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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이재영
2023-04-08
조회 281

제목: 마음이 뜨거워질 때! (눅 24:13∼35)


오늘 말씀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바램, 의심과 회의, 말씀에의 무지가 두 제자의 마음을 싸늘하게 식혔습니다. 마음이 차가워졌을 때,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 그들의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을 때 신앙이 회복되어, 오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 부활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도 뜨거워지는 영적 부흥의 역사를 맛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제자와 예수님이 주막집에 들어갈 때, 이미 날은 저물고 해는 기울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일 걸어서 피곤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캄캄한 밤과 피곤함이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달려 올라갈 힘을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은 게 문제란 걸 아시길 바랍니다. 그럼! 마음이 뜨거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두 제자가 그들끼리만 걸었을 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있었고 실망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되게 하셔야 가능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먼저 두 제자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실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눅 24:15∼16 →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동행하시는 주님께 그들은 자신들이 실망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심령이 뜨거워지려면!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슬픔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은혜의 수단, 은혜의 통로에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통로’에는 ⇨ ‘말씀’ ‘찬양’ ‘기도’ ‘금식’ ‘성찬’ ‘영적교제’ ‘선행’ 등이 있습니다.

지금 두 제자는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눅 24:27 →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리고 베푸시는 ‘성찬’을 받았습니다. 눅 24:30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렇습니다. 은혜의 통로 ‘2가지’에 접촉했습니다. 주님과 말씀의 교제를 했고, 또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신앙적인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눈이 열리고, 마음의 뜨거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눅 24:30b∼31a →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네! 성찬을 받을 때 영적 눈이 뜨여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눅 24:32 →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고, 또한 배우기를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찬 받을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뜨거워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2. 있어야 할 자리,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눅 24:33 →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마음이 뜨거워지자마자! 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출발한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요즘같이 가로등이 있는 것도 아니니 웬만하면 내일 올라가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돌아가”라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① ‘회개’와 ② ‘돌이켜 행함’입니다. 이 둘은 사실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두 제자는!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진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이렇게 냉랭했던 심령이 성령충만한 뜨거운 상태로 변했을 때, 자신들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그들이 있어야 할 곳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참 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이런 ‘깨달음’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돌이키는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두 제자는 그 밤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뜨거워진 마음은! 주막에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요?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행 1:4 →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은! 곧 ‘말씀’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말씀을 잊은 채 실망했던 두 제자는! 다시 ‘말씀’ 안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회복은!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눅 22:61∼62 →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바른 신앙의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마리아와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화젯거리였습니다. 눅 24:33∼34 →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제자는 이들의 대화 속에 끼어들어,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서 간증했습니다. 눅 24:35 →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사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내려 가면서도 많은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셔서 실망스럽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실망의 입은 닫히고, 희망의 입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불평이나 실망에 입이 열린 사람이 아니라, 소망과 축복에 입이 열린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입이 열려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믿음의 입이 열렸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망한 상태에서 소망을 가득 품은 마음으로 바뀐 모습, 엠마오로 내려가던 무거운 발걸음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뛰어 올라가는 힘찬 희망의 발걸음으로 바뀐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①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②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면! ③ 여러분의 입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회복’입니다. 바라기는 기도하는 입도 열리고, 찬송하는 입도 열리고, 간증하는 입도 열리고, 전도하는 입도 열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뜨거울 때와 식었을 때, 신앙생활이 어떻게 달랐었는지 나눠봅시다.


2. 은혜의 통로에는 ‘말씀’ ‘성찬’ ‘찬양’ ‘기도’ ‘금식’ ‘영적교제’ ‘전도’ ‘선행’ 등이 있습니다. 당신 간과하고 있는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사순절 특별히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내며 가장 크게 은혜받은 예배나 기도회 등에 대해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4-01
조회 462

제목: 들어와 깨끗게 하소서! (마 21:6∼13)


오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동안, 성도님들은 적어도 하루 한 끼 이상 금식하면서, 세상의 즐거움에서 잠시 물러나, 세상을 닮아가는 우리의 신앙을 말씀으로 치유하고, 나태했던 기도생활을 회복하고, 빗나갔던 우리의 삶을 바로 잡는 한 주간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빗나간 백성들의 기대!

2000년 전 오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게 할 자신들의 왕으로, 유대 나라를 회복할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하며 맞이했습니다.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아서 양탄자를 대신하고, 종려나무 가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힘차게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백성들은 목소리 높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마 21:9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기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 ‘호쉬아 나’(an: [v'y:)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옮겨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호쉬아’([v'y:)는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고 + ‘나’(an:)는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겉보기엔 참 아름다운 신앙고백 같고, 간절함이 묻어 있는 부르짖음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안타깝게도 ‘세속적인 동기’ 때문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 그래서 우의정 좌의정을 바랬던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군중들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친 것은 ‘어서 우리를 로마의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그렇게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인생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백성들이 기대했던 ‘왕’은 ‘세속의 정치적인 왕’이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권세자로서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과 사역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영생’에 있으셨습니다. 결국, 빗나간 기대로 인해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외치는 사람들로 돌변하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성전 정화와 우리의 정화

이런 엇갈린 기대 속에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아가신 곳은 어디였습니까? ‘왕궁’이 아니라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시자마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전 정화’였습니다. 마 21:12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평소와 다르게 예수님은 과격한 행동으로 평온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대소동에 휩싸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거친 음성으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21:13 →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였는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눈에는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심각한 문제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흠이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먼저 제물을 검수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레위기 율법을 빌미로,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은 세속적인 이익을 탐하는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결탁했습니다. 대부분 집에서부터 가져온 제물은 퇴짜놓고, 상인들에게 구매한 제물만 합격시켜 줬습니다. 그러니 더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예루살렘에는 먼 디아스포라에서 순례 차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제물을 구매하려고 하면, 장사꾼들은 유대 돈이 아닌 화폐는 받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폭리를 취하며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에게 유대 돈으로 환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역기능적 구조 속에서 생긴 부정한 돈의 일부를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부터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뒷돈으로 받아 챙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전 안에서 ‘딴 재미’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거룩한 성전에서 부패한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그 실제와 속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전 정화사건’ 속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살펴봐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 너희들에겐 아무 문제 없다고 OK 하실까? 우리에게서는 그런 세속적이고 부패한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재미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딴 재미’를 추구하고 있던 모습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장사꾼들의 의자와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너희들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주 극적인 장면이지만,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이런 부패한 종교지도자들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기의 명예와 이익을 높이려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셨고, 그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 구린 냄새가 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속을 들여다보셔도 부끄러움이 없고, 오히려 “이만한 믿음의 사람을 내가 보지 못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 인생의 왕으로 들어오시길 원하시는 예수님

