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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이재영
2025-01-04
조회 282

제목: 세 가지 동사, 세 가지 약속! (수 1:1∼9)


1. 2025년 희년을 맞아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일정들:

① 1/19 창립 50주년 기념일 ② 2/23 창립 50주년 기념예배 및 장로 은퇴 및 임직예식 ③ 5/4∼5 30·40 캠프(교회학교와 함께) ④ 5/25 창립 50주년 기념음악회(부천시민회관) ⑤ 6/1, 12/7 성경암송예배 ⑥ 6/15 홈커밍데이1(원로목사님), 6/22 홈커밍데이2(제가 목회하는 동안에 신앙생활 하셨던 분들 – 성도 여러분이 연락하셔야 합니다.) ⑦ 6/29 성경퀴즈대회(모세오경) 11/23 (4복음서) ⑧ 8/15∼16 50·70 리트릿 ⑨ 9/7∼ 사마리안 퍼스(선교지에 선물 상자 보내기) ⑩ 9/28∼한달, 전도초청(새생명 전도축제) ⑪ 11월 중 실업인선교회 주관 해외선교지 방문 ⑫ 희년 기념사업으로 (개안수술 지원, 선교지 태양광발전소 설치 혹은 도서관 트럭 봉헌, 강화 교동에 평화통일 기도교회 건립 지원)


2. 개인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룬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시상계획

① 개근상: 주일 52주(현장 만) ② 성경암송: 400구절(송신후 학생 백만원 상금/ 그러나 그것은 첫 번째 암송자여서! ③ 성경필사: 신구약 전체(언제 시작했던지, 금년에 제출하시면!) ④ 성경통독: 1회 이상 /최다독 ⑤ 전 도: 등록 및 5주 새가족교육 마치고 속회와 선교회 배치까지 하게 하면!


지난 40년간 이스라엘을 이끌어왔던 영도자 모세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큰 손실이고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힘들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낙심하고 주저앉아 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지명하셨습니다.

새로운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된 여호수아는 물론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형통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상황은 무척 어렵고, 짐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향한 힘찬 행진을 시작합니다.

기독교 정신은 가만히 앉아서 묵상하거나 명상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가지 동사입니다. 수 1:2 →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1. 일어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동사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죽었다고 힘없이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라고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신앙입니다. 성경에 ‘일어나라’는 말이 618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났습니다. 다리 저는 자도 일어났고, 앉은뱅이도 일어났고, 절망의 자리에서도 일어났고, 죽었다가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어서 침상에 누워있는 어린아이에게 “소녀야! 청년아! 나사로야! 일어나라. “달리다굼” 하심으로 일으켜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 문을 열고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도! 좌절과 낙담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성전 입구에서 앉은뱅이로 구걸하던 사람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행 3:6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자 40살이 넘도록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그가 베드로와 요한의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설 때,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오그라졌던 다리가 쭉 펴져,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님들! “밟히면서도 노랗게 피어나는 민들레와 같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 어떤 역경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도약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동사는! 요단강을 건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홍해를 건넌 것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도약’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3장을 보면,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을 건너는 데 강물이 가장 범람하는 시기에 강을 건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수 3:14∼15 →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강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그동안 40년이나 방황케 하셨던 하나님이, 왜 하필 가장 건너기 힘들 때를 골라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위하여 또 다른 ‘영적 도약’을 체험케 하기 위함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스스로 정해 놓은 선을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속회, 선교회에 참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주일예배로 너무 충분해! 난 새벽엔 죽어도 못 일어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없습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상 받을 여러 가지 일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한계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도전과 도약의 믿음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물이 펄펄 끓기 위해서 1도만 높이면 되듯이, 한계는 도약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전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동사는, 앞을 향해 계속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멈추지 말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목적지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애굽 쪽을 바라보지도 말고, 광야에 머물러 불필요한 고생도 하지 말고, 축복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뚜렷한 목적을 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미래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네 발로 ‘밟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북쪽 헐몬산의 눈이 녹아내리고, 또 우기와 홍수 철이라서 강물이 가장 많고, 요단강 폭이 가장 넓을 때이지만 앞으로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땅 짚고는 누가 헤엄을 못 치겠습니까? 신앙이란! 모험이고 도전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어려울수록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모험적 신앙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 축복을 약속합니다.


첫째, 주리라.

수 1:3∼4 →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두려움과 낙담의 자리에서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시겠다’는 말씀을 2천 번 이상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함께 하리라.

수 1:5 →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여호수아)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을!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에, 더욱 함께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더욱 함께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형통하리라.

수 1:7∼8 →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기 ‘형통한다’는 말은 ‘성사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내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사시켜주시는 형통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형통’이라는 말을 75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를 위해 성공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2025년을 출발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 형통한 삶의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희년 프로그램 일정 중에 ‘기대되고, 꼭 참석하리라!’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나눠보고, 속회 단위로 함께 할 계획을 세워봅시다.


2. 2025년에 상 받을 여러 가지 일들을 제시해 드렸습니다. ‘나도 도전해 보리라’ 마음먹은 신앙 성장·성숙의 일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세 가지 동사’와 ‘세 가지 약속’을 열거해 보고, 그중 본인에게 가장 도전이 되고 힘이 되는 내용은 무엇 인지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2-28
조회 180

하나님께 복 받는 교회와 성도! (시 115:3∼15)

 

오늘 본문인 시편 115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째 성전을 짓고, 헌당할 때 바쳐진 헌시(獻詩)입니다. 새 성전을 완공하고, 그들이 성전으로 올라갈 때 불렀던 찬양 가사란 말입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 땅에 돌아와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복합적인 이유로, 무려 16년 동안이나 성전 건축이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암울한 때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앞장서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방에서 반대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지금 흉년과 기근과 경제적 불황이 심각한데, 무슨 성전 건축이냐고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더군다나 사마리아 토착민들의 공격까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그들과의 싸움도 버거운데 성전 건축이 말이 되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함께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사기까지 꺾어놓았습니다. 하지만 학개 선지자의 탁월한 영적 지도력에 의해서 성전 건축은 계속 진행됐고,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이때, 오늘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힘차게 선포합니다. 시 115:3 →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마 19:26 →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꿈마을엘림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부족했는데, 하나님께서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50년 전! 복음의 불모지 삼정동에서 땅 한 평도 없어, 시 소유의 공원용지 위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였지만, 오늘의 교회로 부흥 성장케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15절 말씀이 실감 나지 않습니까? 시 115:15 →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복 받은 교회와 성도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결실인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이 ‘아멘!’이신가요? 아멘.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받는 축복을 오늘 성경은 → ‘삼중적으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 115:9∼11절입니다. →

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최대로 축복하실 때, 대개 삼중적으로 반복해서 그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지는 12∼13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12.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13.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성전 건축을 이룬 이스라엘 집, 아론의 집안,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렇게 오늘 성경에서 약속하신 복을! 저와 여러분도 똑같이 누리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세 가지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 보호해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9,10,11 →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기 ‘도움과 방패’라는 말은 ‘보호와 은총’을 뜻합니다.

