀 더 온전한 성도가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서 ▸확실한 신앙적 가치관을 세우고 ▸그렇게 살아갈 때, 저절로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딤후 3:14∼17 →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①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②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③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준을 따라 사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통하여 “품위 있는 꿈마을엘림교회 성도”라는 칭찬을!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질서 있게 살라!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가 삼위일체! ⇨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位格)이시면서, 동시에 완벽한 하나를 이루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사역도! → 혼돈과 무질서의 카오스(Chaos)를, 질서정연하고 보시기에 좋은 코스모스(Cosmos) 우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루는 곳입니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입니다. 마귀(魔鬼) 악마(惡魔)를 → 영어로는 데블(Devil)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히브리어는 사탄(שָׂטָן), 헬라어로는 디아보로스(διάβολος)라고 해서 마귀(魔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과 마귀는 동의어입니다. 사탄은 히브리어이고, 마귀는 헬라어인 것입니다.

즉, ‘마귀’란 단어인! → (헬)디아보로스(diabolos)는 ⇨ ‘dia’(사이에, between) + ‘bolos’(던지다, throw)로, 이 말의 뜻은 “둘 사이를 파고 들어가서 갈라놓다” = “둘 사이에 끼어들어 깽판을 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탄 ‧ 마귀’라는 이름의 뜻은! → ‘이간질하는 자, 분열시키는 자, 다툼을 만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사탄의 현장인 것입니다.

네! ‘사탄 ‧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려 혼란을 만들려고 합니다. → ① 하나님과 ↔ 사람의 아름다운 ‘믿음의 관계’를 깨뜨리고, ② 사람과 ↔ 사람의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고, ③ 사람과 ↔ 자연의 ‘상호의존과 돌봄의 관계’를 깨뜨리려고! 이간질하고, 미혹하고, 욕심을 부리게 하는 존재가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탄의 궤계는 결국 파멸되고, 사탄은 무질서와 고통의 대표인 지옥 무저갱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실, 오늘 원 포인트 주제는 사람과 ↔ 사람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는 ‘음란과 색욕’에 따른 ‘부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연관된 주제입니다. 간음을 금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을 파멸시키는 음행을 금지하는 계명입니다. 즉,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배우자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단 마귀는 부부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도록 미혹하여, 그 질서를 깨뜨리고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살전 4:3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여기 “거룩”이란 단어는 → 히브리어로 카도쉬(v/dq)라고 하는데, ‘구별’ 혹은 ‘분리’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거룩한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성 문제는 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남녀 간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간음은 배우자를 배반하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간음은 단지 육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정서 그리고 마음과 결단이 들어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격 전체가 동반된 것이 성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엄중하게 다루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 마귀는! 이런 점을 악용하여 관계를 깨뜨리고, 인격을 무너지게 하고, 신뢰와 믿음,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궤계를 부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내용을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 모두 다 ‘무질서를 질서로 회복시키시는 일’이었습니다. ▸병든 자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귀신 들려 어지러운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평안을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어 배부름의 평안을 주셨습니다. ▸죄에 눌려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며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온전함으로의 회복’을 이루는 역사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탄을 이기는 힘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사랑과 질서를 따라 살 때,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인생의 처음 25년 동안 나는 ‘자유’를 갈구했다. 하지만, 그다음 25년 동안 나는 ‘질서’를 추구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질서가 곧 자유’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후 25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오히려 바보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집단의 물리적인 힘으로 원하는 것을 따내고 쟁취하는 것이 지혜로워 보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질서 속에 안정과 번영을 향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레일을 이탈한 열차는 자유로워 보여도 실은 자유가 없습니다.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는 속박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익숙한 것을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 사탄이 이끄는 세상에 익숙한 삶은 ⇨ ‘타락한 삶’입니다. 자기 맘대로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 하나님께서 이끄는 세상에 익숙한 삶은 ⇨ ‘경건한 삶’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따른 삶을 살기 위해서, 경건 훈련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사탄이 이끄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끄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바탕 위에서!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삶’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오늘 말씀, 살전 4:3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에 비취어, 내 삶에서 잘 지켜지지 못하는 ‘거룩’ 즉 ‘구별됨’과 ‘분리’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한 사람의 ‘품위 없음’으로 인해서, 그가 속한 조직과 공동체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입는 예와 스스로의 다짐을 나눠보시다.

 

3.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는 문제로 ‘간음’ 문제 말고 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5-08-30
조회 132

제목: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인생 목적! (왕상 11:1~5, 잠 4:23)


1. 솔로몬에게 주어진 세 가지 인생 목적

하나님은 솔로몬의 인생을 향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 인생 목적은 3가지였습니다. 솔로몬을 향한 세 가지 ‘인생 목적’ → ① 너는 내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자가 되라. ② 너는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는 사람이 되라. ③ 너는 내가 거할 성전을 건축하거라. 이것입니다.