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완성하는 이 마지막 주간의 첫날에 ‘왕의 선포식’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왕의 대관식 장소인 예루살렘에 조용히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대관식의 주인으로서, 또한 경배받아야 할 최고의 왕으로서, 군중들의 환영 속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고, 또한 알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날 예루살렘 성에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입성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 각 개인의 인생 안에 왕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신앙생활에, 삶의 현장에,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왕으로 입성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다시금 환영하고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들어가다’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0절과 12절입니다. 마 21:10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마 21:12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처럼! 성전에 들어가신 것처럼! 내 인생에도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들어오셔야, 내가 살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밖에 계셔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문화에 익숙해지고, 사도신경을 줄줄이 외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구세주로 모셔야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별 문제의식 없이, 혹은 이권에 약삭빠르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아가는 듯했어도, 빛이신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그분의 눈과 시각으로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썩어 가는 곳, 냄새나는 곳, 죽어있는 곳들을, 선명하게 바로 보게 되어야만 합니다. 무엇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암(癌)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질병은 자각 증상을 통하여 미리 알아채고 고칠 수가 있지만, 대개 암의 경우는 자각 증상을 느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치료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암은! 정기 검진과 조기 진단을 통해서 예방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병이나 무뎌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기 검진과 조기 진단을 통해서 예방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내 ‘이성의 눈’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들어오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포장되고 꾸며진 모습이 아닌, 자신의 본 모습과 본질을 볼 때야만, 비로소 치료자 되시는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 한 주간을 여러분의 ‘영적인 정기 검진’을 받는 기간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시며 왕으로 모셔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설령 자신의 썩어있는 곳, 굳어진 곳, 냄새나는 곳을 알았다 해도, 자신의 노력과 결심만으로는! 새롭게 하거나 정결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시각으로 나의 문제를 볼 때, 문제를 문제로 알 수 있고, 그분의 권세와 능력으로만, 나의 어두움과 불순종과 뿌리 깊은 죄의 습관들을 내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셔야,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쫓아내고 정결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능력의 예수님, 권세의 예수님, 어두움을 물리치는 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왕으로 모신 자라야, 심령과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모하십시오. 그분을 환영하십시오. 그리고 왕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진정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셔 들여, 인생의 고침과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주님의 눈으로 볼 때, 내 인생 속에서 쫓아내서 정화하고 깨끗게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을 진정 당신의 왕으로 모셔 들였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해도 불편하지 않을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3.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당신의 새로운 삶과 영혼을 위해 결심하고 실천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3-25
조회 245

제목: 경천애인(敬天愛人) (마 22:34∼40)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greatest commandment)과 ‘대 사명’(임무)(great commission)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마 22:37∼40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어 <대 사명(임무)>은 마태복음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마 28:18∼20a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가장 큰 계명>과 <대 사명(임무)> 중 ‘두 가지 계명’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삼았는데, 이것의 본질을 살펴보면 영어 단어로는 ‘Service’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의 핵심은 ‘예배’라고 할 수 있는데, 예배를 영어로는 ‘Service’라고 합니다. 두 번째 계명인 이웃 사랑의 핵심은 ‘섬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섬김 역시 영어로는 ‘service’라고 합니다. 다만 소문자로 표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예배라는 Service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인 섬김 역시 service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 첫 번째 계명인 경천(敬天) ‘예배’(Service)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를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고 하면,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믿지 않는 친구가 여러분께 이렇게 물었다고 합시다. “너는 일요일마다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데, 예배가 뭐니? 찬송하고 기도하고, 목사님의 설교 듣고 헌금하고 오는 것을 말하니?”

이에 대하여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러니까 예배를 시간과 공간, 혹은 어떤 틀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일(시간), 교회(공간), 예배형식(틀) 안에만 묶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행위, 그분을 미소 짓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는 나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과연 미소를 짓고 계실까요? 아니면, 그렇지 못해서 그런 삶을 살길 원해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실 수 있는 5가지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①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가장 사랑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마 22:37∼38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②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히 11:6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③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창 6:22 → “노아가 그와 같이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해보다 순종이 우선입니다. 순종은 이해하게 됩니다.

④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미소 지으십니다. ▷ 시 69:30∼31 →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⑤ 하나님은 우리의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섬길 때 미소 지으십니다. ▷ 마 25:21 →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보를 접든, 전도지를 나누어 주든, 교회 안팎을 쓸고 닦든, 찬양대나 교사로 섬기든, 차량 운전을 하고, 주차 안내를 하든, 화단을 가꾸고 성전 안팎을 장식하든!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은 여러분이 예배를 돕는, Service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몸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섬김이 있습니다. 바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고후 1:20b →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난 특별한 달란트도 은사도 없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라, 교회에서 할 만한 일이 없는데요.”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아뇨! 어떤 분이든 섬길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얼마 전부터 자발적으로 토요일마다, 화장실 청소, 계단 청소, 유아실을 정리 정돈하시는 권사님들이 생기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간단하게 보면 그저 청소하는 일이지만, 이런 일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 Service이며, 또한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도 service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예배자가 되기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받으면 심령은 건강해지고, 교회는 올바르게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2. 두 번째 계명인 애인(愛人)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를 두 글자로 줄이면 뭐가 될까요? 그것을 저는 ‘섬김’(봉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섬김이란? ⇨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입니다. 사실 사람마다 많은 상처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찾아 섬겨주는 것을 일러 ‘사역’이라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역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섬기다(service)란 의미인데, 이 말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집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사역자이며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과 이웃의 필요를 따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3가지 방향’으로 섬김의 사역을 해야 합니다.