사실 인생은 모험입니다. 모험이란? 모르고 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모험에는 반드시 위험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호하심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짓는 데는, 많은 위험과 방해가 따랐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힘든데!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공격해왔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성전 짓는 일을 계속할 때! 하나님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생의 보호자’십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여호수아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때, 이들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나아갈 때, 언제나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했던 다윗! 수많은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진을 쳐주셨습니다. 시 34:6∼7 →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불모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때 숱한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박해자들의 암살 계획의 위기 상황에서도, 독사한테 물리더라도, 바다 한복판의 노도 광풍중에서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행 27:24∼25 →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주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를 보호해주십니다. 마 28:20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런 하나님의 ‘보호의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생각해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12∼13 →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정리해주셨습니다. 마 16:23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깊이 생각해주시는 것입니다.

12절에 ‘생각하사 복을 주신다’는 표현은 ‘특별히 깊은(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생각해주신 축복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간증했습니다. ⇨ 시 8:4 → 크게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 40:5 → 많이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 92:5 → 깊이 생각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복’이 임하시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사정을 아시고, 아픔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인생!” 생각만 해도 얼마나 든든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지 못하던 라헬을 생각해주시니까, 태의 문이 열려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고(창 30:22), 또한, 불임여성이었던 한나를 생각하여 주시니까, 사무엘 외에도 자식을 다섯 명이나 더 낳을 수 있었습니다(삼상 1:11). 할렐루야!~ 우리 모두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번창케 해 주시는 복입니다.

시 115:14 →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소위 ‘제사장적 축복’(Priestly blessing)입니다. ‘풍성한 축복’(abundant blessing)을 말합니다. 여기 ‘번창’이라는 말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훨씬 능가하는 ‘흥왕’을 뜻합니다(become greater by far than). 아버지 다윗의 헌신의 결과, 아들 솔로몬은 그 누구보다도 창성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전 2:9 →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여 그 어려운 경제 한파 속에서도 성전 건축을 위해 헌신하였더니, 하나님은 번창의 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시 115:14 → “주께서 너희를 번창하게 하여 주시고, 너희의 자손을 번창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것은 없고 생활은 어려웠지만, 학개 선지자의 지도를 따라 성전 건축을 위해 산에 올라가서 나무라도 베어오기 시작했더니! 하나님께서 당장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학 2:19 →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동안 흉년으로 시달리던 그들에게, 당장 풍작의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 시편 115편 15절 말씀과 같은 놀라운 축복을 ‘선언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 115:15 →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다.” 아멘.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사실을 당신은 믿으십니까? 환경과 조건은 불가능 인데! 그렇게 믿고 살아서 받은 개인적인 응답이나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와 성도들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들(교회)입니다. 이에 대한 간증을 나눠봅시다.

 

3. 우리는 지금 정치 경제적으로 그 어느 해 보다 어려운 때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할지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2-21
조회 230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마 1:18∼25, 눅 1:26∼38)

 

오늘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믿고 맡길 만한 사람 - 요셉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까요?

 

첫째, 요셉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셉이 마리아라는 처녀와 약혼을 했는데, 어느 날 약혼자인 마리아가 자기와 상관없는 아이를 뱄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가졌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요셉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마리아! 그녀는 순결한 여인이 아닌가? 그런데 아이를 임신했다니! 의분이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율법이 정한 방법대로 처리하고픈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내가 그렇게 한다면 마리아는?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당할 수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이어져 갔습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요셉은 침착하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베풀기 위해 고민하였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 1:19∼20a →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 ‘생각했다’라는 말은 ‘고민했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한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고민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입장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남의 허물과 약점을 알게 되었을 때, 기가 막힌 말거리를 알게 되었다고 흥분하셨습니까? 아니면 드러내지 않고, 덮어 주려고 깊이 생각하셨습니까?

성경 잠언엔 이렇게 말합니다. 잠 17:9 →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 주려는 요셉의 의로운 마음을! 우리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셉과 같이 거룩한 고민과 침착함, 배려를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관계를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요셉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그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가 낳을 아기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만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이,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입니까? 마리아에 대한 ‘긍휼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마리아에 대한 ‘동정심’ 때문입니까? 물론 긍휼의 마음과 동정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오해를 풀고, 기쁨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이는 일에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천사가 요셉을 설득하는 장면이 20∼23절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은!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마 1:20∼22 →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그러면서 천사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사 7:14(마 1:23)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요셉에게 먹혀들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이 먹혀들어 가는 마음은 복 있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들어 가지 않는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쌓인 사람들, 쓸데없는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을 품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겐 말씀이 먹혀들어 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보세요.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같이 말씀에 대한 수용력이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못 믿을 일을, 요셉은! 주의 사자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요셉은 즉시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결국, 이 믿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셋째, 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마 1:24∼25 →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아내와 동침치 않았습니다. 아내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외경에 의하면, 요셉은 아주 늦장가를 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육신의 욕망을 절제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식 결혼을 하고도 부인과 가까이하지 않는, 인내와 경건의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성결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러한 요셉의 경건을 배우기 위하여 12월 14일부터 성탄일까지 열흘 동안 금식일로 선포하고 매일 한 끼씩 금식하며 주의 오심을 경건하게 맞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사모하여, 몸도 마음도 영혼도 순결하게 지켰던 요셉과 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세속적인 성탄 문화를, 성경적인 경건한 성탄 문화로 바꾸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순종과 헌신의 여인 - 마리아

 

자! 이제,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까요?