2. 솔로몬의 인생 목적이 망가진 이유

솔로몬의 인생 후반전에는 자기 마음을 지키는 데 실패하여 하나님의 계획, 인생 목적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실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은 정말 힘든 싸움입니다. 그래서 후일 솔로몬은 잠언에 두 번이나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잠 16:32 →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4:23 →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저와 여러분은 마지막까지 처음 마음, 처음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 왕이 실패한 직접적이고 표면적인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 신들을 섬긴’ 까닭입니다. 그렇게 된 출발은 솔로몬이 ‘정략결혼’을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즉, 애굽 왕 바로와 혼인 관계를 맺고,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왕상 3:1 →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성에 데려다가 두고…”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강대국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정략결혼’을 한 이유는! 내부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나라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의 나라’를 세워가기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구사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보다, 세상의 원리와 방법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는,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의 딸 외에도 수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상 11:3 → “(솔로몬)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아내가 1천 명! 숫자도 문제지만! 이 아내들은 대부분 이방 나라에서 데려온 여인들이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알찍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 신 7:3∼4 →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들이 영혼을 타락시키고 망가트릴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인생 목적’이 망가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이방 신을 섬기게 된 이유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불순종’으로부터 솔로몬의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솔로몬이 이 정책을 통해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지혜로운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대한 댓가가 너무 컸습니다. 공주들이 시집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대동해서 왔고, 결과적으로 이방 신들도 함께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왕궁 안에서부터 이방 신들을 섬기는 일이 일어났고, 그것을 위해 왕궁 주변에 이방 산당을 지어 주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상 11:3b∼4 →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네! 솔로몬은 이방 아내들이 시돈의 아스다롯과, 암몬의 밀곰과 몰렉, 모압의 그모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방 아내들이 섬기는 신들을 위하여 왕궁 주변에 각종 산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왕상 11:7∼8 →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이런 사태가 일어나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상 11:11 →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네! 솔로몬의 마음이 이방 아내들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자리 잡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준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솔로몬의 인생 목적이 망가지므로 생긴 결과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자 첫 번째 나타난 현상은! ① 그의 마음 가운데 샬롬이 사라졌습니다. 이걸 어디서 볼 수 있냐 하면, 솔로몬의 말년에 쓴 전도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전 1:1∼2 →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솔로몬)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구구절절 솔로몬의 마음이 어두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샬롬을 누려야 할 사람이,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자 샬롬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이 흐려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만족과 기쁨이 있고, 샬롬이 있도록 지음 받았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삶의 참된 평화와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잃어버린 솔로몬은! 이후 별의별 짓을 다 해 가면서, 자기 마음의 헛헛한 것을 채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좋다는 것은 다 가지고, 다 해봤어요. 그런데 채워지질 않았습니다. 그 허무함이 더 깊어만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행복하십니까? 평화하십니까? 의미로 가득 차 있습니까? 혹시, 솔로몬처럼 허무하진 않으세요? 주님 안에 있을 때만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있어 언제나 만족하고 행복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는 것도 어그러졌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인생 목적은 ‘샬롬을 주는 자’ ‘평화를 주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자 그는 더 이상 샬롬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 한 마음이 되었던 백성들의 마음이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왕상 11장을 보면, 신하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왕상 11:26 →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그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루아이니 과부더라.” 그 이후로 반역 사건들이 계속해서 나오는데, 그야말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이스라엘에 전쟁도 없고, 분쟁도 없고, 평화가 펼쳐졌는데! 하나님을 떠나자 결국 이스라엘이 두 토막 납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샬롬을 위해서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는데, 처음엔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이 보였지만, 나중엔 내부에서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 샬롬을 얻으려고 했을 때 생기는 일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꾀를 쓰고, 머리를 굴려도, 세상적으로 얻는 샬롬은! 참 샬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샬롬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 샬롬 그 자체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무슨 짓을 해도 샬롬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미련하게 저지르는 실수는 샬롬을 얻기 위해 샬롬의 근원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려놓고, 우리 눈에 샬롬스러워 보이는 것들을 취합니다. 돈, 직장, 명예, 힘 등 샬롬스러워 보이는 것들을 취합니다. 왜요? 샬롬을 누리려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샬롬스러워 보이는 것을 취하느라고, 샬롬이신 하나님을 버리는 거에요. 이것이 솔로몬이 했던 어리석은 짓입니다.

③ 성전 건축의 사명도 어긋났습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을 떠나자! 공동체는 분열되기 시작했고, 여로보암이 나라를 찢어서 북쪽을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사람들이 3대 절기에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질 못하게 막았습니다. 대신, 여로보암은! 사마리아에 산당을 만들고, 우상을 세우고,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섬기게 했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지은 건데, 이게 파괴돼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 전체가 예배할 수 없게 되고 만 것입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가! 다른 곳에서 다른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솔로몬의 성전이 무너지기까지는! 즉, 북 왕국의 분리까지는 그래도 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조짐이 시작됐을 때, 솔로몬은 거기서 돌이키질 못했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데스티니를 인생 전반전에는 그런대로 이루었지만, 후반전에 가서는 다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 아니라, 부끄러운 이름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잘 알고, 우리의 마음을 굳게 지켜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고, 행복한 인생, 지혜로운 인생, 참으로 성공한 인생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과 질문


1. 본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인생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계십니까? 그렇든 아니든 이 문제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세상의 방법이 더 확실하고 분명해 보였는데, 결국 그 길을 선택하므로 영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실패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내면의 샬롬을 잃어버리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 이때 얼른 돌이켜야 합니다. 본인들의 경험을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5-08-23
조회 182

제목: 온 천하의 왕 여호와! (슥 14:9∼11, 16~21)

 

1.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가 핍박당할 때도 그 성도를 반드시 구원해 내시는 왕이십니다.