①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Service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각종 은사를 사용하여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② 그 다음은, 믿는 성도들을 위한 섬김 사역입니다. 히 6:10 →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새번역) 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과 섬김을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③ 나아가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 5:13∼14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는 교회와 성도만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까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3가지 방향으로 1가지씩 작은 일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 주님을 향해 → 예배 한 번 더 드리기, 성경 0장 읽기, 가정예배, 전도하기 성도를 향해 → 안부 문자보내기, 격려 전화나 심방 하기, 밥 사주기, 기도해주기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해 → 필요한 것 채워주기, 작은 선물하기, 차 마시기

이와 함께 우리는 ‘3가지 영역’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섬김은 이 3가지를 포함해야 합니다.

① 사람들의 ‘육신의 필요’를 위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 25:35∼36,40 마 10:42)

② 사람들의 ‘감정적인 필요’를 향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살전 5:14)

③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향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고후 5:18)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좌우명’은 이것이었습니다.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자. 모든 수단,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어떠한 장소에서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상대가 누구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랫동안 하자.” 바라기는 이것이 또한 우리의 좌우명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섬김 사역을 사명으로 알고 감당할 때 우리를 통해 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② 성도들이 기뻐하고 ③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섬기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알버트 슈바이처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섬겨본 사람은 그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 다 맛보셨을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대단한 일을 해야 사명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사명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 기쁨과 행복을 찾아 나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마 22:37∼40)과 ‘대 사명’(명령, 마 28:18∼20a)의 말씀을 암송 하거나 성경을 펼쳐 읽어봅시다.


2. 가장 큰 계명을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요약했습니다. 이 두 영역의 섬김(Service)에서 ‘내가 꼭 실천 하며 살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각각 말해 봅시다.


3. 인간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3가지 영역의 필요를 채우는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아내 나 남편, 내 자녀와 부모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섬김 영역을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3-18
조회 537

제목: 제자로서의 마음가짐! (마 20:20∼28)


우리는 지금 인류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그 ‘제자도’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세속적인 영광을 내려놓을 마음을 가져야!

130여 년 전인 개화기에,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고,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두 가지 동기’ 있었습니다. 하나는 ① 개화를 통한 ‘사회변혁’과 ‘자기발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② 그저 순수하게 예수 믿고 구원받기 위한 ‘복음적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사람들의 예수 믿는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바로 ‘축복의 동기’입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예수 잘 믿어도 세상적인 축복은 기대하지 말아라!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를 믿어 복 받고, 건강하기 위해서만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병이 고쳐지지 않고, 부자 되지 못하고, 출세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믿음을 버릴 수 있고 예수를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다. 이분을 통해서 우리가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예수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경험하면서, 이런 기대는 더욱더 커졌을 것입니다. 와우! 이런 기적을 행하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소원도 만족시켜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세 번째 ‘수난고지’를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거듭 당신은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참 당혹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제자 야고보·요한 형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을 하면서 이렇게 청탁합니다. 마 20:21 →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어머니도 예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면, 틀림없이 정권을 잡고 왕의 자리에 오르시게 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서열 1위, 2위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기적인 치맛바람을 바라보는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해서 분히 여깁니다. 마 20:24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한마디로 너희들이 좌의정 우의정 다 해 먹으면 우린 뭐 하라는 거냐? 이런 것이죠! 이것은 분명히 예수를 따르는 동기가 변질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예수 믿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나 역시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세속적 동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요청 앞에서, 오히려 세속적인 영광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0:26b → “너희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단·마귀는 성도들이 교회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달콤한 목소리로 십자가를 부인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4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왜냐하면 헛된 영광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헛된 영광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 20:27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을 따라,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섬김의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마 20: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은! 결코 ‘지배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자가 되었어도,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지배의 욕심’을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배의 욕구’는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가장 강렬한 욕구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위협하는 밑바탕에는, 언제나 이런 권력 욕구, 지배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정생활의 갈등! 그러니까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등 모든 갈등 속에는 “누가 지배자냐?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갈등, 심지어 교회 생활 속에서도 이런 갈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별히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유교의 역기능적인 요소인, 관계에서 계급화·서열화하려는 의식과 +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 겹쳐져 서 우리 사회는 좀 더 수직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아예 지위나 서열을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지위와 계급, 서열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 지위와 계급, 서열은 ‘섬김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만은, 계급의식을 극복하고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크리스천 리더십’과 vs ‘세속적인 리더십’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오늘 본문에 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세속적인 리더십의 특징’입니다. 마 20:25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 ‘세속적 리더십의 특징’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있는데 “주관한다, 권세를 부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절에 보시면 ‘크리스천 리더십의 차별성’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0:26∼27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네! 주님의 제자라면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섬길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마음을 갖길 요청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① 첫째 생일은! “우리의 몸, 육체가 태어난 날”이고 ② 둘째 생일은!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알게 된 날”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육체의 생일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섬길 마음을 품는 것!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마음인 것을 믿고, 그래! 내가 주님의 제자로서 ‘섬김의 삶을 실천하리라’는 마음을 품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주님으로 인해 고난이 온다면,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마지막 마음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고난’이라도 기꺼이 받겠다는 각오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섬김은 고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난만 당하다 그냥 끝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후에 받을 영광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23절 후반부를 보겠습니다. 마 20:23b →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너희들이 고난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날에 ‘상급과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신앙 선배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에너지는, 바로 고난 저편에 예비하신 ‘영광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지금 당장 그 영광이 내게 오지 않아도 상관없었습니다. 눈물과 희생, 섬김, 내 동기의 순수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으로 나를 축복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고난 저편의 영광을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롬 8:18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고, 구원이시라고 확실하게 믿는다면, 아직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에게 진지하게 여러분의 믿음을 드러내시길 바랍니다.