 

첫째, 마리아는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처녀 마리아는 어느 날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뜻밖의 소식이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고서는 임신을 할 수가 없는 법인데, 아직 동정녀인 자신의 몸에 아기가 잉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 과학과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아해하고 놀라워하는데,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눅 1:37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아멘’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만드셨고,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마 24:35 →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사 55:11 →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에 대해서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눅 1:38 →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우리들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성도들이 되어서, 늘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순종과 헌신의 여인이었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동거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사랑하는 약혼자와의 파혼을 의미합니다. 그 사회에서 발붙일 수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의 율법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돌에 맞아 죽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신 22:23∼24 →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잉태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눅 1:41c∼42 →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네! 여자 중에 제일 복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성경 인물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탄생부터 성장,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3일 만에 부활 승천, 이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복된 일을 다 체험한 사람, 오직 한 사람! 마리아뿐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었고, 그 말씀에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가장 저주받은 여자일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가 가장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눔과 묵상

 

1. 오늘날 부부간의 신뢰와 믿음이 점점 희박해져서 이혼이 보편화되고, 가정의 문제들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중 요셉의 모습을 통해 느낀 바를 나눠봅시다.

 

2. 이 대림절과 성탄절에 회복해야 할 우리의 경건과 절제의 삶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순종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삶과 비교해서 나의 삶은 어떤지? 이야기해 보고 본인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2-14
조회 250

더 늦기 전에! (암 7:1∼9)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모스’는 남 왕국 출신으로 BC 8세기경 북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드고아’라는 지역 출신으로, 그의 직업은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농부였습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아모스’의 이름 뜻은 →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자”입니다. 그는 시대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던 선지자였기에 적절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는 불의로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온몸으로 선포한 정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5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 첫째: ‘황충이 모든 풀을 베어 먹는 환상’(암 7:1∼3) 둘째: ‘불이 모든 물을 사르는 환상’(암 7:4∼6) 셋째: ‘다림줄을 드리우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의 환상’(암 7:7∼9) 넷째: ‘여름 실과가 한 광주리에 담긴 모습의 환상’(암 8:1∼2) 다섯째: ‘성전이 무너지는 환상’(암 9:1∼6)입니다. 이 다섯 개의 환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징표들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세 번째인 ‘다림줄 환상’입니다.

 

1. 기준이 되는 다림줄

‘다림줄’은 건축에서 벽돌을 쌓거나 벽을 세울 때, 수직을 잡아주는 도구입니다. 실 끝에 무겁고 뾰족한 추를 달아서 중력의 법칙을 이용하여 정확히 수직을 잡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319ecbf48b80b.png<다림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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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 레벨기>

이 다림줄에 맞추어 담을 쌓아야! 견고하고, 무너지지 않고, 아름답게, 높이, 쌓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은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환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집을 짓는 자’에 종종 비유됩니다.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짓는 집’과 ‘모래 위에 짓는 집’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나,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엡 2:20∼22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삶은! 거룩한 성전의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기초와 모퉁이돌 위에 믿음의 벽돌을 쌓아서,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살림집도 잘 지어야겠지만,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지을 때는, 더더욱 정성을 들여 잘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림줄을 따라 정확하고 반듯하게 벽돌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다림줄이 있음에도 그 줄을 따르지 않고, 내 멋대로 벽돌을 쌓는다면! 결코 튼튼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삐뚤어진 벽돌은 다림줄에 맞추어서 바로 잡아야지, 그대로 놔둔 채 또 다른 벽돌을 쌓게 되면! 결국은 집 전체가 삐뚤어지게 되고, 마침내 허물고 다시 지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건축 기술도 상당히 발전했지만, 그러나 기술만 가지고는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짓는 사람의 인격과 마음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인격, 대충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다림줄의 선을 따르지 않으면, 잘 설계된 건축도면을 갖고 있더라도, 틀림없이 부실한 집, 아름답지 못한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림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다림줄’은 →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의 바르게 서 있는지, 아니면 기울어져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말씀의 다림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기준을! 이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인간적인 판단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판단의 기준은! 스스로는 바르고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 착각이나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 매일 매일의 삶을! 다림줄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확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쌓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마침내 보기에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는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께 칭찬받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개인의 신앙생활도 다림줄에 맞추어야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의 다림줄에 맞추어 자기 인생을 쌓는 것입니다. 좀 튀어나와 있으면 집어넣고, 들어가 있으면 밖으로 내어야 합니다.

조종사들에게는 ‘비행 착각’이라는 ‘착시현상’이 있습니다. 악천후나 야간 비행, 회전 비행, 오랜 시간 비행하다 보면! 감각에 이상이 생겨, 자신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착시현상은! 바다 위를 비행할 때,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하여,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가 하늘처럼 보여,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고 거꾸로 날아가는 현상입니다. 자신은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항공기의 추락이 대부분 이런 비행 착각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런 때의 기본 수칙은! 자기의 감각보다 계기판을 보고 계기판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앉아 있을 때, 옆 차가 앞으로 가면 순간 내 차가 뒤로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내 감각을 신뢰해서는 안 되고, 바깥의 고정물체나 계기판을 신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깊은 산속이나 사막에서 나침반을 신뢰하고 가야지, 자기 육감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벽돌을 쌓아야지 여기에서 틀어지면 튼튼하게 쌓을 수도 없고, 높이 쌓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이 건강하고 튼튼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의 다림줄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하는 것이 ‘경건 훈련’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므로! 자기라는 기초를 바로 세워가고, 기도로 다림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살펴서 바로 세워야, 그 위에 크고 든든하고 아름다운 인격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3. 공의롭고 동시에 사랑이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도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의의 다림줄’입니다. 권력자들은 이 정의의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아모스가 다림줄을 띄워놓고 보니, 이스라엘이라는 건물이! 기울어도 한참 기울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 상태 그대로 두면 무너질 것이니까, 다시 쌓던지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자들이 공의를 싫어하는 것은, 자기가 현재 잡고 있는 권력과, 그 편리함을 잃어버리기 싫어서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그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높이 쌓을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런 정의의 다림줄을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은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소리가 듣기 싫다고 억눌러 놓으면! 사회는 한순간에 망하거나, 구부러져 왜곡되어 발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다림줄에 맞추어, 쌓은 담을 측량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 담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패역한 상태임을 명백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암 7:8∼9 →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오늘 우리 시대도 하나님의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인 성장을 높이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볼 때 기울어져 있으면 어느 순간 우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계기판이요, 다림줄입니다. 이 다림줄에 맞추어 내 인생을 설계하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사업을 운영함으로! 반듯하고 건강하고 높이 쌓을 수 있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 시민 중 25세 미만의 사람들의 사고에 달려있다.” 이 말에 빗대어 보면!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장래는! 교회학교에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장래도! 역시 청소년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는 신앙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부모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했다면 이 시간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자녀교육에 하나님의 다림줄을 대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삐뚤어져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다음 세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주의 자녀들로 세워져서, 공의와 사랑이 펼쳐진 복된 나라를 일으키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인생의 집을 짓는 자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나눠봅시다.