슥 14:1∼2 →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본문의 앞부분은, 예루살렘이 적군의 공격으로 파괴당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말세에 벌어질 가장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즉, 온 세상 나라와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올 것입니다.

바로 그런 박해와 핍박이 일어나게 될 때, 그로 인하여 ‘약탈되며, 욕을 보며, 잡혀가는’ 백성이 ‘절반’이나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마지막 대 환난의 때가 이르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핍박으로 인해서, 실족하고 신앙생활에서 도중하차 하고, 배교하는 자들이 많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나 여러분이나 꼭 ‘남은 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지는 3절 말씀입니다. 슥 14:3 → “그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여기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란 말씀은, 옛날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애굽과 싸우셨던 것처럼! 유다를 멸망시켰던 바벨론을 치신 것처럼! 교회가 대 환난을 맞이하게 될 ‘그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쳐서’ 싸워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성도를 지키고 구원해 주시는 방법은 참으로 오묘하고도 완벽했습니다. ① 로마제국이 교회를 향해서 그토록 참혹한 박해를 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로마제국 자체가 아예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도록 만드셨습니다. ② 또한, 하나님께서는 일제가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옥중에 갇혀 있던 교회의 지도자들을 몰살시키려고 작정해 놓은 며칠 전에 극적으로 8·15해방을 주셨습니다. ③ 또한, 최악의 무신론 제국인 공산주의가 조국 대한민국을 완전히 잡아먹기 일보 직전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기사회생의 구원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기적과 같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가 ‘교묘한 제도’와 ‘언론의 호도’와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회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당신께 속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기적적인 구원의 길을 베풀어 주시는! 실로 믿음직한 주권자이심을 확신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성도에게 복을 내리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왕이십니다.

슥 14:6∼7 → “그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앞의 “그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빛이나 영광이 사라지게 되는 날’을 말합니다. 그런 빛들이 필요 없게 되는 이유는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즉 시간과 관계없이 비취는 ‘새 빛’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모든 어두움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완전하고 영원한 빛입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연상시키는 내용입니다. 계 21:23 →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아멘.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언제나 이 밝은 ‘하나님의 빛’이 비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온 천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은 한없이 크고 풍성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슥 14:8 →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얼핏 생각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작은 샘물 하나가 동쪽의 ‘사해’와 서쪽의 ‘지중해’에 물을 흘려보낸다고 해도, 그 양이 얼마나 되겠나?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의 생수가 솟아나게 하실 때는, 능히 그 큰 바다를 넉넉히 채울 만큼 풍성한 양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생수는 끊임이 없을 것입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즉 사시사철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온갖 축복은!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고, 한없이 풍부한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어지는 9절부터 11절의 말씀입니다. 슥 14:9∼11 →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림몬까지 이를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하의 왕”이시며 또한,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외에는 영광과 존귀를 받을 다른 그 어떤 주권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함께 높아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또한, “온 땅이 아라바같이 되리라”는 말은 ‘온 땅이 아라바 지역같이 낮아진다.’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북쪽 지역인 ‘게바’와, 남쪽 지역인 ‘림몬’에 이르기까지 ‘온 땅이’ 낮아지게 되면, 예루살렘은 자동적으로 ‘가장 높은 곳’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인 교회를 귀히 여기십니다. 비록 지금은 ‘주변 사방’이 ‘예루살렘’보다 더 높아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교만한 것들을 완전히 낮추시는 그날이 오면, 교회가 이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상의 그 기관이나 다른 어떤 단체보다, 어떤 나라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최고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흐르는 ‘근원지’인 동시에, 여호와께서 당신의 밝고 영광스러운 빛을 온 세상을 향하여 발하고 계시는 ‘가장 높은 곳’이며, 하나님의 ‘평안이 넘치는 곳’임을 깨닫고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를 중심으로 사는 성도를 끝내 완전한 성화에 이르게 하시는 왕이십니다.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슥 14:16 →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참으로 놀랍게도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나라들 중’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던 자들 가운데도 오히려 회개하고 돌아와 예배드리며, 구원받을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혹 여러분의 배우자나 부모가 지금 핍박자입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붙잡고 그도 구원받도록 ‘중보’하기를 쉬지 마시길 바랍니다.

반면에 17∼18절 말씀입니다. 슥 14:17∼18 →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비’는 사람이 곡식을 수확하여 먹고 사는 데 필수적인데,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백성에게 이 ‘비’를 내리지 않는 벌을 내리신다는 말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삶으로 가난하고 궁핍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자’ 즉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 생활을 하는 성도’는 이런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성화’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슥 14:20∼21 → “그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 ‘여호와께 성결’이란? ‘여호와께 거룩히 바쳐진 것’이란 뜻입니다. 사실 말(馬)의 목에 다는 방울 즉 ‘말방울’이 거룩한 것이 될 수 없고, 매일 밥을 지어 먹는 ‘솥’이 거룩한 성물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결’케 하는 그날에는, 이 모든 것들에까지 다 ‘성결이라 기록되며 성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성전의 거룩함’이 이제는 ‘일상의 삶 전체’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상의 아주 작은 것! 매일 매일 반복 되는 삶 자체가 거룩한 삶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만의 거룩함이 이제는 우리 일상의 거룩함으로 확장되고, 그 순도(純度)가 떨어짐이 없이 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성결함에 대한 거룩한 열망을 품고 날마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거룩함이 묻어나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마지막에 누리게 될 ‘성화’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비록 ‘죄의 땟국물’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남아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완벽하게 거룩한 존재로 바뀌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구원의 마지막 단계인 ‘완전한 성화’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직 교회만이! 지상에서 당신께 예배를 드리며 당신의 자녀로서 완전히 성화 되어 갈 수 있는 거룩한 곳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나라와 여러분 개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던 자들 가운데도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을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 따라, 내가 전도하고 중보해야 할 사람에 대해서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3. 교회 안에서만의 거룩함이 우리 일상의 거룩함으로 확장되고, 그 순도가 떨어짐이 없이 그대로 이어져서 ‘성화’를 이루어갈 소명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5-08-16
조회 167