그런 신앙고백이나 전도 때문에 받을 수도 있는 수모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핍박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쉽게 타협하고,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 그 누구도 감동할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한 사람, 그리고 그 대가를 지불 하리라고 마음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고 감동하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런 삶만이 그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메시지는 오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마 20: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들이 가는 길과는 달리! 살아가는 가치가 달라야 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불신자는 부귀영화와 향락과 땅에서의 만족을 위해 살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천국에서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 그 정신! 그 마음! 가지고 살아,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높여주시고 영광되게 하시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변질됐거나 타락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고 나눠봅시다.


2. 섬김의 삶으로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된, 이 시대의 주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나눠봅시다.


3. 신앙 선배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바로 고난 저편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광 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주는 힘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3-11
조회 398

제목: 용서하고 또 용서함으로! (마 18:21∼35)

 

1. 용서와 회개는 치유의 양대 축

인간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용서를 받기도 해야 하고, 용서를 베풀기도 해야 합니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참된 회개가 없이는 용서도 치유도 불가능하단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회개는 두 가지를 충족해야 합니다. → ① 첫째,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② 둘째, 내가 지은 죄로 인해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내가 잘못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되고, 사람에게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도 해야 하고, 사람에게도 해야, 완전한 회개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자와 같이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구하지 않고’ ‘죄’에 대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문제입니다. → ① 국가적으로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 어린 ‘사죄’가 없는 것이고요 ② 사회적으로는, 학교폭력(학폭) 가해자의 ‘용서’를 구함이 없는 것입니다.

가해 국가나 개인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피해 국가나 개인은 그 ‘사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면!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고, 마음까지 치유되어 샬롬의 새 세계를 펼쳐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 이 자리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구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어서 속히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서 심령의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데도 용서해 주기를 거절하고 마음을 닫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어서 속히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용서’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1:25 →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옥 가야 마땅할 우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은혜 입은 자로서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용서해 주고!’ ‘용서받고!’ 이를 통해, 완전한 치유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럼, 용서는 어디까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그리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대답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 18:22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은 산술적으로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일에 횟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마음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이나 기준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받은 용서가 취소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 6,000일, 즉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니 160,000년을 일하고 한 푼도 쓰지 않아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빚진 자가 갚지 못하자, 임금이 뭐라고 말합니까? 마 18:25b →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종이 말합니다. 마 18:26 →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의 마음을 달래보고자 하는 종의 간절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이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마 18:27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 탕감했다는 말은, 빚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삶은 도저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그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엡 2:4)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은혜중의 은혜요, 용서 중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으로 인해 용서받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상대를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보면,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엡 4:32 →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때때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기 마음속에 기준을 정해 놓고 상대방을 용서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선을 정해 놓고 여기까지는 용서하고, 그다음은 ‘절대 안 된다’라는 기준은 참된 용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한없는 용서를 생각하면서 제한 없는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용서의 사람 요셉을 본받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실천한 위대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으라면 바로 ‘요셉’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아픔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빨을 갈 일입니다. 평생을 복수로 채워도 다 채우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꿈 이야기를 하고, 잘난 체했어도! 어떻게 어린 동생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에 처넣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동생을 꺼내주는가 싶더니 노예상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었지만,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창 45:5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팔려 온 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팔려 온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계획이 있어 나를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팔려 온 자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 손해를 끼친 사람조차,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45:7∼8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비록 자신을 팔아먹은 용서하지 못할 형들이었지만, 오히려 생명을 살리고 후손을 이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처럼 ‘사명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아픔과 상처들이 아직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이제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더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로 인해 지옥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이제 용서를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시도하십시오. 더는 과거의 얼룩진 상처를 보지 마시고, 그 과거의 아픔과 상처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드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과 사명을 바라보며 미래를 향해 전진하십시오.

용서는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희망의 씨앗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감싸주시고 치료해 주시십니다. 그 안에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의 응어리가 영육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경험한 바가 있다면 나눠보시고, 믿음 안에서 푸는 방법인 용서와 회개에 대하여 나눠봅시다.

 

2. 용서의 사람 요셉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누가 먼저 풀고, 누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할 사람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3. 당신이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한 죄, 풀어야 할 인간관계, 풀어야 할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속히 해결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십시오.

이재영
2023-03-04
조회 436

제목: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나의 고백! (마 16:13∼20)