 

2.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므로 자기라는 기초를 바로 세워가고, 기도로 다림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경건훈련’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에게 맡기신 ‘창조세계보전’의 사명과 과제를, ‘더 늦기 전에’라는 시급성에 비추어서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2-07
조회 204

회복의 새날을 고대하며! (호 14:1∼9)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찾아오셔서 돌아서기를 권하고 계심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 호세아서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더럽고 추하게 된 고멜이 사는 길은! 호세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돌아오는 것인 것처럼, 패역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들을 사랑해 주시고, 고치시고, 복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 돌아오라! 부르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호세아의 마지막 설교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고,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호 14:1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여기 ‘불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모든 지난날의 삶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참 야속한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에 잘 출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고, 인생의 목표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열정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방식을 신앙적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면, 그것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친구와 사귀고 있다면 그 친구와 헤어져야 하고, 직업이 나로하여금 죄짓게 한다면 그 직업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생활방식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 생활 습관을 뜯어고치라는 것입니다.

2∼3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와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 14:2∼3 →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①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② 말을 타지 아니하며 ③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네! 이것이 참된 회개와 마음의 결단입니다. 여기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라는 말은! 지금까지는 너의 판단, 너의 경험을 앞세워 살아왔지만, 이제는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버려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① 우선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강대국을 믿는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② 둘째, ‘말을 타지 아니하며…’ 말과 같은 군사력을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③ 셋째,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며…’ 한마디로, 헛된 우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에, 이스라엘 백성의 바른 응답!은 무엇입니까? → 먼저 ① 이스라엘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길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입술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입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②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외세를 의지하거나, 세상적인 힘을 의지하지 않고, 또한 마음을 빼앗기고 살던 우상을 더는 섬기지 아니하고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로 돌아오라!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응답입니다. 이런 신앙적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

자! 그러면 1) 하나님은 그분에게로 돌아온 백성을 어떻게 대우해 주십니까? 호 14:4 → “①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②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③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①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을 고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짓고자 하는 본성을 치료하신다는 뜻입니다. 본성이 치료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고는 어떻게 하십니까?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네! 심령이 고쳐진 사람에게, 한없는 사랑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③ 그리고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자에게는, “나의 진노가 떠났음이니라.” 다시는 진노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이전까지 징계의 대상, 심판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는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 이어지는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들입니다. 호 14:5∼7 → “내가 이스라엘에게 ①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②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③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④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폭포수 같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전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은, 꽃으로 말하면 백합화처럼 향기 나는 삶이 되고, 그 안정성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가 깊이 내려 든든한 삶이 되고, 그 풍성함으로는 무성하게 열매 맺은 감람나무와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참으로 위대하고 열매 맺는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도 믿고 또 동시에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면, 둘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둘 다 잃어버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동경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그렇게 살아,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를 변화 시키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그야말로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개망나니 같은 사람을,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사랑이야 말로, 참으로 위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은 다른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가장 악하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바꿔서,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잘해주는 무책임하고 눈먼 사랑이 아닙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추적하여, 그들과 싸워서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고치기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도, 끝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징계하시는 사랑입니다. 포기하고 그냥 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피눈물을 흘리시면서 때리고 쳐서라도 고치고야 마는 사랑이 바로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도 적당하게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고, 계속 간섭하시며, 꾸중하시며,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향기 나고 든든한 삶을 약속하시며 아낌없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9절 말씀처럼, 우리의 지식이나 총명으로 알 수 없는 사랑입니다. 호 14:9 →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세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창기를 아내로 삼았고, 그가 호세아의 사랑을 뿌리치고 세상 욕망을 따라 도망쳤을 때도 다시 값을 주고 사 왔고, 여전히 사랑했습니다.

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세상과 짝이 된 창기와 같은 삶을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고 육체의 욕심을 좆아 하나님을 버리고 나갔을 때, 우리를 사랑하사 그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당신을 떠난 백성들을 고치고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풍성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도 타락한 이스라엘처럼 신앙은 형식만 남고,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택하여 살지는 않았습니까? 당신의 새 결심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회복에 앞서 먼저 선행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하나님 대신 강대국과 무력을 의지하고, 우상숭배를 했던 삶) 내가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죄와 허물은 무엇입니까?

 

3. 위대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혹은 부모의 사랑으로 변화된 혹은 변화 시킨 경험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1-30
조회 313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6)

 

오늘 말씀에서 호세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호 6:1a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말은 죄악 된 길을 떠나,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Return하여 ‘바른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자’는 것이죠! 이 호세아서의 말씀에 근거하여,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는 ‘ad fontes’라는 대명제를 제시했습니다.

ad fontes란? 라틴어로 → ‘원천(근원)으로!’라는 뜻입니다. 여기 ad는 영어로 방향 지시사 ‘to’이고, fontes는 ‘fountains’ 혹은 ‘sources’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basics.)’ ‘근본으로 돌아가라. (Back to fundamentals.)’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명제는! 역사를 뒤흔드는 말이 되었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이 말은! 르네상스 곧 ‘문예부흥’의 신호탄이 되었고, 또한 기독교 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한 시대를 향한 선포이기도 하지만, 또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강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전자제품을 사면 사용설명서, 매뉴얼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제품의 사양은 어떻고, 주의사항은 뭐고, 주요 기능은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리고 고장 나면 서비스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등등…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네!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험당할 때, 고장 나면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든 주의사항과 안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딤후 3:15~17입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네! 성경은 우리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르게 이끌어 가는 매뉴얼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책입니다. 오늘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새로움을 갖고, 인생을 근원적으로 바르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네! 우리가 사는 길이 있습니다.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호 6:1의 말씀입니다.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멘.