제목: 은혜를 베풀기를 작정하였나니! (슥 8:13∼17)


오늘 본문은 스가랴의 예언 가운데 한 부분인데! 스가랴는 귀환 시대의 예언자입니다. 이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이 주제입니다. 스가랴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백성을 위로하고 성전재건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성전을 무너진 채로 방치해 두는 것은, 결국 영적 혼돈을 가져올 뿐이고 자칫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수치를 당한 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했기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슥 8:1∼2 →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다른 우상 사신에 눈을 돌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 크게 질투하며 분노하기까지 하십니다. 그 결과! 유다는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질투와 분노’는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슥 8:13∼15 →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에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 회복의 내용들이 3∼8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함께 거하십니다. 슥 8:3a →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둘째,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됩니다. 슥 8:3b →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셋째, 장수합니다. 슥 8:4 →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넷째, 소년 소녀들이 가득하여 뛰놀게 됩니다. 슥 8:5 →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이어지는 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런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다섯째, 사방에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모여들어 함께 살게 됩니다. 슥 8:7∼8a →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여섯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슥 8:8b →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첫째가!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 거하고, 마지막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인생, 그런 가정, 그런 나라가 되어야 바로 서게 됨을 믿으시리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특별히 인상 깊은 말씀이 둘째 셋째 넷째 축복의 말씀입니다.


둘째 축복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게 된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슥 8:3 →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여기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진리의 성읍’ 이 얼마나 명예스러운 이름입니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좋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부천’에 대해서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그 무엇보다도 “진리의 성읍!” 이런 이름을 갖는 도시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이름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와 성도가 앞장서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교회들이 많아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 교회에는 진리가 있다.” “저 교회에서는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의 기본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옳은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것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옳기는 한데 따르지 않고, 그대로 살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아야! 그 말씀이 진리가 되고, 교회는 진리를 선포하는 곳이 되며, 그런 교회가 많은 도시가 진리의 성읍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회복된 예루살렘의 모습이 우리들이 사는 부천에서도 그대로 이뤄지도록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앞장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징계하고 심판하려고 마음먹으셨다가도 그 뜻을 돌이켜 은혜 베풀기로 작정하는 도시가 되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셋째 축복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장수한다는 것입니다. 슥 8:4 →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성도 여러분! 전쟁이 끊이질 않고, 침략당하는 일이 많으면! 사람들이 그야말로 채 늙지도 못하고 전쟁과 침략의 참화 속에 다 죽고 맙니다. 그러니, 나이 많은 늙은 사람들이 있을 겨를조차 없는 것입니다. 평안한 나라, 그런 공동체에 어르신들이 많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세 높은 분들이 많은 것은! 교회의 축복입니다. 이분들은 교회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입니다. 또한, 이분들은 풍부한 경험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이분들은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기도가! 교회의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서, 악한 영이 쉽게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영적으로 안정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 19:32 →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어르신을 잘 모시는 우리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 축복이 무엇입니까? 성읍 거리에 소년 소녀들이 가득하여 뛰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슥 8:5 →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어린이들과 소년 소녀들이 밝은 모습으로 뛰노는 것은 축복 가운데 축복입니다. 교회학교가 잘되는 교회는 활기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어 든든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과거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기독교인들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여러 분야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존경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해방되었을 때 해방된 조국의 기초를 놓는데 이분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당시에 비해 크게 늘어났지만,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존경받는 진실한 기독교인은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끄러운 사건이 터지면 거기에 기독교인이 개입되어 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교회 교육의 내용이 부실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인생의 바른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살도록 지도해야 하는데! 그저 교회 부흥이나 유지의 한 수단으로 교회학교를 운영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배들은 교회학교를 통해 해방시대의 지도자들을 길러냈는데, 우리는 통일시대를 바라보면서 교회학교를 통해 통일시대의 좋은 일꾼들을 양성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점에서 걱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회학교의 현격한 감소’입니다. 농어촌 교회뿐만 아니라 도시 교회들도, 아이들의 감소로 교회학교를 운영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아이들 문제만이 아니라, 교사들을 수급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초래하게 된 사회적인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의 급격한 출산율 감소’입니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우리 믿음의 가정들이 ‘신앙의 대 잇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신 차리고, 다음 세대인 우리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가족의 신앙역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어떻게 역사하였는지도 가르쳐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까? 교회가 살아야 미래가 삽니다. 교육이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를 회복하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부탁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16∼17절입니다. 슥 8:16∼17 →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보나 국가적으로나 이 말씀에 ‘참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부터 진실해집시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중보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베풀기로 작정하시는 개인과 우리나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크게 질투하며 분노하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과 함께 나눠봅시다.