시험이나 취업의 마지막 관문은 대개 ‘면접시험’일 때가 많습니다. 이 면접은 시험 당사자 대신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당사자 본인이 면접을 통과해야 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예수님 앞에서 이와 같은 ‘면접시험’을 치른 후에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면접하십니다. 이 면접 역시! 예수님과 본인, 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리요 시간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천국 백성의 일원으로서 자격을 얻을 수 있는지?’가 결정되는,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과의 면접시험 ‘두 가지 질문의 내용은 무엇’이고, 우리가 ‘바르게 대답하고 고백해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질문인 ‘너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하고만 조용한 시간을 가지려고, 일부러 빌립보 가이샤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질문하심으로써, 의미심장한 면담을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대답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던 온갖 ‘풍문’들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하신 진짜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면접시험의 첫 번째 질문’의 요지는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제자인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수제자인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 16:16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즉 예수님은 그 본성이 ‘하나님’이시며, 이 땅에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오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대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벽한 대답’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으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면접하고 계십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고 고백해야 할 사람은 오직 ‘나 자신’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분명하고 확신 있게 고백함으로써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 질문인 ‘너는 나(예수님)를 어떻게 따를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고, ‘이제 제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졌구나!’ 생각하시고 당신의 ‘십자가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 16:21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런데! 앞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바른 정답을 말했던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면서 가로막습니다. 마 16:22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16:23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방금 전에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를 보고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책망 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4∼25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당시 대중들에게는 잘못된 메시아관(觀) 즉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서서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다!’ 하면서 앞장서기만 하면, 당장 그 사람을 따라 독립운동을 일으킬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자, 그 말을 어디 가서 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시면서, 진정한 그리스도란? 어떤 메시아인지를 확실히 밝혀 주셨습니다. 앞서 보았던 구절입니다. 마 16:21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즉 진짜 구세주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그리스도라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이나 ‘죽음’이란! 사람들이 예상하고 기대하던 메시아 상(像)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들이야말로 진짜 구세주가 ‘반드시 당하고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고백할 때는, 반드시 예수님을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메시아로 영접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와 같은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만이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음으로! 뭔가 덕 볼 일만 계산하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으실 그리스도’를 결코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직후에, 바로 이 ‘두 번째 면접 질문!’ → 곧 “너는 나를 어떻게 따르겠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고백’의 진실성은! 오직 예수님을 섬기는 ‘충성’의 여부로써만 명백하고 정확하게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성도들 중에도 적지 않게 예수님을 오로지 ‘정치적 구세주’나 ‘경제적 구세주’로만 모시고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그 예수님이 자기를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해 줄 것이라는, 그 한 가지 기대를 가지고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죄 때문에 대신 ‘고난당하고 죽임당하는 메시아’란 아무 의미도 없고, 로마를 ‘정복하고 승리하는 구세주’에 대한 기대감만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고, 끝내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저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고난 후에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① 성육신하시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② 다시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승천하셨고 ③ 천군 천사들과 함께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메시아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누릴 벼락출세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후에 받게 될, 더 큰 영광’이며, 현세로 제한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지속될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놀라운 영광에 함께 참여하려면! 오늘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만 한다고 제자들에게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6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간단히 말해서 ‘무엇이 정말 더 중요한 것인지 한번 잘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물질이나 지위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면서 살지만, 자신의 생명이 걸린 문제에 부닥치게 되면, 그야말로 ‘온 천하’를 다 주더라도 ‘자기 목숨’을 살리려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진심으로 믿고 소망하는 자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당연히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뿐 아니라, 그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계산인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십니다. → “너는 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각오가 되어 있느냐?”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 것입니까? ▶ “주님! 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내 남은 인생이 아무 걱정 없고 행복할 것 같아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 “네! 주님. 내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라도 바쳐서 예수님만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바라기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마가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고백했던 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막 14:31 →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아멘. 이런 고백과 대답으로 ‘고난 뒤에 약속되어 있는 최고의 영광’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2. “너는 나를 어떻게 따르겠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3. 의외로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신은 어떻 습니까?

이재영
2023-02-25
조회 283

제목: 좋은 땅이 되어 열매를 풍성히! (마 13:18~23)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상태를 아주 명확하게 분석해주셨습니다. 첫째는, 길가와 같은 굳은 마음이요. 둘째는, 돌짝 밭과 같이 깊이가 없는 마음이요. 셋째는, 가시덤불이 왕성한 잡초마음이요. 넷째는, 좋은 땅의 옥토 마음입니다.

오늘 비유를 잘 살펴보면, 문제는 ‘씨앗’에 있지 않고 ‘흙’에 있습니다. 즉 ‘밭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앗에도 문제가 없고, 씨앗을 뿌리는 농부에게도 문제가 없습니다. 오직 열매를 맺는데 있어서의 변수는 ‘땅’ ‘흙’ ‘밭’이 문제입니다.

① 먼저 ‘길가와 같은 밭’입니다. 이 밭의 문제는 흙이 너무 딱딱하고 굳은데 문제가 있습니다.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 고집스럽고 굳은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13:19 →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즉, 마음이 굳어 있고 완악해져 있기에,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심령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심어지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탄이 그 뿌려진 말씀! 씨앗을 다 빼앗아 가게 되고 열매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땅은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마음 밭을 갈아엎을까요? 쟁기로 할까요? 아니면 삽으로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갈아엎을 수 있습니다. 렘 23:29입니다.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우리 심령을 쪼개고 수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 밭, 혹은 내 가족의 마음 밭을 진단해 보고, 길바닥 같은 마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이! 자신에게, 가족에게, 강하게 임하도록 사모함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 고집스럽고 굳은 마음이 다 깨지고 부스러져서, 옥토로 변하게 되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② 돌짝 밭, 흙이 얕은 밭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다 보면, 흙이 얕은 너럭바위 같은 곳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밭은, 두꺼운 석회암층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는 밭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므로, 가물 때 쉽게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본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 13:20∼21 →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네! 깊은 뿌리가 없는 신앙, 감정적인 신앙, 소위 냄비 신앙인을 말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는 감동을 받습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기쁨과 희열을 느낍니다. 소망을 갖고 좋아합니다. 굳게 다짐합니다. 결심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오래가질 못합니다. 잠깐뿐입니다. 너무 쉽게 요동하고 넘어집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설교가 일시적인 감동을 줄 뿐, 지속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합니다. 은혜를 받자마자 금방 쏟아버리고 맙니다. 열심을 품는 듯하다가 한순간에 침체에 빠집니다. 감정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반짝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이 있는, 심성 깊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깊이와 두께가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심령에 객토(客土)와 성토(盛土)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사이며 시인인 최상호 시인의 ‘마음 밭의 객토 작업’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봄을 맞기 전에 내 갈라진 마음 밭에도, 새 흙을 좀 부어야겠다.

어린 시절, 농부인 아버지는 한 해의 농사를 끝낸 뒤

푸석해진 논밭에 자주 기름진 산자락 흙을 옮겨 덮으셨다.

잃어버린 땅심을 찾아야 한다고 하시며…

발길 안 닿은 새 흙을 퍼 넣으시던, 그때의 아버지처럼

나도 내 척박해진 영혼에 퇴비를 해야겠다.