여기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장소적인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원함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변화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은 계속 해왔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언제 제사를 안 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일상에서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가는 자기 백성을 그냥 지켜만 볼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을 드시고, 징계하신 것입니다. 히 12:8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주님은 개입하시고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찢으셨다, 치셨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찢으셨던 하나님이시지만, 다시 낫게 해 주실 것이요,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네! 성경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를 치료하시는데, 어떻게 치료하십니까? 2절 말씀입니다. 호 6:2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틀 후에 살리시며, 셋째 날에 일으키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아주 빠른시간에 치료하시고 회복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크고 영광스럽게 바꿔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절 후반부 말씀처럼,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호 6:2b →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아멘. 오늘 이 예배 자리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마다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와 교계를 볼 때, 어쩐지 하나님과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고, 죄악의 불길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대로는 안 됩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자!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말합니다. 호 6:3a →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패역한 길로 달려갔던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시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애굽의 왕자로 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양치는 목동으로 전락시킨 이유도,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이유도, 다 이런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출 14:4, 왕상 8:60, 신 4:35, 시 106:8 →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호세아서는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부정한 여인이었지만! 자기의 아내가 된 ‘고멜’에게 자기의 마음을 주고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고멜은 그런 호세아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또다시 방탕한 길로 나갔습니다.

그런 자기의 ‘아내’를 보고, 자기 ‘민족’의 병을 진단했습니다. “도대체 왜 자기 남편과 하나님을 끝까지 믿지 못하는 건가?” “도대체 왜 고멜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떠나서, 끊임없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인가?” 진단 결과,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4:6절에서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아는 지식! 그 마음 중심을 아는 것이 신실함과 믿음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이요,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오늘 교독문으로 읽은 시 14:1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또 시 10:4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 “하나님을 힘써 알라!”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애(仁愛, 어질인, 사랑애)의 마음을 가지고 살자!

오늘 6절 말씀입니다. 호 6: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 ‘인애’(仁愛)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dseje)라고 합니다. 이 ‘헤세드’라는 말은 그 뜻이 단순하지 않고, 여러 말로 설명해야 그 담은 뜻을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인애, 긍휼, 자비, 사랑, 후대함…’ 등 아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배도 기뻐하시지만, 이 인애(仁愛)를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배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인애를 원하신다는 것은! 예배하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펼치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이 ‘헤세드’라는 말을 인칭대명사로 부르면 → ‘헤시드’가 됩니다. 즉 = ‘하나님의 인애를 베푸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말은! ‘헤세드’이신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어서 ‘헤시드’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호 6:4b → “너희의 인애가 아침 안개와,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한 마디로 쉽게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호세아는 사회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질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헤시드’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으로 진단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가 믿음이 없는 ‘불신사회’가 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인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헤시드! 참으로 성도다운 성도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마음을 다잡고, 내 소원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으로 살아갑시다. 또한,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헤시드’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나의 신앙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를 베푸는 사람인 ‘헤시드’로서의 사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르게 이끌어 가는 설명서인 ‘성경’을 암송하는 일에(성경암송 400) 속회가 같이 도전해 볼 계획을 세워봅시다.

김성윤
2024-11-23
조회 308

아름다운 완주! (딤후 4:5∼8)

 

신앙 인생의 완주를 위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딤후 4:7∼8a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결론적으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있도다.” 네! 우리도 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최후를 맞을 준비를 하면서, 디모데에게 보낸 유언서와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순교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딤후 4:6 →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여기 ‘전제’(libation)란 말은, 양이나 비둘기 같은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고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민 15:5; 28:7).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포도주를 제단에 붓듯이, 자기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순교의 제물이 되고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도 바울은! 일생 동안 눈물과 땀을, 피와 모든 생명을 다 쏟아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는 제물로서의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에서 ‘신앙인의 삶’을 ‘운동선수에 비유’해서 자주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①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 (고전 9:24, 갈 2:2, 빌 2:16, 3:13∼14) ② 권투선수 (고전 9:26) ③ 씨름, 레슬링선수 (엡 6:12) 그래서 바울은 지금, 자신의 지나온 생애도 운동선수와 비교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보았던 말씀인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세 마디의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7절로 8절입니다. 딤후 4:7∼8a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있도다.”