2.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가 이 이름을 얻기 위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나눠봅시다.


3. 사회적으로 자랑스러운 기독교인도 많지만, 부끄러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되었는지? 각자의 진단을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5-08-09
조회 190

제목: 시상식에서! (계 22:12∼13, 20∼21)


1.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

성경을 영어로는 ‘Bible’이라고 합니다. → 이것은 구약과 + 신약 즉, Old Testament와 New Testament를 합쳐서 부르는 것입니다. 즉, 구약(舊約)성경은 → ‘구세주’로 오실 ‘초림(初臨)예수님’에 대한 옛 약속(Old Testament)이고, 신약(新約)성경은 →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再臨)예수님’에 대한 새 약속’(New Testament)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약속은 일방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수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논하거나 조정하거나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 고향을 떠나겠느냐? 동쪽으로 가겠느냐? 아니면 서쪽으로 가겠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떠나라. 가라. 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따르면, 약속으로 주신 모든 말씀과 복이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약속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런 약속을 ‘수평적 약속’이 아닌 ‘수직적 약속’ → 곧 ‘디아데케’ (diaqhvkh)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이것이 영어로는 ‘Testament’라는 단어입니다.

이 Testament라는 단어는! 영어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지닌 또 다른 단어 Promise와 비교되는데! 이 ‘Promise’는 → ‘상대방과 내가 서로 의논하고 동의해서 하는 약속’입니다. 반면에 ‘Testament’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유효케 되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약속의 성격’은 → 일방적인 약속, 선언적 약속 Testament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유산을 상속받는 특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믿음의 약속이며 보상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약속’의 말씀, 언약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에는 언제나 명령이 함께 주어지고, 이에 따른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 약속과 함께 주어진 명령에 따르는 순종은! 간단하거나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길고 수고롭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면이 있고,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변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능력 부족으로 지키고 실행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반드시 실행됩니다.

세상에서도 약속이 보장되는 상품, 신용이 있는 상품이라야 잘 팔립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변치 않는 약속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약속은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현재’와 ↔ ‘약속이 성취되는 그 시간’과의 사이에 ⇨ ‘믿음’과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세상 사람들! 즉,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해도, 보이는 것이 없고 증거가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뜬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세계를 바라보고 소망으로 살다가,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겠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세 번이나 연속으로 “내가 속히 오리라.”(ναι ἔρχομαι ταχύ, I am coming soon)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① 계 22:7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② 계 22: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③ 계 22:20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확실성’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와 감격’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심령에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이 말이 기쁨으로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상 받는 성도

재림하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 22: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리고, 성도가 받을 여러 가지 상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0:41∼42 →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꼭 선지자가 되고, 의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알아주고 영접하면 똑같은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살전 2:19∼20 →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여기 ‘자랑의 면류관’은! 전도자가 누릴 영광과 기쁨, 존귀함을 의미합니다.

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기 ‘의의 면류관’은 핍박과 환란 중에서도 인내와 순종으로 믿음을 지켜낸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계 2:10b∼11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여기 ‘생명의 면류관’은 믿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부활과 영생의 복! 즉, 천국에 들어가는 상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오늘날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숙제를 잘해 가면 선생님께서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려 주셨습니다. 그 후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마치는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 숙제 검사’를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으십니까? 저는 이런 도장을 꼭 받고 싶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 그런 기대를 가지고 믿음생활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생의 졸업식 = 시상식에서 상 받는 날

우리나라 대학교의 졸업식은 추운 겨울에 하기 때문에 좀 다른 풍경이지만, 미국의 대학교 졸업식엘 가보면! 5월 말 6월 초에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네! 상 받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또한, 상 받는 사람을 축하해줄 가족들이 들어갑니다.

그럼 누가 상을 받을까요? 공부 잘한 사람들, 어떤 공적을 이뤄 학교의 이름을 빛낸 사람들이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학교 졸업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졸업식’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졸업식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 시상식이 있을 것인데! 수상자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이 받드시 있어, 상급과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좋은 상을 받으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고전 9:24∼25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에게는 썩지 않는 승리의 면류관을 주실텐데, 그 상을 받기 위해서 모든 일에 절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빌 3:14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땅의 썩어질 상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상 받기를 목적하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목사인 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벧전 5:3∼4 →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양무리를 잘 인도한 사람에게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는데, 저도 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본이 되는 신앙생활 잘하겠습니다. 끝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성도님들도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하게도 이 예배가 인생의 마지막 예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새롭게 출발하시길 바랍니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인생의 졸업식 날이 올 것인데, 즐거움으로 그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귀한 상을 받고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멋진 수상소감을 말하며,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약속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유효케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와 감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은 어느 쪽인지 나눠봅시다.