한때는 제법 윤택했던 손,

처음에는 웬만큼 너그러웠던, 귀와 눈의 회복을 위해

새해에는 검붉은 산자락 흙과, 강변 고운 모래로

늙어버린 마음 밭에, 객토 작업을 해야겠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의 회복을 위해서, 마음 밭의 객토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남을 향한 너그러움을 심으려고 해도, 마음의 윤택함을 회복하고, 갈라지고 푸석해진 마음을 추스려 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을 보니, 마음에 객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객토(客土)란 무엇입니까? 객토란 산성화되었거나, 나빠진 토양 위에, 외부에서 새 흙을 가져다 부어서 땅의 힘을 상승시켜 주는 작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객토는 단순히 현재의 토지를 갈거나 쟁기질하는 것! 곧 기경 하는 것과는 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객토란 단어에 ‘손님 객(客)’자를 쓰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좋은 흙을 가져와서 더해줌으로써 땅의 지력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럼 성토(盛土)는 무엇입니까?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기왕에 있는 땅 위에, 흙을 돋우어 쌓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마음 밭이 흙이 얇은 돌짝 밭과 같다면! 즉 말씀을 듣고 잠시 기쁘지만, 작은 유혹이 오면 금방 시들고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 돌짝 밭 위에 새 흙을 가져다가, 상당한 두께의 흙이 덮혀지도록 하는 ‘성토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 새 흙이 무엇입니까? 외부의 양질의 흙! 그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경을 깊이 읽는 것 보다, 다독(多讀) 즉 많이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많은 양의 성경을 읽다보면, 말씀의 두께가 생겨지면서, 쉽게 넘어지거나 시험에 빠지지 않고, 신앙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깊이가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가시밭! 즉 잡초가 마음을 뒤덮고 있는 밭입니다. 가시밭은 곡식과 함께 가시! 즉 잡초가 같이 자라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대로, 곡식보다는 잡초와 가시가 훨씬 빨리 자라고, 크게 자랍니다. 이런 잡초와 가시가 자라면서 ‘자양분’을 빼앗아 먹고, 또한 크게 자라 ‘그늘’을 만들어, 곡식을 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곡식은 겉모양은 갖췄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쭉정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서 예수님은 잡초와 가시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마 13:22 →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문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 할 때, 큰 장애물은 외부적인 ‘핍박’이나 ‘환란’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무서운 적! 방해꾼은, 내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바로 ‘생활에 대한 염려’와, ‘세상의 향락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세상 염려를 자르고, 욕심을 죽이고, 잘못된 습관을 뽑아버리고, 정욕을 불살라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문제들! 즉 잡초에 휩싸인 인생이 되어서 그대로 살다간, 결국 쭉정이 신자가 되고, 추수 때에 불에 던져지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④ 옥토 즉 좋은 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서 여러 가지 잘못된 밭의 상태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옥토는 어떤 밭입니까? 좋은 땅입니다. 마 13:23 →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네! 옥토! 좋은 땅에 씨앗이 떨어지기만 하면, 아무리 못해도 30배요. 60배, 심지어 100배가 되도록 결실합니다.

그러면 이런 좋은 땅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네! 옥토는 본래부터 있었거나 저절로 만들어진 땅이 아닙니다. 모든 땅이 처음에는 불모지와 같은 험한 땅이었으나, 농부가 끊임없이 땀 흘리며 수고하여 개간하여 옥토가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람의 마음도 처음부터 옥토와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와 같이 완고하고 고집스런 닫힌 마음도 있고, 돌짝밭과 같이 작은 시련이나 핍박 앞에서도 쉽게 기운을 잃어버리는 얕은 마음도 있고, 가시밭과 같이 여러 가지 세상의 욕심에 마음을 빼앗겨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눠진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밭을 말씀으로 갈아엎고, 인내와 끈기로 믿음을 지켜나가며, 세상의 향락과 잘못된 습관들을 끊어버리고 뽑아버릴 때, 비로소 옥토로 변하여, 열매 맺기 좋은 땅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농부의 땀과 수고와 눈물이 있듯이, 우리의 마음 밭이 옥토로 변하도록 참고, 수고하며, 눈물 뿌리며,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좋은 땅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좋은 땅’도 가만히 두면 금방 ‘쓸모없는 땅’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옥토와 같은 심령의 밭, 좋은 땅이 되어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자신의 신앙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영적 기운을 막는 것은 무엇이고, 과감히 끊어버리고 뽑아버 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좋은 땅’도 가만히 두면 금방 ‘쓸모없는 땅’이 됩니다. 좋은 땅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할 바를 나눠봅시다.


3. 자신의 영적 상태를 4가지 마음 밭에 비추어 살펴보고, 옥토! 좋은 밭이 될 결심과 계획을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2-18
조회 336

제목: 죽이는 사람 vs 살리는 사람 (마 12:1~8)


1875년 독일에서 두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어렸을 때, 친엄마가 유대인과 재혼하는 것으로 상처를 받았고, 그것이 유대인을 증오하는 동기가 되어 난폭한 성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독재자가 되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하였고, 수천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30일 벙커에서 음독과 권총을 사용한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또 한 사람은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신학자, 목사, 교수, 음악가,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 대륙에 사는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질병으로 죽고 있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고를 듣고는 그곳으로 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때부터 다시 의사 공부를 시작하고, 아내는 간호사 공부를 합니다. 마침내 38살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와 아내는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아프리카 ‘가봉’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50년 동안 선교와 의료 활동을 해서, 위대한 인류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그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건설하였습니다. 1965년 90세를 일기로 아프리카 현지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선교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프리카의 성자로 칭송받는 ‘알버트 슈바이처’입니다.