우리말에는 ‘현재 완료형’이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싸우고’와 ‘마치고’는 현재형으로 되어있고, ‘지켰으니’ 하나만 과거 시제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을 보면 세 단어가 모두 ‘현재완료형’으로 되어있습니다. →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I have kept the faith.”(NRSV)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자신은 신앙적인 인생을 완주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앞선 서신들에서는 신앙인의 자세는 운동선수와 같아야 한다고 ‘권유하는 형식’으로 표현했고, 시제 또한 ‘현재형’이나 ‘미래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현재 완료형’ 즉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는 다 이루어진 일로 보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으로서 위대한 승리를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세 마디 → ‘① 싸웠고 ② 마쳤고 ③ 지켰노라.’라는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여기서 ‘싸웠다’는 의미는! 고대의 여러 운동 종목들 가운데 레슬링이나 씨름 경기와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끌어안고 땀을 흘리며 씨름하는 레슬링 선수처럼, 바울은 선한 싸움을 해왔습니다. 이 싸움은 그저 적당히 쉬면서 구경하면서 하는 싸움이 아니라, 목숨을 건 사투였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자기 동족 유대인들과 또한 이방인들과 고통스러운 싸움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굶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탔던 배가 파선을 당하여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기고, 한마디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와 같은 싸움을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하는 싸움이 ▸복음선포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며▸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싸우는 선한 싸움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는 싸움이 ‘선한 싸움이어야’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공부하고, 왜 돈을 벌고, 왜 사업에 성공해야 하는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단지 나의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무슨 싸움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의롭고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모든 싸움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명한 사명을 자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거룩하고도 선한 싸움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번 다니엘기도회 간증자로 나왔던 임정택 대표! 그는 정신장애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히즈빈스’를 창업하고, 모든 난관을 뚫어내며 열심히 사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구홍림 장로! 그는 우성염직의 대표이사로 ‘자신의 일터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게’ 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업을 경영하고 있음을 간증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참 가치와,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목표로 사업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돈이나 명예나 권력, 이런 것에 굶주려서 싸우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좀 더 거룩하고 고상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내 달란트로, 내 직업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겠다! 내 인생에 아픔과 상처가 많지만! 이것을 통해 오히려 세상에서 아파하는 사람들! 상처 입은 자들을 보듬고 세워가겠다!” 이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갈 때, 우리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2.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이 말은, 달리기하는 선수가 끝까지 완주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이미지가 씨름이나 레슬링과 관계되어 있다면,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이미지는 달리기(race)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 경주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때론, 비난과 모함 중상모략으로 심적인 고통을 당하여 일어설 수 없을 정도가 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바울은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 목표를 향한 달리기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17절 끝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딤후 4:17c →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힘든 길을 달려왔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험하고 힘들기 짝이 없는 경주를 완주하고 마침내 결승선에 도착한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끝까지 하는 사람이 위대한 것입니다. 용두사미란 말처럼! 처음과 중간에는 잘했지만, 끝이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견디어 내고 끝까지 잘해서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라톤 선수에겐 출발을 잘하는 것보다, 완주하는 것이 더 큰 과제입니다. 1968년 멕시코 시티에서 벌어진 하계 올림픽에서 한 선수가 한쪽 다리에 피가 흥건한 붕대를 감은 채, 다리를 질질 끌면서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탄자니아의 36살 선수, 잔 스태픈 아크와리(John Stephen Akhwari)였습니다. 아크와리 선수는 달리다가 넘어져서 무릎과 발목에 심한 상처를 입어, 도저히 더 달릴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주했던 것입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부상이 심한데, 왜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뛰었습니까?” 그때, 아크와리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했습니다. “내 조국은 경기를 시작하라고 나를 멕시코 시티에 보낸 것이 아니라, 끝내라고 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는 종점까지 가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달리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때로 낙심되고, 시험거리가 찾아오고, 환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 완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믿음’이라고 할 때, 기독교가 가르치는 모든 신앙적 신조와 교리에 대해서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팎으로 닥쳐오는 유혹과 시련에 맞서 싸워야 했지만, 바울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지조를 굳건히 지키며,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리고, 믿음의 지조를 잘 지켜냈지만, 그렇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0절 이하를 보면 이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딤후 4:10∼11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또한, 이렇게 단지 바울 곁을 몰래 도망쳐 버린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못된 짓을 노골적으로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딤후 4:14∼15 →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한때는 바울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예수를 잘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자 예수와 바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선한 싸움을 중단하고, 세상 물결에 휩쓸려간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지 못한 채, 중간에 기권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의 지조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켜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신앙의 승리를 선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세 마디 ① 싸웠고 ② 마쳤고 ③ 지켰노라 라는 고백이 본인에게는 어떻게 다가오는지 나눠봅시다.

 

2. 내 인생의 목표와 비전은 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원하심과 뜻을 깨닫고 세운 것인지 생각 해 보고, 새롭게 할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이번 다니엘기도회에서 제일 마음에 와닿은 간증자의 고백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1-16
조회 192

주가 쓰시는 사람은! (딤후 2:20∼26)

 

오늘 본문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행 9:15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이 바울을 일러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께 꼭!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로 판단합니다. ‘금이냐? 은이냐? 나무냐? 흙이냐?’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삼상 16:7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는 그 ‘중심’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의 첫째는 ‘욕심없는 헌신’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이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서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께 대해서 인색한 사람은 쓰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죄의 뿌리가 ‘욕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1:15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욕심이 마음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명령도, 하나님의 요청에 대해서도 인색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온전한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십일조는! 쉽게 드릴 수 있는 분량의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쉽지 않은 드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훈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까지 부러워할 형통함의 축복을 약속하시고, 그렇게 되나 안되나! 하나님 당신을 시험해 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3:10∼12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①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②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③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제일주의’를 선언하시고, 하나님께 대해서 ‘인색한 마음과 싸워 이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의 두 번째는 ‘깨끗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도 아니요, 은그릇도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우리의 삶을 형통하지 못하게,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사용하는 무기와 전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하나님께 대해서 ‘인색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고 ②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판단해 볼 때, 사탄·마귀는 지금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두 번째 문제 즉, 사람을 더럽게 하는 전략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달려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요소는 바로 ‘깨끗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깨끗한 그릇으로 살아가기는, 점점 더 악하고 나쁜 세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양상은 시대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집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 정도로 가난할 때는, 보편적인 죄의 문화는 대개 돈과 관계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개인과 나라가 점점 부유하게 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죄의 문화는, 성(性)적인 타락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 우리를 공략하는 사탄의 코드는 ‘돈과 경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이때, 우리를 공략하는 사탄의 코드는 ‘성(性)’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성적인 순결’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귀하게 여기시고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깨끗한 삶’을 위하여 두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 첫 번째 권면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딤후 2:22a →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여기서 “피하라”는 말은 ‘안전하게 도망하라’, ‘탈출하라’는 의미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피한 것처럼, 그렇게 피하라는 것입니다.

애굽 황실의 경호대장 보디발은, 요셉을 신임하여 그에게 모든 소유를 맡겼습니다. 즉 요셉은 비록 종으로 팔려왔지만, 인정받고 사랑받는, 안정된 자리를 확보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과 주인에게 죄짓지 않기 위해서 그 유혹을 뿌리칩니다. 그 결과, 보디발의 아내는 거절당한 수치심 때문에 요셉을 성폭행범으로 몰아, 처벌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유혹에 넘어갔고, 삼손은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요셉만은 그 큰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깨끗함을 잃느니, 차라리 수치와 감옥을 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 요셉을 크게 들어 쓰신 줄로 믿습니다.

 두 번째 권면은 ‘따르라’는 것입니다. 딤후 2:22b →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즉 적극적으로 ‘쫓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쫓으라는 것입니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쫓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혼자 결심하고 그렇게 살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하라”고 권하십니다. 즉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 ▸불의를 멀리하는 사람들 ▸의에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만,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려고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성공과 번영을 꿈꾸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회가 중요하고, 선교회가 중요하고,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소그룹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워야 하고,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들은! 모두 다 죄에 대하여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회개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애통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마 5:4),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시 51:1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 괴로움이 지나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 ▸죄가 아프지 않은 사람 ▸죄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은! 결코,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혹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죄짓는 것이 생활화되었고, 별로 불편하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보편화된 죄의 문화에 익숙해져서!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다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 12:4 →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무슨 말입니까?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먼저 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주를 위하여 쓸 수 있을 때까지 ‘욕심’과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전하고 흠 없는 십일조에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싸워서, 헌신 된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②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지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윤리·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말씀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교독문으로 읽은, 시편 119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19:9 →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가시길 바랍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를 당신의 ‘그릇’으로 쓰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의 인생이 되어! 크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은 판단하신다고 하셨는데, ‘욕심’과 ‘깨끗함’이란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이 더 신경 써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는 십일조! 그 약속들을 열거해보고, 본인에게는 어떤 약속이 가장 소중한지? 나눠봅시다.