3. 인생의 졸업식 날! 나는 상 받는 자로서 즐거움으로 그 시상식에 참석할 것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날이 될 것인지? 생각하면서 가진 새 결심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5-08-02
조회 217

제목: 천국! - 있다. 간다. 살 것이다. (계 21:1∼8)


1. 우리에겐 천국이 있다. (1~2) ⇨ 이미 약속된 천국

서기 1,254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코 폴로’(Marco Polo)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일찍이 실크로드를 따라 몽골제국까지 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나 궁중무역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마르코 폴로가 17살 되었을 때 그 무역 여정에 동행했는데, 그때는 몽골제국의 제5대 칸(王)인 ‘쿠빌라이 칸’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어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었고,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북경으로 정한 때였습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4개월의 여정 끝에 베이징에 도착하여 황제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게 됩니다. 이때 황제는! 젊고 유능해 보이는 마르코 폴로에게 동남아 제국과 인도를 돌아보고, 그 보고서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그는 약 17년 동안 중국 서남부,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의 제 국가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 24년 만에 고국 이탈리아로 귀국하는 길에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북부까지 들러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이 책은 당시 서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동방견문록’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책에 우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았어! 이제라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겠나?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자네의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지?” 그러자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그리고 내가 보고 겪은 것의 채 절반도 기록하지 못했다네.”

제가 오늘 ‘마르코 폴로’와 ‘동방견문록’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천국’의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상상으로 꾸며낸 곳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서기 1,300년 당시엔 ‘동방견문록’을 보고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늘 이 시대의 눈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다 실제 하는 세상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모두 ‘천국’을 ‘실제 하는 세계’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결코 ‘상상의 산물’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존하고 있으며’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3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두고 ‘내 아버지 집’, ‘거할 곳’, ‘거처’, ‘나 있는 곳’이라고, 몇 차례나 반복해서 ‘천국은 구체적인 장소’인 것을 명백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게다가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철석같이 약속까지 해 주셨으니, ‘천국의 장소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는 천국엘 간다. (3~4) ⇨ 아직 기다리는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가 지각할 수 있고 또한, 모든 피조물을 수용하고 있는 현재의 시공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가서는 안 될 ‘지옥’도 포함하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게 될 천국은 과연 어떤 곳입니까? 오늘 성경이 말해 주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계 21:2 →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많지만! 요한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은!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움’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새로워지고 개량되고 좋아진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다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계 21:1b →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네!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전혀 새로운 장소’입니다. 계 21:2a →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물론 이 말도,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적으로 ‘하늘에서 만들어져서 이 땅에 내려왔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완전히 새로운 장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곳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막히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② 인생의 모든 고통이 더 이상 없는 곳입니다. 계 21:4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여기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은 다 처음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문제와 아픔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고통의 조건과 내용들이 다 치유되고 소멸되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주시고자 원했던 선물!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에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빌 3:20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아멘. 이 꿈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린 천국에서 살 것이다. (5∼8) ⇨ 두 세계! 천국과 지옥

① 천국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는 장소인데, 오직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계 21:6b~7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먼저, “이기는 자”라고 한 까닭은! 천국은 말세가 될수록 더욱 거세어질 온갖 마귀의 시험과 박해 중에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은! 그 천국에서의 삶은 그저 ‘하나님과 같이 사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 처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누면서 살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홈 스위트 홈’ ‘행복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② 반면에, 천국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계 21:8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앞서 “이기는 자”와 대조되는 자들로서 일단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도중에 돌아서 버린 ‘배교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일시적인 신앙생활’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뒤이어 나오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 즉 불신자들과 똑같이 취급될 뿐입니다.

그 외의 “흉악한 자” “살인자” “음행하는 자” “점술가” “우상 숭배자”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이란! 곧 ‘믿지 아니하는 자’와 동격으로 불신자들의 삶에 저절로 따라오게 되는, 온갖 악행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의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국’과 극적으로 대조되는 ‘지옥’에 던져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이 죽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한다면, 지옥에 던져져서 영벌을 받게 되는 것을 일러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두 번 태어나고(육적, 영적) 한번 죽어 천국에 이르고, 불신자들은 한 번 태어나고(육적) 두 번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부모님을 통해 한 번 태어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다 천국에 이르는 복된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③ 천국은! 성도들이 지옥에 떨어진 악한 자들과 완전히 분리되는 곳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6:26 →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그 어떤 종류의 왕래나 소통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 모여 사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쁜 사람’, ‘악한 인간’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환상적이고 완벽한 공동체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정말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은! 바로 ‘악한자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악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정말 ‘좋은 곳’이, 바로 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첫째 → ‘천국이 정말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나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충만한가?’라는 질문이고, 둘째 → ‘지옥이 그렇게 끔찍한 곳이라면!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이웃이 그 지옥에 가지 않도록 그들을 건져내는 일인 전도에 힘을 쓰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쪼록 천국을 사모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다 천국에 입성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도 여러분으로 인하여 다 전도 받아 천국에 이르는 가장 놀라운 축복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천국과 지옥의 실재(實在)에 대해서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오늘 말씀을 들은 후의 변화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만이 아니라, ‘지옥’도 포함하는 세계라는 사실이 본인에겐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두 가지 질문(기대와 소망, 전도의 사명)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가 살게 될 천국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본인에게 가장 기대되는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5-07-26
조회 252

제목: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떠나면! (렘 17:5∼8, 13)


1. 물은 생명의 근원

날씨가 무더울 때,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원한 생수입니다. 요즘은 다양한 음료수도 많고 시원한 과일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그 무엇도 ‘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목이 마를 때 가끔 다른 음료를 마셔봅니다만, 그러나 역시 정말 목이 마를 때는 ‘물’이 최고입니다.