사람은 크게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와∼!’하고 탄성을 자아내는 사람과, 반대로 ‘아∼!’하고 탄식을 자아내는 사람입니다. ① 평화를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전쟁을 일으켜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②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③ 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1. 죽이는 사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장 크게 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종교적 권위와 영향력이 줄어드는 대신, 예수의 인기와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이삭을 훑어서 손으로 비벼서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마 12:2 →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당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안식일 규례도 모릅니까? 안식일에 밀을 훑어서 비벼 먹으니 말입니다.” 훑고 비비는 것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시며, 안식일의 본질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더는 따지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백성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실수하기를 기다렸다가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하기보다는, 말의 불화살을 쏘아 아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잘못된 말 한마디가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말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8:21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라고 했고, 또 잠언 15:4에서는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보다는, 바리새인처럼 오히려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로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죽이는 말, 정죄하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 이해하고 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살리는 사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살리는 사람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대표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로부터 귀신을 좇아내어 그들을 온전케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또 예수님을 음해하고 고발합니다. 안식일 날 사람을 고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안식일에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는 일이 선한 일이냐? 악한 일이냐?” 그리고 스스로 답하십니다. 마 12:12b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안식일을 범하고 율법을 어긴다’는 누명을 쓰면서도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소외된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는 분이시지만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너 죽고, 나 살자!’를 외치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나 죽고, 너 살라!’ ‘내가 대신 죽으니, 너는 살아라!’ 하신 분입니다.

1865년 4월 9일은 인류 역사상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땅에 살고 있던 모든 노예들에게 ‘해방을 선포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남부와, 노예를 해방하자는 북부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남북전쟁’입니다. 링컨은 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예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4월 14일,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습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워싱턴에 있는 포드 극장에 연극을 관람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노예 해방을 반대했던 연극배우인, 암살자의 총을 맞고 쓰러졌고, 그다음 날 아침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흘이 지나 링컨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로 운구하기 위해, 백악관을 떠나 펜실베이니아 대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길 양쪽에는 수많은 사람이 줄지어 서서 링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 인파 속에 아들과 함께 연도에 서 있던 한 흑인 중년이 있었습니다. 링컨의 영구차가 그들 앞으로 다가오자, 그는 아들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이렇게 크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저분을 잘 보거라. 저분이 나와 너를 위해서 죽었단다. 그래서 나와 네가 자유를 얻은 거야. 저분 덕분에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거지! 저분을 잘 보아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링컨 덕분에 노예 생활하던 흑인들이 해방된 것처럼, 예수님 덕분에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해방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죽이고 자신은 살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남을 살리고 당신은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3. 죽어가는 사람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관심은 ‘육신의 생명’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 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성경학자이며 부흥사인 채프먼 목사는 복음서를 샅샅이 살펴본 후, 이런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께 와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총 40명인데, 그중 34명은 친구 등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채프먼 목사님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은 겨우 6명으로 15%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비중인 85%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로 나와서 치유의 역사를 받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서 저는 사도 바울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롬 10:13∼15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을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을 아름답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발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발이기 때문입니다. 딤전 2:4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고도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 사람의 죗값을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9:16 →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믿지 않는 우리 가족들의 영혼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친구나 이웃들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수요일이 ‘재의 수요일’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바라기는 이 기간을 가족 전도의 기회, 친구와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 4월 둘째 주일에 맞이할 ‘부활절’이 진정 ‘영적 부활의 축제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1875년 독일에서 태어난 두 사람, 히틀러와 슈바이처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복음서를 살펴보면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은 겨우 15%에 불과하고, 85%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로 나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본인의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3. 만약 죽어가는 영혼을 보고도 내버려 둔다면 그 피 값을 우리에게서 찾겠다고 하신 말씀을 새기며, 가족 (친구,이웃) 구원의 사명과 계획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2-11
조회 289

제목: 죄 사함을 받아 치유까지! (마 9:1∼8)


사람이 마음에 죄를 품고서는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심어두신 ‘양심’이 있어서, 자기의 죄에 대하여 송사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자기의 양심이 자기를 고소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양심 때문에 괴롭습니다. 마음에 심한 번민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괴로움이 심해질수록 그 사람은 정신과 기력이 쇠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노래하기를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예수님은 인생의 속 깊은 문제까지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악한 생각, 심지어 혀 밑에 감추어진 죄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의 심각성’과 ‘주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육체의 질병까지 치유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늘 본문에는 온몸이 마비되어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한 ‘중풍 병자’가 나옵니다. 중풍(中風)은 잘 아시는 대로 ‘뇌졸중’(腦卒中)이라고도 하는 질병입니다.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뇌에 혈액 공급이 안 되면서, 산소결핍으로 뇌세포가 죽으면서 갑자기 인사불성이 되어 넘어지거나, 전신 혹은 반신불수, 구안와사, 언어장애와 같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질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중풍 병자’는 ‘혈관 문제’로 전신마비가 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정신적인, 영적인 문제’로 인해 육체에 마비가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중풍 병은 순전히 ‘죄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까?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어떤 ‘질병’이나 ‘재난’을! ‘죄로 인한 형벌’로 간주하는 생각에 반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 역시 본인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경우 모두! 죄의 결과로 재난이나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중풍 병자를 향해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질병이 다 죄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중풍 병자의 경우는 죄가 그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깊은 내면 속에 숨겨져 있는 죄의 문제를 다루면서, 죄가 얼마나 사람을 심각하게 망가트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주 활동무대셨던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치유를 바라는 한 중풍 병자를 네 명의 친구들이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예수님이 앉아계신 방의 지붕을 뚫고 병자의 침상에 줄을 매서 달아 내립니다. 그러자 주님은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이전에도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는 했어도, 죄 사함에 관해 말씀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추론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풍 병자는 과거에 어떤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죄를 범했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이 죄로 인한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신음하다가, 마침내 그는 육체적인 질병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자신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진정한 문제는 중풍 병의 치유가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은 이 사실을 꿰뚫어 보셨고, 질병 자체를 치료하시기에 앞서 그 질병의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육체의 질병까지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숨겨진 죄의 문제를 보실 수 있는 예수님! 그리고, 문제를 보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사람이 죄 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 오직 예수님만이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중풍 병자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문제로 양심이 괴롭고 심령이 평안치 못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저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시고, 주님 앞에 나와 토설하십시오. “주님!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고백하고 간구하면! 주님은 동일하게 “아무개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용서의 기쁨과 육체의 치유를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대신 죗값을 담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믿고, 또한 이것을 전해야 합니다. 목사와 그리스도인이 전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에 대한 지적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서기관들의 문제를 반면교사 삼아!