 

3.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하라고 권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속회와 선교회 등 소그룹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1-09
조회 243

경건을 훈련하는 성도가 되자! (딤전 4:5∼10)

 

‘경건’이 무엇인지? 큰 틀에서 아주 명쾌하게 정의를 내려주고 있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약 1:27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①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②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이 두 가지 면에 균형 잡힌 경건 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행 10장에 나오는 ‘백부장 고넬료’입니다. 행 10:2 →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네! 그의 경건한 삶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① 기도의 ‘내적 훈련’과 ② 돌봄과 베풂의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을 수레에 비유하자면! 한쪽 바퀴가 ‘기도’라면, 다른 한쪽 바퀴는 ‘구제’라는 것입니다.

 

1. 먼저, 내적인 ‘경건 훈련’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훈련입니다. -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딤전 4:5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우리가 매일 식사를 세 번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을 하루에 3장은 읽고 묵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1년에 성경을 완독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삶이 거룩해지고 경건해집니다. 그 결과,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직장이나 세상에서 신앙인 다운 정신과 자세로, 바르게 일하고 넘어지지 않고 살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다니엘 기도회 강사 ‘이요셉 작가’의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2) 기도하는 훈련입니다. - 다시 5절 말씀입니다. 딤전 4:5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기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입니다. 차를 마실 때도 기도하고, 과일을 먹을 때도 기도하고, 밥을 먹을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쉬지 않을 때, 성도는 경건해집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식사할 때도, 숨지 말고 의도적으로 먼저 기도하고 밥을 먹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고 지켜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부담스럽고 손해 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로 여기고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식사기도라든지, 가정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도록 훈련 시켜야 하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시련이 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3) 헌금 드리는 훈련입니다. -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한 경건의 훈련입니다. 헌금의 기본은 십일조입니다. 소득 전체를 10으로 보면 그중에 1은 하나님의 것으로 믿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신앙인의 기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적인 고백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내가 번 돈은 전부 다 내 것이라고, 자신과 자신의 삶의 둥지를 아름답고 안전하게 하는 일에만 써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헌금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합니다. 학생들도 청년들도 이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복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는 일입니다. 축복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심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은 30배 60배 100의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헌신은 결코 허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엄청난 축복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삶 속에서 체험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고후 9:6 →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4) 좋은 언어훈련입니다. - 딤전 4:7 →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성도는 좋은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망령된 말, 허탄한 말, 들으면 실족 될 말, 욕, 독설, 거짓말, 남을 헐뜯는 말,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나아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형제자매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고 신바람 나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입에서 언제나 축복의 말, 칭찬의 말이 나오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입의 종교입니다. 입으로 하는 말대로 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곧 자기의 앞날이 되는 것입니다. 입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그냥 입 자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의 지시를 받아 밖으로 표현하는 인격의 대표로, 우리 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을 몸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에 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한 나라가 잘되고, 사회가 잘되고, 가정이 잘되고, 개인이 잘 되는 건! 전부 입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입을 보고 계십니다. 감사하는 입이 되시고, 믿음의 입이 되시고, 성령 충만한 입이 되어서, 축복의 문을 여는 복된 입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다음은, 외적 경건 훈련입니다.

1) 봉사하는 훈련입니다. - 성경에 보면 ‘봉사하라, 섬기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섬김을 받을 때 기뻐하기도 하고, 반대로 섬길 때 삶의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갖게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후자! 즉 ‘섬기면서 누리는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0:45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사람과 세상을 섬기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길 때 우리는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Joy in God!’ ‘희락’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섬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Ex.) 1924년 10월 1일생으로 금년에 만 100세를 넘겨, 최장수 전직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사랑의 집짓기’(해비타트)운동.

봉사와 섬김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교회, 행복한 나라는 봉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2) 가치 있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전심전력하는 훈련입니다. 딤전 4:10 →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2024년 다니엘기도회 지난 화요일(5일) 간증자는 임정택씨 였습니다. 그는 히즈빈스 창업자이며, (주)향기내는 사람들의 대표이사로 다양한 장애인들을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로 훈련시켜 까페를 열고, 직원으로 채용하여 자립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장애인들이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하나님의 꿈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한동대학교 대학생 때에, 지극히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시대의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 섬기리라! 꿈을 꾸고 그가 발견한 대상이 바로 ‘장애우’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오랜 시간 대화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직업’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의 영향으로 대부분 ‘바리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발로 뛰면서, 그들을 교육시켜 줄 강사를 찾고, 개업할 장소를 찾고, 후원할 기업과 사람을 찾아 까페를 열어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모든 어려움과 난제를 극복해가면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큰 꿈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많은 도전을 주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나는 무엇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으리라고 믿습니다.

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선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수고하고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요,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는 여정에는 수많은 도전과 시련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꿈을 이루려면! 그 꿈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내와 헌신과 훈련이라는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합니다.