생각해 보면!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면서 수분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갈증’ 곧 ‘목마름’이라는 경보장치를 달아 두셨습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이 말라비틀어져 편안하고 부드러운 말이나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칠고 날카로운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 내면이 뭔가 목마름을 느낄수록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심령이 고통당하는 원인을 ‘갈등’에 있지 않고, ‘갈증’에 있다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내면적으로 무언가가 고갈되어 있으므로, 진정한 만족이나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등’이 아닌 ‘갈증’이 근본 문제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6절에 한 나무가 소개되고 있는데 바로 ‘떨기나무’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당당한 거목과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나무라기보다는 차라리 덩굴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곤핍하고 초라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또한, 한때는 대단했지만, 지금은 초라하고 메마른 ‘유럽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걱정스럽기는, 한국 교회도! 초라한 떨기나무 교회로 전락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떨기나무로 전락하거나, 반대로 거목으로 자라가는 구분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해답으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느냐? 아니면, 곧 다시 목마를 인간과 세상을 의지하느냐? 여기서부터 ‘떨기나무’가 되느냐? 아니면 ‘거목’이 되느냐? 로 나뉘게 된다고 말합니다. 본문 5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3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렘 17:5 →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① 맨 먼저, “무릇 사람을 믿으며…”라는 말에서는 사람이란 단어로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는 ⇨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인류 ‘아담’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보통명사로서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을 가리킬 때, 바로 이 ‘아담’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사람’이라는 말은! → “사람은 다만 ‘피조물일 뿐’이니 그를 신뢰와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다음은,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여기 ‘육신’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사르’(בשׂר)인데 →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연약한 인간’ ‘깨지기 쉬운 인간’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번역하면 → “깨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을, 자신을 보호해줄 힘으로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했는데, 여기서는 ‘게베르’(גבר)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여기 ‘게베르’는 ‘강한 자, 용사, 힘 있는 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용사처럼 살아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자는 결국 망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란 ‘세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본문 5절 말씀을 해석해 보면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① 피조물인 사람을 믿으며 ② 연약한 인간을 힘으로 삼는 자는 ③ 그가 아무리 용사처럼 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망하게 될 것이다.” 아멘!

성경의 역사는, 이 말씀이 진실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나라와 백성은 결국 다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네! 우리가 사람을 사귀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우리의 인생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고,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 17:7∼8 →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나무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넉넉한 수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뿌리가 물 근원에 닿아있기만 하면! 더위가 올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햇볕이 따가우면 따가울수록! 훨씬 더 크게 자라고, 그 나무가 유실수라면!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상담심리학자인 데이빗 포올리슨(David Powlison)은 오늘 본문 렘 17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상담의 원리’를 이렇게 설파합니다.

내담자는 대부분! 자기에게 있는 ‘괴로움과 아픔의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외부에 그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제는 ‘내’가 아닌 ‘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담자는 내담자가 힘들어하고 열 받는 외부적 요인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내담자의 인생의 뿌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필 줄 알아야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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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른쪽에 있는 ‘떨기나무, 가시나무’와 같이 된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자기에게 어려움을 주는 고통의 상황, 열 받는 상황의 원인이! ‘뜨거운 태양’으로 상징되는 외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과 가시 돋친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갉아먹고 메마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왼쪽의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인생은! 그 인생의 뿌리를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뻗어 내리고 있어 그로부터 수분을 공급받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 볕’은 그냥 고통의 상황이나 열 받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외부적인 고통과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뿌리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닿아있느냐? 그렇지 못하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외부적인 요인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그 뿌리를 물의 근원에 내리고 있는 나무처럼! 믿음의 뿌리를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내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생수란 무엇이며, 그 근원은 어디입니까?

① 여호와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 렘 17:13 →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기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살리는 ‘생수의 근원’이시라는 말씀입니다.

② 생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7:37∼39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네!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는! 주님을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까이할 수 있습니까?

①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수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영혼의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건강하게 성장케 되는 것입니다.

②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 인생으로 끌어오는 파이프라인과 같은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그 코에 하나님의 숨, 루아!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실 때 생령,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듯이,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진정 새롭고 능력 있는 인생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요즘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과 사람과 가까워지고 있는지? 진정 내가 멀리 하고, 내가 가까이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생수의 근원에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은 ‘영적밥먹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년초에 나눠드린 신앙 성장·성숙 가이드북 25∼26 페이지) 나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기도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리고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3. 초라한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이 위대한 거목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 나눠봅시다. (예; 요셉, 모세 등)

이재영
2025-07-19
조회 180

제목: 입에는 달고 배에서는 쓰다. (계 10:8∼11)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가 있는 사도 요한에게 주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그 환상을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박해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기 위한 책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는 10장에 기록된, 한 환상의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환상 중에 하늘에서 주님의 음성이 사도 요한에게 들려옵니다. 계 10:8 →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천사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두루마리 책’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 책을 받아 가졌더니, 이번에는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계 10:9 →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천사가 자신의 손에 펼쳐진 채로 있던, 그 작은 책을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1. 말씀을 먹어라!