그런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즉각적으로 서기관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마 9:3 →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마가복음에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 2:7 →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는 이들의 생각은 사실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몰랐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세상 죄를 사하실 권세가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기에 서기관들의 마음에 걸림이 생겼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주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세 기자가 동일하게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비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들을 폄하하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성도가 목사에게 섭섭한 일이 있거나 뭔가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가 전하는 말씀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들으면서 ‘당신이나 잘하쇼!’ 이런 생각이 들고, 뭐 잘못된 것은 없나? 찾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은혜는커녕 자신의 심령만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손해 보는 것은 누구인가요? 바로 자신입니다. 객관적으로 전해지는 진리의 말씀에 아멘! 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그 믿음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인생을 지옥 구덩이에 던져 넣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가운데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성도 여러분!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실은 둘 다 어렵습니다. 둘 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굳이 경중을 따진다면, 죄 사함의 권세는! 인간에게 주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병을 고치는 기적은!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통해서도 자주 일어났던 일입니다. 물론 제자들과 사도들이 일으킨 신유의 기적들도 자연인인 그들이 이뤄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둘 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어려운 일이, 바로 죄 사함을 선언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서기관! 바로 너희들처럼 불신하는 자들에게, 내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공동 번역은 이 본문을 이렇게 좀 더 생생하게 번역했습니다. “이제 인자가(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어…”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한 생각으로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서 주님은 다시 분명한 말씀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마 9:6c →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사지가 마비되어 꼼짝 못하던 중풍 병자가 벌떡 일어나서 누워왔던 들것을 메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실로 마음 속의 질병이었던 죄의 문제와, 육체의 질병이었던 중풍을 한꺼번에 치유 받아 다 건강해져서 돌아가는 축복된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랜 세월 동안 죄책으로 인해 시달려 왔던 중풍 병자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심각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치유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외적인 질병과 내적인 죄의 문제를 일시에 도말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하신 주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신 주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죄로 인하여 마음의 병이나 혹은 육체의 질병을 앓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그리고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는지? 나눠봅시다.


2. 주님의 용서의 선언에는 전제가 있고, 우리에게서 보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과 ‘고백’ 입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오늘날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또한 ‘죄’를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2-04
조회 363

제목: 입과 귀의 신앙에서 행함의 신앙으로! (마 7:21∼27)


1. 믿음과 행함의 갈등?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부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본문의 의미를 어떻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여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 심각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 7:21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선한 행위를 강조하시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요? 믿음을 가져도 선한 삶이 없다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여기 “믿음을 가져도, 선한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건가요?”라는 질문은 목사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받는 질문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여러 번 비슷한 질문을 받았고 설명을 해왔습니다만, 여전히 받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문제는 늘,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설명하는 저나 듣는 성도들이나, 그때마다 이해가 새로워질 만큼! 이 구원의 문제는 깊은 신비가 있는데 반하여, 우리의 이해의 폭과 깊이는 충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정답부터 말씀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100%!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2:8∼9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서 말씀뿐만 아니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성도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믿음으로 의로움에 이른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는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으로부터, 중세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통해 오늘까지 ‘개신교의 핵심 교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바울과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도 ‘선한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율법주의’를 거부한 것이지, 선한 행위 자체의 중요성을 거부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 무용론’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 행위는 은혜를 입은 자들의 삶에,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열리는 열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 7:16∼20을 통하여 ‘믿음은 나무’이고, ‘행함은 열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삶의 열매! 즉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보면, ‘그가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밝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행함은 신앙의 정체성과 진위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그의 자녀다운 삶으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함까지 나아가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 2:17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22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즉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고, 행함으로 이어져야 생명이 있고 온전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함께 가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호수에서 작은 배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한 늙은 선원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이 젖는 한쪽 노에는 ‘믿음’, 다른 쪽 노에는 ‘실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승객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자! 한번 보십시오. 노인은 ‘믿음’이라는 노를 힘차게 저었습니다. 배는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맴돌았습니다. 이번에는 ‘실천’이라는 노를 저었습니다. 역시 배는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맴돌 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두 개의 노를 함께 저었습니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노인은 승객을 향해 잔잔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기독교인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믿음 없는 행위’와 ‘행위 없는 믿음’은 모두 제 자리를 맴도는 배와 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반드시 믿음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의 실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언어의 유희일 뿐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말뿐인 믿음의 허상

오늘 본문 22~23절을 보겠습니다. 마 7:22∼23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평생을 주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설교하고, 봉사했는데, 심지어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권능을 행했는데,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 사람의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여, 주여!” 그냥 주여! 부른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강조하여 거듭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상당히 열정적인 신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또한, 이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도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고백을 거부하신 이유는, 말로는 주님을 불렀으되 삶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믿음이 바른 행실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이용만 했을 뿐이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권능을 행했더라도, 그것은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6:46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권능을 행했는지는 모르지만, 선하지 않고 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입술로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딤후 2:19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3. 참된 믿음은!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 말씀의 전반부에서는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대조했습니다. 이제 후반부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있고, 26절에는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마 7:24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6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평상시에는 그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고,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그 차이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 “너희가 내 말을 성경공부 때만 사용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너희는 모래사장에 집을 지은 미련한 목수와 같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말씀을 들은 대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심판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저 이렇게 믿어도 되려니!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때, 하나님의 심판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했는지? 아니면, 듣기는 했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았는지를 판가름할 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날은 언제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요, 참된 보상의 날이요, 결산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126:5~6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때에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는! 삶과 행함으로 스스로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속사회의 반(反)기독교적 정서가 높아진 것도, 실은 귀로만 듣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거짓 신앙인들 때문입니다.

참믿음을 가진 사람은! 신앙과 은총에 의지하여, 현실의 죄악과 탐욕과 부패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삶의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가 있는 참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께도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귀히 여김을 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 때문에 갈등해 본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믿음’이라는 노와 ‘실천’이라는 노를 함께 저어야, 배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음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당신의 응답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