월터 헨릭슨(Walter A. Henrichsen)이 쓴 책 가운데 ‘훈련으로 되는 제자’(Disciples are made not Born)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결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훈련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영적인 훈련을 계속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 속에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건은! 조용하고 차분한 품위 있는 ‘신앙적 성품’을 가지는 것과 함께,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돌봄과 베풂의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에 모범이었던 백부장 고넬료를 하나님은 어떻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행 10:4)고 성경은 말합니다. 네!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자기의 가정뿐 아니라, 일가친척, 자기의 부하들과 친구들까지 다 구원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경건의 두 가지 영역(①내적인 영적훈련과 ②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오늘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는 것”이라는 정의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구현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먼저 ‘가치 있는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1-02
조회 350

나의 감사일기! (시 100:1∼5)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성도님들과 가정과, 우리 교회와 나라를 지금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아울러 어려운 일들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까지 믿음으로 살아오셨고, 또 더 큰 믿음으로 살아가실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이 더욱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국가적으로 그 어떤 때보다도 어려운 경제 현실과, 소망을 주지 못하는 정치현실 속에서, 많은 분들이 사업과 직장과 건강과 가정적인 어려움 속에서 맞이하는 감사절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비범한 감사, 수준 높은 감사, 차원 높은 감사, 뜨거운 감사를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1. 절대감사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감사 찬양인 시편 100편의 고백이 그대로 또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는 감사의 찬송이 우리들의 마음에, 성전 안팎에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시편 100편에는 우리가 감사 찬양을 드려야 할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2절 말씀과 같이, ①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에게 감사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②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으로서 ③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마지막 5절, ④ 여호와는 선하셔서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확실한 관계성에 근거하여 드리는 감사를 ‘절대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절대 감사는 상황이 바뀌고, 고난 속에 던져질지라도 결코 변할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 감사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절대감사’가 더욱 새로워지고 확실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가지 제안

그동안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감사함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① 많은 것을 잃어버렸어도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됨을 감사한 청교도들의 감사 ② 강도를 맞아 다 빼앗기고 매 맞았어도 자신이 강도가 아님을! 또한, 가장 귀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메튜헨리 목사님의 감사

③ 독일 재무장관을 지내고 존경받는 마르티 바덴(Marty Baden)의 젊은 시절 이야기인데, 어디를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서 묵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군가가 자신의 구두를 훔쳐 간 것이었습니다. 마침 주일이었는데, 여관 주인이 헌 구두를 하나 주며 같이 예배에 참석하자고 권해서 신고 투덜거리며 예배에 참석했는데, 앞에 앉은 한 남자가 감격스럽게 찬송을 부르고,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리며, 말씀에 아멘 아멘!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덴은 오히려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예배 후에 그가 두 발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는 깜짝 놀라, 신발을 신을 두 발이 없는데도 저렇게 감격하면서 살아가는데! 나는 헌 신발을 신게 되었다고 불평하고 원망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 그때부터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원망 불평 대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살아 마침내 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었다는 이야기

④ 손양원 목사님이 공산당에게 아들 둘을 잃고도 하나님께 드린 아홉 가지의 감사,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 3. 삼남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4. 또한,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5.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 이리요.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7.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이상의 모든 감사들은! 역경 속에서 고백 된 감사의 고백들이기에 더욱 감격하며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다른 사람의 ‘감사고백’을 듣기만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감사의 간증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 매일 매일 ‘감사 일기’를 써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날은 건너뛸 수도 있겠지만, 매일 매일 내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감사를 찾아 글로 적어보는 감사의 일기를 써 간다면, 확언컨대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제안은, 주일 날 ‘감사헌금’을 드릴 때 그저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그 한 주간에 감사했던 일들을 더듬어 그 감사의 내용을 정성껏 봉투에 적어서 드려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확신하건대! 여러분의 삶 속에 감사할 일들이 차고도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누가?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

저는 이 제안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면서 ▸누가 이런 일에 동참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 생각하면서, 이런 기대를 가져봅니다.

먼저, ▸누가 이런 일에 동참해야 할까? ⇨ 하나님께서는 이 감사의 장에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이들과 학생들과 청년들의 감사가 넘치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1:16 →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이 말씀처럼, 부모님들이 대신 내주는 감사헌금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써서 자신들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어린이, 학생, 청년들이 많이 생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서부터 감사를 드리며 성장하는 어린이들, 경제적으로 아직 독립하지 못했으면서도 정성스런 감사를 드리는 학생들과 청년들의 삶을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까?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학생들의 일천번제와 감사헌금에 하나님은 어떤 응답을 주실까? 아들과 딸의 좋은 배필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님의 정성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감사하며 기도의 소원을 아뢰는 청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실까? 저는 확신 하건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 절대감사가 가장 많기를 기대하실 줄 믿습니다. 앞서 ‘절대감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드리는 감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네! 우리들이 드리는 감사 사연에는, 이런 절대감사가 가장 많기를 기대합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드리는 상대적 감사는! 다 이 절대감사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즉 절대감사가 풍성해질 때! 생활 속에서의 감사, 상대적인 감사의 제목들은 더욱 차고도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 미리 드리는 감사가 많아지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신명기 16:15의 말씀입니다. →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 이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시작된 한 주간도, 승리의 한 주간 될 줄 믿고 감사.’ ‘새 달도 온전히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대로, 역사하여 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 ‘새로 시작한 일, 번창하게 하실 줄 믿고 감사’ 이렇게 확신 가운데 믿고 미리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 어려움 가운데서도 드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가 많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병상에서, 곤고함 가운데서, 무거운 짐을 지고도 드리는 성숙한 감사를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청교도들의 감사, 메튜헨리 목사님과 마르티 바덴 재상,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드렸던 감사는 모두 하박국 선지자처럼 역경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렸던 감사였습니다. 이런 성숙한 감사가 우리에게도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 ‘신앙생활의 성장과,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기대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의 결심을 갖게 된 것 감사, 성경통독 감사, 성경암송 감사, 전도하게 된 것 감사, 인가귀도 감사, 교사와 성가대, 선교회 임원, 속회 지도자로 섬길 수 있게 됨을 감사, 세례받음을 감사, 성찬에 참석케 된 것 감사, 새벽을 깨워 기도할 수 있게 됨을 감사, 일천번제를 시작케 하심을 감사 그리고 마치게 됨을 감사, 심방을 기쁨으로 받게 하심을 감사, 속회가 부흥하고 선교회가 활성케 됨을 감사… 그렇습니다. 이런 신앙의 부흥과 성장으로 인하여 드리는 감사가 풍성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목들, 그리고 그 내용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천국 창고를 여는 축복의 열쇠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에서 매일, 매 주일, 감사의 기도와 간증이 고백되어지고 커져가서, 풍성한 감사, 비범한 감사로 넘쳐나는 성도와 교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 자신의 ‘절대 감사’의 지수(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한 감사)는 얼마나 될지? 스스로 점검해 보고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한 일들을 생각해보고(적어 보고), 매 주간 감사한 내용을 적어 감사 헌금을 드려보는 결심, 그렇게 할 때 가져올 변화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절대 감사, 미리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 이런 감사 가운데,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감사는 어떤 것인지 나눠봅시다.