성도 여러분! 성경책은 ‘읽는 것’인데, 왜 ‘먹으라’고 했을까요? →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은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삽니다.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매일 밥을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먹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을 듣고 읽는 것입니다. 만일 말씀의 양식을 매일 먹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약해지고 쉽게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 말씀을 먹는 것! 말씀을 듣고 읽는 일을 매일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먹어야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밥심으로 일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먹어야 힘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먹어야 섬기고 봉사할 힘이 생깁니다. 배고프면! 금방 지칩니다. 짜증이 납니다. 화가 납니다. 그러나 매일 말씀을 먹으면! 힘있게, 즐겁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겔 2:8∼9 →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이어지는 겔 3:1∼3입니다. →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하고 있던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잡혀가 아무 희망이 없는 유대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전하라고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네가 먼저 말씀을 먹어라. 말씀을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가 먼저 말씀을 먹고 힘을 내야 한다. 네가 먼저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후에! 에스겔은 절망 가운데 있는 유대 동포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먼저 매일 말씀을 먹읍시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고 위로와 용기를 얻읍시다. 그러면, 어려운 환경을 헤쳐나갈 힘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말씀을 먹어 힘을 얻은 후에, 나의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동료 친구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조금 크면 이유식을 먹고, 밥을 먹습니다. 혼자서 먹을 줄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3년, 5년, 10년 서서히 자라납니다. 나중에는 몸집이 엄마 아빠보다 더 커집니다. 마찬가지로 3년, 5년, 10년 꾸준히 말씀을 듣고, 읽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성장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읽었다고 당장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설교 말씀을 듣고, 내일도 성경을 읽고, 다음 주일도, 다음 달도, 내년도… 이렇게 매일 꾸준히 듣고 읽으면! 우리의 생각이 서서히 바뀌고, 행동이 변화되고, 삶이 바뀌어 갑니다.

물론, 은혜받은 말씀이 내 것이 되기까지, 내 삶에 체질화되기까지, 힘든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소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힘들 때도 있습니다. 위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꾸준히 말씀을 듣고 읽다보면! 아주 조금씩, 말씀이 내 가치관이 되고, 내 인격이 되어갑니다.


2. 말씀을 살아내라.

천사가 요한에게 말씀을 “먹어 버리라”고 했고, 요한은 순종하여 그것을 먹었습니다. 계 10:10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물론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냥 손에 가지고 다니는 책이나, 읽고 듣는 것 만의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마치 음식을 먹어 소화시켜 에너지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입으로 소리 내어 읽고, 되새김질하듯 계속 읊조리고, 묵상하고 ….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 말씀의 뜻을 분명하게 안 후,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오늘 본문은 ‘먹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과연 달기만 한가요?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 두루마리 책을 먹을 때, 입에는 꿀같이 달겠지만, 그 배에서는 쓰디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계 10:10 →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당시 사도 요한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살아내기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 믿는 성도임을 몰래 감추고 살아도 살까 말까 하는 시대에, “나는 성도입니다! 나는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나를 죽이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경책, 주님의 말씀은 쓰디쓴 약초와 같은 것입니다.

핍박이 심했던 사도 요한의 시대와는 다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그리 쉽고 간단하지 않습니다. 경제 여건은 몹시 어렵고, 정치·사회적인 갈등도 여전하고, 기후 재앙도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습니다.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계속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가 살길입니다. 그렇게 살 때!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이 땅에 희망의 꽃이 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현실이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괴롭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괴로울수록, 더 적극적으로 말씀의 삶을 살아낼 때, 그것이 여러분과 주변을 더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인 말씀의 복을 이끌어 내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을 전파하라.

그런데 말씀을 ‘먹는 게’ 끝이 아닙니다. 추가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계 10:11 →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과 장소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먼저 대상입니다.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입니다. 이 말은 네 삶의 자리뿐 아니라, 말과 언어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거기 가서 보통 사람들뿐 아니라, 임금과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계시록 1장에서부터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이 부탁을 하셨습니다. 계 1:11 →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즉, 주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글로 써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2 사도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수명을 다하고 ‘자연사’한 사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순탄한 삶만을 산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전승에는 예수를 부인하기를 거절하는 사도 요한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졌으나,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놀란 박해자들은 요한을 처형하는 대신에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주님의 주시는 환상을 보고, 계시록을 쓴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쓴 책을 자신이 목회하던 소아시아 일곱교회로 보내서 읽게 했습니다. 비록 말로 전하지 못했지만, 글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아무리 지금 삶이 어렵고, 또 그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이 힘들고, 나아가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은 더 어려울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 선교사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파송된 선교사에게 격려의 카톡 메시지를 보내고, 편지를 보내고, 물질을 보내는 것도!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복음을 받은 자의 피할 수 없는 사명이며, 성도의 마지막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꺼져가는 전도의 불씨를 다시 일으키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전도로 인하여! 여러분의 영혼이 살고, 가정이 살며, 교회가 살아나고, 이 시대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달았던’ 경험과, 반대로 ‘썼던’ 경험을 나눠봅시다.


2. 내가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은 연유로, 가족이나 동료 이웃에게 성도로서 가지고 지켜야 할 기본을 잃어 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건강한 성도, 시련과 미혹을 이겨낼 힘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다시 말씀을 생활화하는 습관을 세워 갈 구체적인 계획을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